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08
00807 새로운 시작. =========================================================================
“이제 모두 모인 건가.”
자욱한 연기 너머로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어둠이 잔뜩 끼어 흐릿한 공간에는 겨우 윤곽만 드러나는 의자 7개가 놓여 있다. 거기에는 큰 인형을 껴안은 채 걸터앉거나 다리를 꼬고 기대앉는 등, 의자 수에 맞춘 형상(形象)이 각양각색의 태도로 앉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둥근 원형을 그리는 의자의 곁으로 어두운 그림자들이 마치 도열한 병사처럼 시립해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림자들이 각 의자에 배치된 수가 고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의자에는 너덧 개의 그림자가 보이는 반면, 한둘 혹은 아예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의자도 있었다.
“이야, 정말 휑하잖아.”
처음 목소리가 들린 의자를 기준으로, 왼쪽 두 번째. 침묵을 환기하려는 듯 과장된 음성이 터졌다. 흑염(黑炎)을 이글거리는 두 눈이 주변을 물끄러미 돌아본다. 정확히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의자를 위주로.
“마몬, 플루톤, 프로세르피나…. 에. 또 누가 있더라? 아무튼, 이래서야 악마 14 군주라는 이름이 무색하겠어.”
“너. 메피스토펠레스.”
기준점에서 오른쪽, 인형을 꼭 껴안고 있는 형상이 맞받아쳤다. 딱딱 끊어 말하면서도 흡사 소녀를 연상케 하는 앳된 음성이다. 흑염의 악마는 순간 경직하더니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뭐, 그러네. 나도 지옥에서 메피스토펠레스를 잃었으니까. 비난하려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말할 처지가 아니기는 해.”
순순히 인정하는가 싶더니 돌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좀 봐달라고. 적어도 지옥에서 목이 꺾여 뒈지지는 않았잖아? 내 소~중한 목숨은 아직 두 개라고?”
일부러 과장해서 말하는 게 상대를 비꼬는 의도가 명백하다. 비웃는 걸 느꼈는지 어둠 속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 떠졌다. 시린 냉기를 풀풀 흘리며 흑염의 악마를 노려본다.
꽈앙!
찰나의 순간, 거센 굉음이 어둠을 흔들었다. 어떤 전조도 없는 충돌. 무형의 기운이 부딪치는 여파에 그림자들이 심히 동요한다. 흑염의 악마가 몸을 일으키고 인형 소녀는 의자서 사뿐 뛰어내렸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서로를 노려보는 것이 보이는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
거슬리는 쇳소리가 둘을 저지했다. 그러고도 두 악마는 멈추지 않았으나 창백하고 길쭉한 손이 올라오자 주춤 행동을 멈췄다. 뱀의 눈과 같이 쭉 찢어진 시뻘건 눈동자가 좌우를 아우르는 동시, 거미 다리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이 느긋하게 구부려진다. 그게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윽고 손이 완전히 움켜쥐기 직전, 당장에라도 한 판 붙을 것 같던 두 악마가 곧장 대립을 멈추고 황급히 의자로 돌아갔다.
잠시 후, 들썩거리던 공기가 가라앉고 원래의 정적이 돌아올 즈음.
“내가 오늘 회동을 개최한 이유는.”
처음의 목소리는,
“오늘, 중요한 선택이 있기 때문이지.”
마침내 회동의 시작을 알렸다.
“그래. 아주 중요한….”
의자에 앉은 이들의 시선이 쏠리자 기준점에 앉은 악마는 보일 듯 말 듯한 입을 한껏 비틀었다.
“알고 있다. 어차피 다들 이 자리가 불편하겠지.”
방금 거슬렸던 철성(鐵聲)과는 다르게 살살 달래는 듯한 음성이 이어졌다.
“회동에 앞서 정보는 이미 보냈다. 너희가 읽고 생각해왔다면 나도 길게 끌 생각은 없어. 그럼….”
“사탄?”
그때 부드러우면서 또렷한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루시퍼…. 네 의견은 그때 들었지. 여전히 속행의 반대인가.”
“그렇지요. 대계(大界)의 말대로예요. 우리는 예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흠.”
계속 말해보라는 듯 사탄이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아니. 구구절절 말할 필요 있나요? 자랑은 아니지만, 두 악마 14 군주를 잃는 대가로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화정과 겁화가 인간 쪽에 붙었어요. 이건 사탄도 확인한 사실이잖아요?”
“그랬지.”
사탄이 담담히 수긍했다. 즉 루시퍼는 이만 물러나자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포기하자고 말한 것치고는 간단하게 말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어느 악마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왜냐면 루시퍼의 말에 그만한 타당함과 무게를 느꼈으니까.
“그리고,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문득 루시퍼가 말을 덧붙였다. 이상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입가에는 재밌어 죽겠다는 미소가 걸렸다.
“이상하다고?”
“네. 한 번 생각해보시죠. 그동안 우리 계획이 저지된 게 몇 번이나 있었죠?”
사탄의 반문에 루시퍼가 크게 끄덕이며 되묻는다.
“서 대륙, 마몬, 마그나카르타, 지옥 대공, 꽃의 마녀, 고대 악신…. 깡그리 망했습니다. 이 중에서 몇 개는 시작하기도 전에 분쇄된 것도 있지요. …이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사탄의 물음에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던 루시퍼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빙긋 미소 지었다.
“꼭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읽고…. 아니. 미래를 읽고 행동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졌다. 언뜻 들으면 허황한 말이기는 하나, 당한 입장에서는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단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는가. 게다가 극비로 진행한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기면서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법도 했다.
“운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사탄에 루시퍼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긍정했다.
“그런데요. 사탄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이 운이라면…. 더 무섭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말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한껏 가라앉았다.
“화정에 겁화에…. 거기다 운까지 돕고 있어요. 사실이라면, 저는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접고, 남은 전력을 보존해 후일을 도모하는 게 좋을 겁니다.”
머리를 절레절레 저은 루시퍼는 할 말을 다했다는 양 깊숙이 몸을 묻었다. 사탄은 지당하다는 듯 주억였다. 루시퍼의 의견은 확고한 명분이 있다. 사실상 ‘속행 반대’ 쪽에서 나올 수 있는 의견은 거의 나온 셈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의견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탄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시퍼의 말은 충분히 들었다. 그럼 너희는 어떻지?”
“…….”
사탄이 발언권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지그시 눈을 감거나 서로를 흘깃거리는 무의미한 행동만 반복할 뿐. 대 악마답다고 볼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기실 이유 있는 침묵이었다. 첫째는 모두 암묵적으로나마 루시퍼의 말에 동의했으며 둘째는 전원 현 상황의 불리함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불리한 정도가 아니다. 아틀란타가 공략된 이상, 강철 산맥은 더 이상 방패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 북 대륙이 테라로 진군하기까지 남은 문제는 이제 ‘시간’밖에 없다. 말인즉 악마들의 앞날은 풍전등화(風前燈火)나 다름없는 것이다.
“오, 이런. 이래서야 회동을 연 의미가 없지 않나.”
사탄은 조용히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걸까. 한참을 기다려도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자 사탄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혹시 이런 말을 알고 있나? 다수결이라고.”
‘다수결’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대 악마는 물론이고, 악마 14 군주들까지 의아한 빛을 비췄다. 뜻을 몰라서가 아니다. 마계는 본래 철저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된다. 강자가 지존인 세상에서 민주적인 방법은 생소할 수밖에 없다.
“너무 이상하게는 생각하지 말라고. 너희가 말을 안 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의견을 확인하고 싶거든.”
그러나 크게 7개의 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는 만큼, 아주 통용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쉽게 생각해. 이제부터 내가 숫자를 센다. 셋을 세는 순간 속행을 원하는 쪽은 손을 들고, 예언을 받아들이자는 쪽은 가만히 있는다. 단, 기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사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차분히 주변을 둘러봄에도 딱히 반대하는 의견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서로 눈치를 보고 있으나 호기심을 띤 눈도 몇 쌍 보였다.
뜻 모를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사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하나.”
조금 갑작스럽게 카운트가 시작됐다.
“둘.”
누군가 힘껏 숨을 들이켰다.
“…셋.”
이렇게 카운트가 끝나고, 루시퍼는 손을 들지 않았다. 흘끗 옆을 쳐다보니 똑같이 손을 들지 않은 사탄이 보였다.
그리고.
“하.”
주변을 쭉 훑은 순간.
“하, 하하….”
루시퍼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건, 의외네요.”
사탄과 루시퍼를 제외한, 다섯의 대 악마가 손을 들고 있다.
바알, 아스타로트, 벨제부브, 아스모데우스, 리리스.
무려 다섯이나 되는 대 악마들이 ‘속행’을 선택했다.
*
나는 정신없이 기록을 읽었다. 기록에는 굉장히 많은 내용이 간단하면서도 빽빽이 적혀 있었다. 지옥에 침입한 아스타로트를 박살 내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소멸시킨 것, 악마들이 연합해 지옥을 2차 침공한 일 등등. 그리고….
『…그때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을지언정, 결코 방심은 하지 않았다. 허나 놈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방법으로, 기어코 나를 강제로 차원 이동시켰다. 그것도 내 본진에서 말이다.』
게헨나가 말하는 건 아마 아틀란타를 목전에 뒀을 때를 말하는 듯싶다. 그래. 그때는 나도 깜짝 놀랐다. 차희영을 선점함으로써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게헨나를 강제로 이동시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틀었다 생각한 미래를 원래대로 맞추는 악마의 능력은 결코 얕볼 수준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그놈들은 너희를, 인간들을 계속 노리는 것 같더구나.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건, 미래는 결코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고대 악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조차도 놈들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의도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즉 그만한 역량은 있는 놈들이라는 것인데, 차후 언제 어디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하지만, 미래는 절대로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분명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일을 벌일 것이다.
단, 대비는 할 수 있겠지.
부디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읽어 내려가는 와중 자꾸 침이 고여 삼켜야만 했다. 새삼 경각심이 새로이 일깨워지는 기분이다. 아까 느꼈던 싸한 느낌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실은 사과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응?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게헨나가?
『그때 너를 찾아온 여인 말이다.』
한소영을 말하는 건가?
『그때 그대가 돌아오고 나서 한참을 풀이 죽어 있더구나. 그게 참 가슴에 걸리더구나.
아마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겠지?
…사실을 고하자면, 내가 그 여인에게 암시를 걸었다.
무언가 위험한 느낌을 받아, 그대에게 해가 될지 아닐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확실히 그때, 한소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내가 아는 한소영은 설령 분노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게헨나가 암시를 걸었다면 이해가 간다. 나도 제 3의 눈과 화정의 도움으로 간신히 벗어났는데, 한소영이라고 당해낼 재간이 있겠는가.
『후후. 결국 제대로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말은 해주고 싶다.
그 여인은…. 글쎄. 도저히 인간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기이한 기운을 뿌리더구나. 스스로 조금은 자각하고 있는지 조심하는 것 같더군. 아마 발가벗겨놓고 태초의 모습을 보게 되면, 진정한 참모습이 드러날지도 모르지.
이것도 조심하거라. 그 여인을 품을지 안 품을지는 오롯이 네 선택에 달렸으나, 혹여 품는다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요녀를 곁에 둔 사내의 말로는 거의 좋지 않았거든. 허나 그 여인은 요녀 따위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존재 같으니 말이다.
까닥 잘못하면 한평생 예속(隸屬)될지도 모른다.
아, 성(性)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예, 예속이라.”
하하 웃었다가 힘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차피 한소영이랑은 더 이상 그렇고 그런(?)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때 확실히 선을 그었으니까.
『쓰면서 자꾸 궁금한 게 생기는구나.
미련 때문인가….
그대는 과연 이 기록을 읽으며 무슨 기분일까.
아마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래. 이건 나도 궁금하다. 원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왜.
『그대와 웃으며 이별을 나눌 자신이 없었거든.』
반문한 순간, 불현듯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못된 여인이다. 그대의 옆에 있을수록 계속 나쁜 생각이 들더구나.
같이 있어달라고 호소하는 눈을 볼 때마다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여기 머무르지 못하는 건 기정 사실이지 않느냐.
그럼 그대가 지옥으로 건너오면 되는 일이었다.』
이건…. 부인할 수 없군.
『사실은 몇 번이고 마음먹었다.
그냥 적당히 눈 감고 그대 몰래 제물을 충원할까. 아니면 억지로 힘을 써서라도 그대를 지옥으로 데려갈까.』
으, 으음. 무서운 말이다.
『허나 그래서는 안 되겠지.
종래에는 어느 한쪽이 희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또한 내가 지옥에서 이뤄야 할 숙원이 있는 만큼, 그대도 이 세상에 이룰 숙원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욕심만 내세우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중요한 건, 그러고도 욕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
결국에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집중해서 읽다 보니 어느새 기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아래로 눈을 내렸다.
『수현, 수현, 수현, 수현.
나라고 그대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겠느냐. 나라고 한 사내의 여인이 되어 사랑받고 싶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진정으로 그대를 위하는 길은, 욕심을 좇는 게 아닌 하루라도 빨리 내가 떠나는 것이었다.
그대는 과연 이 말을 알아들을까?』
알아듣는다. 원래라면 몰랐겠지만, 형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게헨나는 나 하나만이 아닌, 여태껏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비겁하다고 여겨도 좋다.
지금 당장을 나를 원망하고 미워해도 좋다.
도망친 건 나이니, 달게 감내할 생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무수한 시간이 흐르고 언젠가 나를 기억할 즈음에.
부디, 이런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구나.
수현.
그대는, 알아주겠지?
언젠가는 나를.
김수현이라는 인간을 사랑한 내 마음을 이해해주겠지…?』
기록에 적힌 고뇌를 느껴서일까. 게헨나의 절절한 고백에 참았던 숨이 새듯이 흘러나온다. 비로소 아래 여백이 보이는 순간, 나는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슴은 슬픈데 얼굴은 웃고 있다. 하하, 하하.
무언가 참지 못하겠다는 기분에 나는 그대로 테라스로 나갔다. 시원스레 뻗은 밤하늘을 보니 절로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신기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지쳐 있었는데 씻은 듯이 개운해졌다.
품에서 연초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이어서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이며 기록을 들어 올렸다. 자작이 타들어 가는 부분을 기록 모서리에 갖다 대니, 검은 그을음이 서서히 번져가며 불이 붙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록 귀퉁이가 활활 타오르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미련 없이 기록을 허공으로 던졌다.
– 아직 읽지 못한 부분 있지 않아…?
화정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귀를 울린다.
물론 앞면은 보지 않았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괜찮다.
악마에 관한 경고, 나에 대한 걱정, 한소영에 관련된 고백, 게헨나 자신의 속내…. 여과 없이 드러낸 게헨나의 진심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느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계속 읽고 오묘한 기분을 받느니, 여기서 끊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왠지 게헨나가 말없이 돌아갈 때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절반 이상 타들어 간 기록은 바람에 나부끼듯 느릿하게 굽이져 너울너울 떨어진다. 간간히 튀기는 불똥은 춤추듯 흔들리며 사라져 간다.
기록이 불에 타 없어질수록 가슴속에 응어리진 마음도 녹아내린다. 차디찬 밤공기를 들이켜니 가슴이 시원하면서 후련하다. 머릿속이 이대로 열어버리고 싶을 만큼 상쾌하다. 이대로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작은 불씨가 수놓는 새벽의 밤하늘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밤 풍경이 근래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나는 비로소 선웃음이 아닌, 꾸밈없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마….
이제야, 그날 밤의 꿈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한소영 >>>>>>>>>>>>>>>>>>>>>>>>> 다른 여인들.
과연 어떤 기준일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