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10
00809 단, 대비는 가능할 것이다. =========================================================================
“으흐으응….”
흡사 꿈결에 새는 것처럼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또렷한 교음(嬌音)이다.
“아앙…. 기분 좋아….”
한 번 더 들려오는 여인의 간드러진 신음성. 나는 속으로 참을 인(忍)을 되뇌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잡념을 떨치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외려 역효과였다.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보들보들한 감촉이 확연히 선명해지는데, 이제는 숫제 ‘얼른 주물러보라니까? 야들야들할 거야~.’ 라는 환청이 들릴 정도.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뜨니 바로 앞 엎드려 누워 있는 사라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천으로 엉덩이만 살짝 덮은, 거의 알몸에 가까운 사라의 전신은 맑은 불꽃에 감싸여 있다. 허나 그것보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금발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희고 고운 목선이나, 한창 무르익은 젖가슴이 바닥에 짓뭉개진 풍경이,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이뿐인가. 내가 손을 대고 있는 흰 사슴 같은 허리 아래, 급격히 부풀어 오르는 둔부의 선을 보고 있자니 내 분신도 덩달아 부푼다. 덜덜 떨리는 손이 마치 왜 N극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거냐며 절규하는 S극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하아아아….”
불현듯 사라가 살며시 몸을 비틀었다. 오르가슴 후 여운을 즐기는 듯한 야릇한 소리가 애간장을 살살 녹인다. 이미 아랫도리는 불끈 치솟는 것도 모자라 성난 짐승처럼 발작하는 중이다. 천을 뚫고 나올 듯 불룩해진 바지를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100% 오해할 상황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등 억울하기 그지없다. 기실 내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그런 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사라를 구워먹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게헨나가 돌아간 후, 수련을 도와달라는 사라의 개인적인 요청이 있었다. 불(火)과 친화력을 높이려는 일환으로 신화계(神火計) 권능이 있는 화정의 조력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이러면 불에 타지 않으면서 불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데, 게헨나가 고안한 수련 방법이라고 한다.
사라가 벗은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친화력을 높이려면 자연적인 상태와 가장 편한 자세로 있는 게 도움이 된다나. 게헨나처럼 불만 붙여주면 되기는 하나, 다행히도…. 아니. 아쉽게도 내가 그 정도 수준은 되지 않아서. 이렇게 손을 붙인 상태서 끊임없이 힘을 보내야 한다.
여하튼 여러 조건이 미묘히 맞물려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혀 나쁜 상황은 아니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다. 정령 군단의 위력은 이미 1회 차에서 직접 체감하지 않았는가. 비비앙의 마수 군단과 비슷하거나 상회하는 전력이 가세한다는데, 면벽수련을 하는 고승의 기분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래, 얼마든지….
흠. 그나저나 마르에게 선물한 빛과 어둠의 결정은 어떻게 됐으려나? 정하연은 알아서 잘 하는 것 같은데.
“후우우우…. 굿.”
그때 느닷없이 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엎드려 있던 사라가 천천히 일어서자 붉은 천이 사르르 흘러내린다. 수련이 끝났다는 신호다.
“아주 좋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클랜 로드.”
영차 몸을 일으킨 사라는 솜씨 좋게 천을 몸에 두르며 미소 지었다. 소싯적 노출 좀 해봤는지 나를 마주 보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
“우리 말이 꽤 늘었네요?”
“예스. 애초 현대에서 많이 공부했고, 여기서도 계속 배웠습니다.”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요.”
“후후. 저 칭찬 좋아합니다. 더 해주시면 너무 좋습니다.”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사라가 아차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클랜 로드. 오늘 그날 아닙니까?”
그날이라. 다의어이기는 하나 아마 그걸 말하는 것 같다. 수련은 사라만 도와주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요.”
“그럼 제가 너무 오래 붙잡은 거 아닙니까?”
“전혀 아닙니다. 시간 배분은 확실하게 해놨으니까요.”
“다행입니다. 저만 욕심부린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라는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리며 “파이팅.” 이라고 말했다. 왠지 귀엽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려는 찰나,
“……?”
문득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젖어있는 것이 눈에 밟혔다.
…왜 카펫 털이 동글게 얼룩져 있는 거지?
*
까앙!
따가운 쇳소리가 울렸다. 매서운 기운이 몰아치는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귀를 찌르는 소음에 누군가는 낯을 찌푸렸다가, 무언가 부딪치는 둔탁한 폭음에 크게 놀란다. 그러나 조금의 시간차도 두지 않고, 웬 시커먼 형상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 꽂혔다.
콰앙!
“크허어억!”
고통에 찬 신음이 터졌다. 형상은 한 번 부딪치는 것도 모자라 두어 번 더 튕기며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종래에는 나동그라진 형상을 향해 하얀 로브를 입은 사용자들이 빠르게 달려간다. 그러나 사제를 제외한 이들은 전원 눈앞의 광경에 집중을 잃지 않았다.
잠시 후, 자욱한 연기가 걷히는 가운데 한 사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색 일체형 갑옷을 입고 견갑(肩甲)에 붉은빛 망토를 두른 사내는, 정원의 중심에 오연히 서 있다. 약간의 미동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그리고 사내의 주변에서 거리를 재고 있는 여인 하나. 주춤주춤 걸음을 물리는 게 약간은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다.
하지만 물러나는 것도 잠시. 좌우를 빠르게 둘러본 여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자세를 크게 낮춘다. 이내 시뻘건 눈동자와 머리카락에 금빛이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상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질박한 용기가 샘솟는다. 양손에 든 카타나를 고쳐 잡는 모습이 흡사 먹이를 노리는 짐승과도 같다.
이유정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 즉 김수현에게는 어떤 기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남다은을 상대로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김수현에게는 더더욱 통할 리가 없다. 힘도, 속도도, 마력도, 기술도 어느 것 하나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비빌 구석은 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라 두 명의 궁수가 더 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나 분명 저격을 준비하고 있을 터. 그럼 궁수들이 더욱 정확하게 노릴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만들어주면 된다.
이유정의 생각대로 정원에는 두 명의 궁수가 김수현을 노리고 있었다.
“조준선 정렬….”
숨을 흘리듯 내뱉은 목소리가 유난히 고요하다. 이윽고 코에 찬 공기가 모조리 흘러나간 순간, 선유운은 그대로 숨을 참았다. 부릅뜬 두 눈은 모든 방해물을 뚫고 오롯이 김수현을 노려본다. 활줄은 이미 팽팽하다 못해 한계까지 당겨져 있다. 발사 준비는 진작에 마쳤다.
동시에 김수현을 건너뛴 반대편에서 너덧의 광채가 우수수 떠올랐다. 불상의 후면을 장식하듯 임한나의 뒤로 둥글게 올라와 눈부신 빛을 번쩍인다. 선유운과는 달리 대놓고 나섰지만, 떠오른 광채 하나하나가 무시 못할 기운을 뿜는다.
사방을 드리우는 빛무리를 신호로 여긴 걸까. 끊임없이 돌던 이유정의 몸이 한순간 반전했다.
이어서,
“하아!”
기합과 함께 적색 머리카락이 펄럭, 나부꼈다. 지면을 박찬 이유정의 몸이 순식간에 정면으로 쇄도한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날렵한 호선을 그리며 금빛 질주를 잇는다. 그러나 김수현은 무심한 눈으로 몸을 돌렸다. 오른손에 들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검이 정확히 이유정을 겨눈다.
그때 김수현이 손에 쥔 칼자루가 돌연히 물결치듯 흔들렸다.
거의 1미터 안으로 접근한 와중,
‘온다!’
이유정의 야성이 반응했다. 살기를 느낀 이상 대비할 수는 있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쌍 단검을 움켜잡는다.
그 순간이었다.
뻐억!
일순간 관자놀이에 거대한 충격이 느껴지며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귓속으로 이명이 울린다. 돌려진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뭐…?’
라고 생각하기도 전, 이유정은 곧바로 턱을 걷어차는 발길질을 느꼈다. “픕!” 윗니와 아랫니가 세게 부딪치며 강제로 고개가 젖혀졌다. 눈에 보이는 하늘이 서서히 아득해진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때였다. 임한나가 무어라 외치는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광채들이 웅혼히 울림을 남기며 김수현에게 돌진한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햇살마저 밝히는 빛무리가 정원을 드리운다. 나가떨어지는 이유정을 보던 김수현이 걷어차는 자세 그대로 흘끗 오른쪽을 돌아본다.
바로 그 순간.
“!”
선유운도, 시위를 튕겼다. 화살 깃이 싱싱한 꼬리지느러미처럼 펄떡, 요동쳤다.
쐐애애애애애애액!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린 일격. 목표는 김수현의 목. 찰나의 순간, 장대 같은 화살은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60미터의 거리를 좁혔다. 좌우로 날아온 저격이 이제 막 자세를 추스르는 김수현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꽈앙!
단순히 화살을 발사했다고는 볼 수 없는 거센 굉음이 터졌다. 그 소리만치 어마어마한 충돌의 여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정원의 흙더미는 흡사 성난 바다라도 된 듯 세차게 출렁이고, 떨치듯 일어난 먼지 가루가 정원의 중심을 덮는다. 이 성대하고도 파괴적인 풍경에 모두가 호흡을 잊었다. 사방에서 구경하던 클랜원들도, 화살을 쏜 두 저격수도.
잠시 후, 자옥한 연기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나타났다.
놀랍게도, 김수현은 두 발로 땅을 디딘 채 서 있었다. 처음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
이윽고 조금씩 연기가 걷히자 누군가 전율에 찬 탄성을 질렀다. 임한나가 발사한 광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익숙한 검 네 자루가 허공에 꽂힌 듯 박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긴 화살 하나가 김수현의 왼손에 잡혀 있다는 게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눈 몇 번 깜빡이기도 전에 종료된 전투. 공방의 수준은 무척이나 높아 구경하러 모인 대다수의 클랜원들이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그러나 고연주, 남다은, 차소림, 허준영 등등 몇 명만큼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수현이 손짓하자 주변에서 네 개의 검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이더니 광채를 쳐내 소멸시켰다. 이어서 반 박자 늦게 들어온 선유운의 화살을 왼손으로 가볍게 잡아챘다. 말인즉 단 두 번의 손짓으로 회심의 일격을 받아낸 것이다.
이유정의 희생을 바탕으로 노렸던 나무랄 데 없는 저격이다. 그러나 김수현의 대응이 완전히 상식을 벗어났다. 차라리 회피했다면 모를까. ‘절대 피하지 않고 받아낸다.’ 는 명제로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터.
툭, 김수현이 손에 쥔 화살을 떨어트렸다.
마침내 전투에 가까운 대련이 끝났다.
“으아아아….”
집중해서 지켜보던 안현이 질렸다는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이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그러나 정작 신기에 가까운 일을 이루어낸 장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무심한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주변을 둘러보는 눈동자는 은은한 분노를 흩뿌린다. 천천히 떼어진 김수현의 입이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
“아무 의미 없이 돌진했다가 곧장 나가떨어진 한 명.”
엄중한 음성에 한쪽 구석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신재룡이 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안 봐도 명백하다. 가장 첫째로 나가떨어진 사용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별 웃기지도 않은 능력 한 번 쓰고 지쳐 헉헉거리는 한 명.”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고르던 임한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우왕좌왕하는 동료는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든 한 발만 먹이겠다. 전장 조율은커녕 꽁꽁 숨어서 기회만 노리던 한 명.”
망연히 서 있던 선유운이 질끈 입을 짓씹었다.
이윽고 김수현의 눈이 주저앉아 있는 이유정을 향했다. 아직도 얼얼한지 턱을 매만지는 이유정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마치 야단맞을걸 아는 아이처럼.
“뭘 계산하고 움직였는지는 알겠는데…. 의도는 나쁘지 않아. 그런데 실전에서는 그렇게 나서지 마라. 죽기 딱 좋은 움직임이니까.”
그러나 김수현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꼼이 아닌 칭찬이 나왔다. 아니. 칭찬이라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비난은 아니었다. 이유정은 환하게 웃으려다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1등급을 기대한 수험생이 3등급을 맞는 것과 6등급인 줄 알았던 수험생이 4등급을 맞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니까.
시선을 거둔 김수현은 다시 세 명을 차례대로 노려봤다.
“고작 이따위로 하려고, 클래스를 계승하겠다고 한 겁니까?”
이따위.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비난이다. 그러나 신재룡, 임한나, 선유운은 살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차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 당시 김수현은 이렇게 말했다. 고연주, 남다은, 허준영을 뛰어넘을 자신이 있으면 가져가도 좋다고. 한데 뛰어넘기는커녕 김수현을 한 발짝도 물러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는 결과이지 않은가. 더 강해지기를 바랐는데 더 약해졌다. 입이 열 개라도 유구무언이다.
챙!
칼날이 시원스레 칼집에 꽂히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쯧…. 이래서야…. 그놈들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수현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선유운 : ㅅㅂ. 존나 지가 사기인 건 생각 안 하고. 김수현 개객끼.
임한나 : 그니까. 조연 버프가 어떻게 주인공 버프를 이겨? 말도 안 돼.
신재룡 : 에휴휴휴….
이유정 : B 등급~! B 등그으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