MEMORIZE RAW novel - Chapter 805
00804 A Midnight Night’s Dream(4/4). =========================================================================
웅성웅성.
한산한 오전, 캐슬 정문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등에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누군가가 땀을 비오 듯 흘리며 달려오고 있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정원의 수로(水路)는 정문부터 본성(本城) 입구까지 이어져 있다. 반들반들한 표면을 넘칠 듯 말 듯 채워진 물은 아래로 비치는 햇살을 반사해 빛이 흐른다.
“이, 이봐!”
“…….”
“거기 그쪽!”
“후룩.”
“수로에서 차 마시는 붉은 머리!”
“…음?”
수로에 종아리를 반쯤 담근 채 느긋이 찻잔을 기울이던 게헨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분명 붉은 머리라고 했다. 너무나 무례하지 않은가. 누가 이리도 겁을 상실했나 궁금해진 게헨나는 선웃음과 함께 눈을 돌렸고, 이내 분노보다는 약간 의외라는 눈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당신이…. 당신이 바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숨이 차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인의 땀을 서서히 식혔다. 게헨나는 상대가 호흡을 고르기까지 기다렸다가 가볍게 수긍했다. 여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숙였던 허리를 단번에 폈다.
“역시! 아, 아니. 우선 내 소개부터 할게. 나는 이 세상 최고의 천재 미녀 연금술사인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소환사로군. 그것도 우리 애들과 계약을 맺었어.”
필요 이상으로 큰 목소리를 게헨나는 단박에 끊었다. 비비앙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게헨나는 한 번 쓱 보는 것만으로도 분석을 마쳤다. 눈앞의 상대가 지옥 마수와 인연이 있는 소환사라는 것도, 보통 인간이 아니라 미미한 괴물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도. 물론 천재 미녀 연금술사라는 말은 애초 믿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게헨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비비앙이 지옥 마수과 연이 있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이유는 없다. 그냥 ‘의외로구나.’ 라고 생각하는 정도? 아마 굳이 말해보면 냉랭하다는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왜냐면 비비앙이 찾아온 이유가 짐작 가능했으니까.
“그, 그게….”
약 10미터 정도 남았을 뿐인데 비비앙은 꼼짝도 않고 서 있다. 황혼을 담은 듯한 두 눈과 마주하자 갑자기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비비앙은 직감했다. 왜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무언가 거하게 틀어지리라는 사실을.
비비앙은 흘끗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움을 조금 받았으면 해서.”
“도움? 무슨 도움?”
회답은 곧바로 되돌아왔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무언가 가당찮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금씩 치솟는 긴장감은 비비앙의 입을 닫게 하였다. 게헨나는 무심히 찻물을 들이켰다.
“보아하니 마수 소환에 관한 어려움을 겪어 찾아온 것 같은데….”
“어, 어. 맞아.”
“마수와의 계약은, 무릇 상호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기본일 터.”
“으응.”
“그대가 누구와 계약을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반대로 내가 그대의 계약에 끼어들 여지도 없는 셈이지.”
“그건 알고 있어.”
흡사 당연하다는 듯한 음성에 게헨나가 싱겁게 웃는다.
“그럼 되었다. 썩 물러나거라.”
“하, 하지만….”
“하지만은 뭔 놈의 하지만이냐. 그럼 내가, 네가 원하는 마수를 소환해 직접 연결이라도 시켜줘야 한다는 건가?”
“그건 아니야!”
비비앙이 순간적으로 소리쳤다. 게헨나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은은한 노기를 비춘 눈은 이제 확연히 상대를 노려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느냐.”
“놀랐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무어라?”
“정보가 부족해.”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완곡히 돌려 말하거나 미사여구로 포장하려는 생각 따위는 없다. 그래서 비비앙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했다. 부족하다고. 정확히는 상위 군단을 소환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근원 덕분에 일말의 단서를 찾기는 했지만, 애초 ‘힘을 빌려오는 것’과 ‘군단을 소환하는 것’은 판이한 문제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벽을 앞두고 있는 상황.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열리지 않는다. 비비앙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인간임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길에 일생을 바쳤어. 그런데,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아. 너무 막막해.”
“당연한 소리를. 네 능력이 그거밖에 안 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냐.”
“그렇겠지. 어쩌면 죽기 전까지 끝을 볼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있어.”
“흠?”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나는 영영 정체하고 말 거야.”
“그건 네 사정….”
“제발, 부탁할게!”
“…….”
쿵, 가방을 내려놓은 비비앙이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주먹 쥔 두 손을 양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이 일견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게헨나는 여전히 실눈을 뜬 채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아직 땀에 젖은 몸과 퀭한 눈. 과장 조금 보태서 눈 그늘이 뺨까지 내려와 있다. 몇 날 며칠을 연구에만 몰두한 걸까. 씻지 않아 지저분한 모습이 몹시 꾀죄죄하고 궁상맞다. 그러나 스스로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두 눈의 눈빛만큼은 갑갑함과 간절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적어도 저 눈만큼은 진심이라고 게헨나는 느꼈다. 온몸으로 절실함을 호소하는 태도에 작지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나, 아까 말을 인정했다면 내가 어떻게 해줄 여지는 없다. 설령 가능하다손 쳐도,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고.”
“강제 계약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조언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단 한 마디, 한 단어라도 좋아.”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에 비비앙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호오, 입속말로 탄성을 지른 게헨나의 고개가 아주 살짝 기울어졌다. 갸웃했다기보다는 다시 봤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게헨나는 근 사흘간 나아갈 길을 알려줬을 뿐, 직접 무언가 해주지는 않았다. 만약 비비앙이 ‘나와 계약하면 김수현이랑도 자주 만날 수 있을걸?’ 라는 등의 말을 지껄였다면, 필시 크게 노했을 것이다.
우선은 실력이 안 된다. 30만 원 들고 컴퓨터 전문점에 찾아가 ‘최신 게임 풀 옵션으로 돌릴 수 있는 컴퓨터로 맞춰주세요!’ 라고 하는 꼴이랄까. 게다가 가진 지식을 나눠주는 것과 부하에게 억지를 강요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러나, 비비앙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현재의 심정과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솔직함이 게헨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쳇. 그깟 마수 소환이 무슨 대수라고. 별로 강하지도 않더니만.”
누군가 살그머니 투덜거렸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비비앙이 자리를 꿰차니 배알이 꼴리는 것이다.
“누구야! 뭐? 강하지가 않아? 멍청이! 여기로 소환되는 마수들은 본신이 아닌 아바타로 소환되는 거거든? 본체가 소환되기라도 하면 너 따위는 한 입 거리도 안 되니까!”
눈을 부릅뜬 비비앙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게헨나는 흡족히 웃었다.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자부심을 드러내는 모습이 가히 나쁘지 않다.
이쯤 되면,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다.
“현재 몇 군단까지 소환이 가능하지?”
잔잔한 음성에 비비앙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4, 4 군단.”
“4 군단이라. 6, 66 군단은 특수 조건을 만족해야 하니 예외로 치고. 그럼 1, 2, 3 군단이 문제인가?”
“맞아! 몇 번 시험 삼아 소환해봤는데, 계약은커녕 반응조차도…!”
“당연하지.”
“다, 당연한 거야?”
“그래. 같은 상위 군단이라도 1, 2, 3 군단은 왕의 직속 군단이다. 즉 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할까.”
비비앙의 멍한 표정이 우스운지 게헨나가 쿡쿡 웃는다.
“가령 3 군단은 ‘토벌’의 역할을 맡는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면 선봉에 서 적을 쳐 없애버린다.”
“그럼 2 군단은?”
“2 군단의 역할은 ‘보호’. 왕의 신변을 지키는 친위 부대란다.”
“1 군단은?”
문득 게헨나가 침묵했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살며시 웃어 보였다.
“1 군단은…. 왕의 탄생을 이루어내고, 최후를 함께한다.”
“응?”
“뭐, 말이 그렇다는 거다. 분신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분신….”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비비앙.
“그렇구나…. 왕의 직속 부대…. 그래서….”
낯빛은 과히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해하기는 했으나 진한 아쉬움이 흘러나온다. 왕의 명령만 따른다 함은, 일개 인간에게는 소환될 여지가 없다는 점을 시사하니까.
“아예 방법이 없었던 거였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글쎄.”
“……?”
“나는, 방법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만.”
풀이 죽은 비비앙을 보며 게헨나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잠시 볼 일이 있어 1층 회의장에 들른 김수현은, 시야에 들어오는 기묘한 풍경에 걸음을 멈칫했다. 항상 앉는 최고 상석에 수나가 앉아 있었다. 몸집도 작달막한 주제에 억지로 뻗어 팔걸이에 손을 걸치고, 자못 거만스럽게도 앉아 있다. 그뿐일까. 권좌 옆으로는 게헨나가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서 있고,
“불초 소신 비비앙이 삼가 왕께 죄를 청합니다!”
쿵!
“소신은 감히 허락도 없이 왕의 군대를 소환해 운용하는, 큰 죄를….”
그 앞으로는, 납작 엎드린 비비앙이 쿵 머리를 찧으며 뜻 모를 말을 지껄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헛웃음과 함께 회의장을 가로지른 김수현은 상석에 앉은 수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우리 수나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이, 이익!”
그러자 한창 근엄한 태도를 보이던 수나가 인중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댔다. 방해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이 녀석이? 어디 감히 아빠한테 눈을 부라려?”
김수현은 무척 화난 기색을 비쳤지만, 이내 꼭 다문 수나의 입에 쪽 소리 나도록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이윽고 수나는 이까지 보이며 싫은 티를 역력히 드러낸다. 숫제 몸을 바동바동 비틀며 두 팔까지 휘두를 정도였다.
“이이이익! 이이이익!”
“이것 봐라. 수나 정말 안 되겠네.”
쪽, 쪽. 이번에는 양 볼에 한 번씩 입을 맞춘다. 수나는 굉장히 황당하다는 얼굴로 김수현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 인간은 도저히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한숨을 흘린다. 그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운지 김수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수나를 품에 안아 토닥거렸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수나가 누군가를 흘기며 씩 입꼬리를 끌어올린 것도. 게헨나가 조용히 한숨짓는 것도.
“그대여. 여기 있는 건 상관없다만, 현재 굉장히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중이라서. 수나를 도로 앉혀주지 않겠느냐.”
“응? 아아.”
김수현은 순순히 수나를 도로 앉혔다. 상황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김수현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몇 걸음 물러나자, 비비앙의 말이 이어졌다.
“허나 소신은 단 한 번도 사사로이 군단을 운용하지 않았으며, 외려 지옥 마수의 무력을 이 세상에 떨치고자….”
“들어보니 이 세상에서 꽤 명성이 있다 합니다.”
“왕의 성은이 망극하니 지옥의 위세가 사방에 떨치고자, 오로지 엎드려 감읍하나이다. 부디 제 청을 들어주시어….”
“비록 인간이기는 하나, 그래도 기개는 있습니다. 여느 인간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소환 진도 꽤 독자적이며 독특하지요.”
비비앙은 줄줄 읊고, 게헨나는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는다. 긴말이 이어졌으나 요지는 간단했다. 여태껏 네 부하를 허락 없이 가져다 사용했다. 미안한데 그래도 좋은 일에 썼다. 앞으로 잘 모실 테니까, 네 직속 부대 좀 사용하게 해줘라.
한데 그걸 받아들이는 수나의 태도 또한 가관이었다. 처음에는 짐짓 눈썹을 치켰다가, 게헨나의 조언에 고고한 기색을 비쳤다가, 말이 끝나고 나서는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체하고 있다. 아마 임한나가 봤다면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수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히 허락도 없이 왕의 군대를 갖다 쓴 죄는 백 번, 천 번 죽어 마땅하다. 당장에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터!
…허나,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만 보면 꺅꺅 소리 지르며 볼을 찔러대는 여느 무뢰배들과는 다르게, 덜덜 떨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확실히 왕을 대접하며, 제대로 된 신하의 예를 보이지 않는가.
이쯤 되면, 응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게헨나는 웃음을 참으며 속닥거렸다.
“어차피 이곳에 소환되는 군단은 화신, 즉 아바타에 불과하지요. 즉 지옥만이 아닌, 타 차원에 왕의 위엄을 알릴 호기입니다. 여기서는 왕의 도량을 보여도 크게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이 말이 결정타였다.
번쩍 눈을 수나는 흐음(실제로는 “우웅.” 이었다.), 침음을 흘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제 어미가 하는 것처럼 젖살이 볼록이 들어갈 만큼 턱을 괴고, 낑낑대며 오른 다리를 쭉 내뻗는다.
“진정으로 용서를 받고 싶다면, 성의를 보이거라.”
게헨나가 부연하자 비비앙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기어오더니 작고 흰 발을 공손히 받쳐 들고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김수현이 신음했다.
“응아.”
훗 웃은 수나는 이번에는 양팔을 뻗었다. 비비앙이 조심조심 안아 올리자 까닥 턱짓하며 바깥을 가리킨다.
“축하한다. 왕께서는 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아….”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나, 그래도 한 번 잘 모셔 보아라. 이 순간 너는 신하로서 인정받았으니까.”
“……!”
비비앙의 눈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윽고 수나를 안은 비비앙이 입구로 사라지자, 둘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혹여 수나가 들을까 봐 끅끅 웃는다.
“이, 이건 뭐야 게헨나?”
“너무 웃지 말거라. 그래도 연극은 아니었으니.”
“그럼 진짜였다고?”
“그래. 상위 군단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신하가 되게 한 것이다.”
“호. 그럼 이제 너를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역시. 그대가 이야기했군.”
게헨나가 흘겨보자 김수현이 어색이 웃었다. 왕이 태어난 순간 게헨나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 즉 공식적으로 1 군단장이 되는 것이다. 그럼 비비앙이 소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 기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게헨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이래 봤자 3 군단이 한계일 것 같은데.”
“…그래?”
김수현의 음성이 확연히 낮아졌다.
“하지만 너는….”
“물론, 소환에 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럼 왜.”
“정녕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냐?”
날카로운 반문에 김수현은 입을 닫았다. 게헨나의 말대로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상위 군단 소환의 1차 조건이 왕의 허락이라면, 2차 조건은 소환사의 역량이 요구된다. 그런데 비비앙이 단독으로 게헨나를 소환할 수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1,800명을 제물로 바치고도 고작 며칠이 허락됐을 뿐인데, 왕의 허락과 정확한 소환 진으로 모든 것을 대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소환은 가능하다. 정확히는 소환하려는 시도‘만’ 가능하다. 설령 응하기라도 하는 순간, 비비앙은 절대로 게헨나를 감당치 못하고 폭사(暴死)할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주 의미 없는 짓거리는 아니었다. 왕이 태어났으니 마수들의 결속력은 한층 단단해질 터. 그러니 저 비비앙이라는 인간도 점차 강해지겠지.”
위로하는 듯한 어조에 김수현은 침묵했다. 비비앙이 소환하는 마수 군단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고 한다. 확실히 좋은 일인 건 틀림없지만, 게헨나의 말은 ‘곧 돌아가야 한다.’ 는 저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마수들의 결속을 다지려면 어쨌든 지옥에 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렇…. 구나.”
애써 웃는 김수현을 보며 게헨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그대가 그럴수록….’
게헨나라고 왜 김수현의 곁에 머무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바라고, 수천 년간 오롯하게 노력해온 숙원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김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제로 코드로 시간을 되돌린 것은 게헨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서로의 목적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나 달라, 결코 부합될 수 없다.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나, 결국 이별은 빠를수록 서로에게 좋다. 적어도 게헨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목적한 것도 이뤘고, 약속한 것도 있으니….’
김수현과 재회했고, 사랑받았고, 아이도 낳았고, 아비를 보여줬다. 이 이상의 여한은 없다. 게다가 애를 낳으면 떠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미 사흘 전부터 떠나겠다고 결심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도 끝난 상태였다.
그런 게헨나로서도 단 하나 두려운 게 있다면, 바로 김수현이 붙잡는 것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간절히 붙잡는 김수현을 매몰차게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러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일전에 말한 것처럼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떠난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벌써 해가 중천인가…. 시간은 충분하려나.”
문득 혼잣말을 한 게헨나가 김수현을 보며 말을 잇는다.
“그대여. 실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무언가 화제를 돌리려는 느낌이 강했지만, 김수현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응. 뭔데?”
*
게헨나의 부탁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깥세상을 조금 둘러보고 싶구나. 조금 갑갑해서 말이다.’
나는 기꺼이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게헨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약간 특이한 조건을 덧붙였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인간을 안내역으로 붙여달라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용자라고 해봤자 통과의례를 기준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안현, 안솔, 김한별, 이유정. 그중에서 게헨나를 소환한 공을 인정받아 낙점된 안솔은, 대단히 기대하는 얼굴로 게헨나를 따라 나섰다.(최근 게헨나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무언가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긴 듯싶다.)
그렇게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안솔과 함께 밖으로 나간 게헨나는, 밤이 무척이나 늦어서야 돌아왔다.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곯아떨어진 수나를 안고 있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궁금해 물어봤으나 게헨나는 피곤하다며 말을 얼버무리고는 침대로 직행했다. 나는 이제 찬밥 신세냐고 구시렁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불을 끄고 게헨나의 옆에 누웠다.
“…….”
그리하여 시시각각 밤이 깊어갔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아니. 잠을 자고 싶지가 않았다.
게헨나는 등을 보인 채 옆으로 돌아누워 있고, 수나는 왜인지 한껏 만족한 얼굴로 새근거린다. 나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참으려 애쓰며 둘을 또렷이 바라봤다. 이대로 잠들기에는, 아침에 회의장에서 나눈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록 정확하게 말은 안 했더라도 게헨나는 분명히 암시했다.
떠나겠다고.
이제는, 이별이라고.
두렵다. 이대로 잠들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느 날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봐. 그 어느 날이 당장 오늘일지도 모른다.
“그대여.”
그때였다.
잠든 줄 알았던 게헨나가 돌연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 지옥에서. 그때가 아마 돌아가기 전날이었나? 까닭 없이 불안감이 치솟는다.
그때는 자는 척하느라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많지. 아주 많아.”
이번에는 확실하게 말했다.
그러자 게헨나가 두어 번 몸을 뒤척이더니 조심스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한다.
“그럼 하면 되지 않느냐.”
“앞으로 천천히 하려고. 하나씩, 천천히….”
“…그런가.”
“그렇지.”
게헨나는 과연 내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싱겁게 웃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해서라도 하루 더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때 갑자기 게헨나의 두 눈에 붉은빛이 스쳤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분명 붉고 진한 안광이 번쩍였다.
그 순간이었다.
“…나. …길.”
게헨나가 무어라 말하는 듯 입을 움직이지만, 들리지 않는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도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위를 쳐다볼 수가 없다.
왜일까…. 느닷없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뇌리는 물론, 세상이 핑그르르 돈다.
시야로 서서히 어둠이 드리운다.
잠깐 누군가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쏟아져 눈앞을 가렸다.
그 이후로는, 완연한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온몸에 퍼지는 나른함.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피곤하다.
나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아니, 이미 감은 걸지도 모르겠다.
“…….”
…이런. 안 되지. 오늘은 잠을 자지 않기로 했잖아? 아직 수나 발을 간질이지도, 뽀뽀도 못 해봤는데.
나는 피식 웃고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게헨나. 너….”
갑자기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웃으며 따지려는 찰나,
“!”
한순간,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순간적으로 코를 찔러오는 차디찬 공기는, 늦은 밤이 아닌 새벽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 나야?”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의 옆이 휑하니 비어 있다.
그리고.
“…게헨나?”
게헨나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네. 이로써 게헨나 파트를 일단락 지었습니다.
다음 회는 초반에서 중 후반에 걸쳐 회상 + 헤어지는 장면을 삽입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새로운 에피소드인 ‘새로운 시작’ 파트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