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06
00805 새로운 시작. =========================================================================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깊었다. 한때 새로운 개척지로 조명받았던 도시는, 신 대륙 ‘아틀란타’가 공략된 이후 사용자의 발길이 거의 끊어졌다. 유령 도시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정체된 도시였다. 두 여인은 이런 소슬한 정적이 감도는 거리를 거닐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으응. 오랜만에 오니 당최 길이…. 여기서 꺾었던가?”
“설마 길을 잃은 것이냐?”
“아, 아니에요! 이 도시가 원래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아, 찾았다!”
“흐응?”
안솔은 흰 로브가 펄럭일 정도로 달려가 굳게 닫힌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그러나 구름처럼 폭 터져 나오는 먼지에 얼굴을 얻어맞고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로브를 푹 눌러쓴 여인은 웩웩 토악질하는 안솔을 지나쳐 조용히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빈말로도 깔끔하다고 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듯 먼지는 켜켜이 쌓여 있고, 간간이 보이는 탁자나 의자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읔. 퀴퀴한 냄새…. 콜록콜록!”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안솔이 따라 들어오며 기침했다. 낯빛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으나, 주변을 돌아보는 눈동자는 곧 아련함으로 젖었다.
“이곳이….”
“네, 네에. 우리가 사용자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본격적으로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장소죠. 여관이에요.”
“여관?”
“잠자고 먹고 하는 곳이요. 이름은 조신한 숙녀…. 였나?”
여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심히 곳곳을 살펴보고는,
“그이가 자주 있던 장소는?”
“에, 3층 오른쪽 끝 방이요. 거기가 오라버니가 사용하시던 특실인데요, 찻잔 훔치러 자주 들어가 봐서…. 으에에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을 올랐다. 한동안 입을 틀어막고 좌절하던 안솔은 어느새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긴 한숨을 흘렸다.
“어휴. 이게 뭐야….”
오늘 아침, 김수현의 부탁으로 게헨나의 안내를 맡게 된 안솔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게헨나가 좋아서는 당연히 아니었고, 혹시 뭐 하나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고대한 것이다. 그러나 떡고물은커녕, 반나절 동안 팔자에도 없는 가이드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그이가 지금껏 거쳐왔던 곳을 구경하고 싶구나.’
게헨나의 부탁은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았다. 거쳐왔던 곳이란, 김수현이 여태껏 주로 활동한 장소를 가보고 싶다는 소리였다.
처음 말을 듣고 한참을 벙쪄 있었지만, 안솔은 결국 억지 춘향이 되고 말았다. 워프 게이트로 북 대륙으로 넘어간 후, 모니카의 클랜 하우스, 러브 하우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바바라의 사용자 아카데미, 시작의 여관 등 별별 곳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고도 아직 남아 있어, 종래에는 뮬의 조신한 숙녀까지 이르렀다.
“후유….”
끊이지 않는 한숨과 함께 안솔은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여기까지 온 이상 떡고물은 바라지도 않고, 이제 그만 돌아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응?”
이윽고 안솔이 3층 끝 특실로 들어갔을 때, 여인은 더러운 탁자에 얌전히 앉아 방 안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느지막이 들어온 안솔을 봤는지 가볍게 손짓한다.
“이제 왔느냐. 어서 앉거라.”
콰륵, 홀연히 샘솟은 불길이 어두운 방을 환히 밝혔다. 안솔이 쭈뼛쭈뼛 다가오자 여인은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벗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는다. 깨끗한 기록 한 장과 깃 펜이었다.
“이제 슬슬 시간도 됐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하자꾸나.”
‘마지막’이라는 말에 안솔은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혹여 칠흑의 숲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헨나는 의외의 부탁을 꺼냈다.
“나 대신 글 좀 적어다오.”
검지 끝으로 탁자에 놓은 기록을 톡톡 두드린다.
“그, 글이요?”
“그래. 음…. 편지라고 하면 되려나?”
“편지를 왜 제가….”
“나는 너희 글자를 모르니까. 이왕 적는 거, 알아보기 쉬운 게 좋지 않느냐.”
안솔은 대번에 납득했다. 마지막 부탁이라는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안솔은 깃 펜을 잡고 기록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어떻게 적어드릴까요?”
“흠. 너희는 편지 첫머리에 보통 뭐라고 글을 적지?”
“…아이 헤이트 유(I Hate You), 라고 적고는 해요.”
“음?”
“노, 농담이고요. 그냥 누구누구에게…. 이 정도?”
“그래. 그럼 김수현에게. 이게 낫겠구나.”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 안솔은 열심히 깃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대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아마…. 그대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나는, 아마 돌아가고 난 이후겠지.”
“나는…. 네?”
우뚝, 깃 펜이 정지했다. 안솔이 깜짝 놀라 고개 들자 게헨나가 잔잔히 미소 짓는다.
“뭘 그리 보느냐.”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오히려 너희는 좋아할 거라 생각된다만.”
“…….”
“되었다. 어서 적기나 하거라. 아, 방금 한 말들은 적지 말고.”
“그, 그 정도는 알아요.”
잠시 후, 방 안에는 게헨나의 말소리와 사각거리는 깃 펜 소리만이 남았다.
그렇게 약 30분 가량 흘렀을 즈음, 비로소 3층 창문에서 새어 나오던 불빛이 꺼졌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헐거운 문이 열리고 두 여인이 걸어 나왔다.
게헨나는 볼 일을 다 봤다는 양 어두운 거리를 휘적휘적 가로질렀고, 안솔은 조금은 주춤한 채로 서서히 멀어지는 여인을 응시했다. 하지만 곧 뛰는 걸음으로 쫓아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
“…….”
“저기….”
“…….”
“저, 저기요!”
“왜 그러느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키우니 비로소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던 안솔이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허락하마.”
“오라버니는….”
“음?”
“게헨나 님을 사랑하셨어요?”
“…….”
그 순간 거침없던 게헨나의 걸음이 멈칫 정지했다. 아마 김수현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면, 쑥스러워할지언정 이리 주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솔의 질문은 그 반대였다.
“그건….”
게헨나는 풍성히 웨이브 진 용암 빛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후드를 강하게 눌러쓰며 말을 잇는다.
“허나, 혹시….”
문득 흐린 말은, 반전을 예고했다.
“혹시라도…. 정말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게헨나는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눈으로,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쳐다보며,
“그때는, 꼭 물어봐야겠다.”
…흘리듯이 말했다.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럼 지금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후후. 물론 그렇기는 하다만….”
조용히 들려오는 음성에 게헨나는 살그머니, 그러나 서글피 미소 지었다.
“…그랬다가는 간신히 먹은 마음이 흔들릴 것 같구나.”
*
어디를 찾아도 게헨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게헨나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나 쫓아가야 했다. 게헨나가 갈만한 장소를 떠올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제갈 해솔의 숙소를 박차고 들어갔다.
“어마! 깜짝이야!”
새벽에도 깨어 있었는지 제갈 해솔이 펄쩍 뛰었다. 공교롭게도 바지를 갈아입는 중이었다. 황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갈 해솔의 인상이 서서히 구겨진다.
“하. 그래. 내가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어. 결국 못 참고 저를 취하러 오셨네요.”
“사용자 제갈 해솔.”
“닥쳐요. 처녀 사냥꾼.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저항할 거예요. 그리고 설령 당신에게 몸이 정복되더라도 이건 제가 이긴 거예요.”
“제갈 해솔.”
제갈 해솔은 들은 채 만 체하고는, 대담하게도 바지를 훌렁 놓아버렸다.
나는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래, 봐요. 보고 싶으면 보라고…? 엄마아아! 살려주세요오오오! 김수현이 나 강간한흡!”
제갈 해솔의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설마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두려움에 물든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실수를 인지하고 손을 내리자 파르르 떠는 입술이 보였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까불지 않을 테니까, 제발 용서를…. 이, 이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스테이지 아닐까요?”
이런 와중에도 농담을 하는 건가.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농담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수송 능력.”
“…네?”
“북문 방향 반나절 거리. 아틀란타를 가리키는 이정표. 좌표 알죠?”
“아, 알기는 알죠.”
“그곳으로 수송 능력을 사용해주세요. 부탁합니다.”
“…….”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제갈 해솔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나 표정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곧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는 입고 해도 되죠?”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둥글고 푸른 빛무리가 어른어른 모여들기 시작했다. 속으로 미칠 듯한 긴장감이 엄청난 속도로 쌓였다. 바라고 또 바란다. 제발, 제발 게헨나가 남아 있기를…!
퉁!
배꼽이 훅 쏠리는 느낌과 함께 익숙한 소음이 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한순간 시야가 변했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스친다. 우리는 어느새 붉은 황무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이 제대로 발동된 것이다.
긴장과 초조함에 가슴이 타는 것만 같다. 나는 곧장 눈을 돌려 어탑(御榻)을 찾았다. 왼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검은 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한순간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혹시 게헨나가 나를 놀리려고 이러는 건 아닐까. 내가 찾지 못한 건 아닐까. 장소를 잘못 짚은 건 아닐까. 아직 도착하지 못한 건 아닐까. …아니면, 벌써 가버린 건….
그러한 찰나, 번뜩 한 생각이 떠올랐다. 최소한 마지막 경우만 아니라면 아직 만날 여지는 있을 터. 말인즉 게헨나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된다.
방법은, 있다.
제 3의 눈. 제 3의 눈으로 과거를 본다.
아주 예전에 딱 한 번 사용한 전례가 있다. 통과의례에서 애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능력을 사용했는데, 단 1초를 본 것만으로 눈이 파열될 뻔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덩그러니 서 있는 어탑을 보며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돌연히 눈앞 시야로 하나의 장면이 비치듯 스며들어온다.
– 웅웅웅웅웅웅웅웅!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방금 본 것처럼 흑 빛이 아닌, 하늘을 밝힐 정도로 발광(發光)하는 어탑이었다. 이어서 어탑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 미안하구나…. 미안해….
처연한 눈으로 품에 안은 누군가를 달래는 게헨나.
– 으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있는 힘을 다해 울어 젖히는 수나.
– 제, 제발….
– 이익! 이이이익! 아바아아!
– 수나야, 수나야. 이제 그만….
– 어엉! 어어어엉! 아부, 아바아아…!
수나가 안간힘을 쓰며 게헨나의 품에서 벗어나려 한다. 누군가를 찾듯이 손을 이리저리 휘젓기까지 한다. 게헨나는 너무나 곤란한 얼굴로, 그러나 수나를 꼭 붙든 채 어탑의 앞에 선다.
이윽고 휘황찬란한 빛이 게헨나와 수나를 감싸기 직전의 순간.
– …….
“!”
게헨나는, 아주 잠깐 뒤를 돌아봤다.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빛에 가려 아스라이 보이는 애틋한 눈동자는 분명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게헨…!”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시야가 고장 난 TV 화면처럼 어그러지더니 찌를 듯한 통증이 갑자기 눈을 강타했다. 일순간 잡신호가 스치고 불에 덴 듯 화끈한 기운이 오른다. 벌써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다. 이어서 찾아오는 정체 모를 탈력감에 나는 눈을 부여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클랜 로드!”
제갈 해솔이 나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가장 생각하기 싫었던, 최악의 과거를 봐버렸다.
아무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 하하….”
그냥 허탈한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크, 클랜 로드. 성이에요. 성으로 왔다고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도시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제갈 해솔의 손에 끌려 어찌어찌 걷기는 했는데, 다른데 신경 쏟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회의장에서 말했을 때 게헨나가 돌아갈 건 알고 있었다. 명확하게 말만 안 했을 뿐, 그런 뉘앙스로 말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어쨌든 보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은가.
적어도 말은 하고 갈 줄 알았다. 가기 전에 돌아가겠다고, 최소한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강제로 암시까지 걸고 돌아갈 줄, 그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게헨나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울면서 나를 찾는 수나를 떠올리니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지막 뒤를 돌아보던 게헨나의 눈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아른거린다. 이건 전혀 내가 생각하던 이별이 아니었다.
4층 집무실로 돌아오자 비로소 현실이 체감됐다. 잠들기 전까지 서로 속삭이며 장난을 치던, 어젯밤만 해도 게헨나가 누워 있던 침대는, 지금 휑뎅그렁이 비어 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눈을 뜨면 이 모든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편안히 자고 있거나, 수나를 안은 채 감미로운 웃음으로 나를 배웅하는 게헨나가 있을 텐데.
머리가 어지럽다. 이마에 띵한 현기증이 돈다. 흘끗 쳐다본 테라스 너머로, 나는 비틀비틀 걸어가 책상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미쳐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금빛이 흐르는 목걸이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별의 선물로 주려고 했던 목걸이. 좋은 거는 아니나 그래도 몰래 주문 제작까지 하면서 숨겨둔 건데….
“그건, 게헨나한테 주려던 거야?”
느닷없이 몸이 얼어붙었다. 나도 모르게 옆을 돌아봤다. 형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을 쓰지 못한 나머지 미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나보다 먼저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거나. 어느 쪽이든, 알아차리지 못했다.
“형?”
목소리는 스스로 들어도 살짝 쉬어 있었다.
“보아하니 만나지는 못하고 온 것 같네.”
형은 한숨 쉬듯이 말하고는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휴가는 즐거웠냐.”
“휴가?”
“못된 녀석. 내 생각은 나지도 않았지?”
“혀, 형?”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형을 까맣게 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형의 말투는 무언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형이 어떻게…?”
“네가 원정에서 귀환하고…. 기절해 있는 동안 잠깐 만났지. 그림자 여왕이 도와달라고 했거든.”
“뭐라고?”
“혹시 게헨나와 지내면서 이상한 거 느끼지 못했어? 예를 들면 분위기라던가.”
그렇게 말한 형은 잔잔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형의 설명이 끝나자 암담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럼 친해진 게 아니라, 친한 척을 했던 거라고?”
“그래. 내가 부탁했거든. 돌아갈 때까지 너를 쉬게 해달라고.”
“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만, 다들 너를 배려해준 거지. …뭐, 뒷감당은 각오해야겠지만.”
심란한 마음에 연초를 꺼내 물자 언제나처럼 쓱 빠져나갔다. 장난칠 기분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 형이 내게서 뺏은 걸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형이 연초를 태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후우…. 뭐, 그래도 형은 이해한다.”
“이해…?”
형은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햇수로 따지면…. 십오 년째인가.”
“십오 년?”
“그동안 쭉 달려오기만 했잖아. 일이 년도 아니고, 무려 십오 년을 꼬박 달려왔는데. 며칠 쉴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그건….”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너를 비난 못할 거다.”
“…….”
위로하는 듯한 음성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다.
“하나만 물어보자.”
갑작스럽게 질문하는 형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일부러 눈을 들지 않았다.
“네 계획은…. 아직 유효한 건가?”
“계획? …아.”
반사적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망연하기만 하던 머릿속에 차가운 이성 한 줄기가 고개를 든다.
계획이라 함은 귀환을 말하는 것일 터. 당연히 유효하다. 유효라는 말이 웃기기는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하게 살아 있다.
나는 작게 주억였다.
“그렇군. 그러면 말이다.”
문득.
“수현아. 이제 그만….”
형이 뭘 말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꿈에서 깨는 게 좋을 것 같다.”
낮은 속삭임이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오고, 살짝 벌어진 입 틈으로 절반쯤 사라진 연초가 꽂혔다. 나는 비로소 눈을 들 수 있었다.
형의 얼굴은,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야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풍랑(風浪)을 만난 배가 발견한 등대처럼, 환한 햇살로 물들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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