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15
00814 거자필반(去者必返). =========================================================================
믿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발대로 보낸 오백의 병사가 모조리 소식이 끊겼다. 무려 열흘을 기다렸는데도 어떤 연락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한소영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감정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잠시 후, 한소영의 낯빛이 갑자기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도도를 손에서 떼어내고는 아무도 없는 정면을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소영의 낯은 붉어졌다가 창백해지기를 자꾸자꾸 반복했으며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범람해 방 안을 휩쓸었다. 기운은 명백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확실히 느꼈다.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은 한소영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말하지 말라고, 어떤 말도 꺼내지 말라고. 무어라 입을 여는 순간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고 자기도 죽어버릴 거라고.
“머, 머셔너리 로드흐흐흐흐…. 어, 어서 안으로힠힠힠….”
한소영이 말은커녕 미동도 보이지 않자 박다연이 대신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권해준 건 고맙다만 애가 눈치가 없다.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말은 이미 웃고 있다. 머리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몸은 정직한 모양이다.
문득 박다연은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양 뺨을 세게 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긴 숨을 흘리며 나를 안내했다.
“후우우우…. 머셔너리 로드. 이쪽에 앉으시죠.”
“예. 감사합니다.”
음. 이제 좀 진정된 건가.
내가 소파에 앉자 박다연은 몸을 돌려 다시 한소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리고 언니느흐흐흐흐흐흐흫….”
다시 낄낄대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
“…클랜 로드? 오늘 머셔너리 로드는 총 두 안건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두 안건?”
마침내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시침 뚝 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걸 보는 박다연의 눈은 이미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네헤헤헤. 두 안건이요호오.”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위험하다. 위험해.
“뭔데?”
“흐아느아느은(하나는)…. 우, 우리가 현재 준비 중인 실종 의뢰에 관한 일이고요.”
“…….”
“그리고 남은 하나는…. 언니도 아시다시피…. 밤의 거리와 관련한 5 퍼센트흐흐흐~! 히힣히힝~! 흐힝헹헹~!”
아, 망했다. 잘 참는가 싶더니 또 터졌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는 했지만, 이제는 숫제 허리까지 꺾으며 숨넘어갈 듯이 끅끅거린다. 한소영의 안색은 어느새 핏기가 싹 가셔 살 색이 아닌 투명해 보일 지경이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사용자 박다연. 안내는 괜찮으니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박다연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썩이는 어깨춤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내 문이 닫힐 소리가 들릴 무렵, “푸흐히힝힝흐히힝!” 말 우는 소리와 비슷한 웃음이 복도를 왕왕 울렸다.
잠시 후, 한소영은 원망과 수치심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흑 수정 같은 눈동자가 그렁그렁하게 일렁이는 것이 꼭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모양새다. 날카로운 숨소리가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온다.
억울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빌어먹을 박다연. 수습할 자신이 없으면 조용히 나가던가. 이게 뭐야.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별다른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지그시 눈을 감고 살짝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우선, 사과부터 하자.
다시 눈을 뜨니 한소영이 살짝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의외라는 눈빛. 무언가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에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때 한소영이 찾아온 것부터 시작해 게헨나가 최면을 걸었던 일까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
설명이 끝나자 한소영은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감각’이라는 능력이 있는 이상 한소영은 이야기 속 심정을 액면 그대로 느꼈을 테니까.
“그런가요. 그래서….”
한소영은 서너 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턱을 들어 한결 나아진 얼굴을 보였다. 한소영치고는 약간 과한 감정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경직된 분위기가 점차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머셔너리 로드의 말인즉, 그때 제 행동이 이상했던 건 오롯이 최면의 영향이다. 이 말인가요?”
“예. 저도 한 번 조종당할 뻔한 적이 있지요. 최면을 통해 일종의 강력한 암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거죠. 굉장히 무서운 능력입니다. 저도 물론이고,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을 겁니다.”
“음. 그 정도로….”
“그저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머셔너리 로드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한데 그 말씀대로라며 방금 말들도 최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 되네요. 그럼 이해가 가네요.”
“예? 아니요. 그건…. 아, 예 예. 맞습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소영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가 황급히 말을 정정하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고요한 눈으로 책상을 내려다봤다. 깊은 생각이 잠긴 모습을 보니 무언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저게 원래 한소영의 모습이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나, 겉으로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였다면 이불을 뻥뻥 차는 것도 모자라 당장 죽고 싶었을 텐데. 저 정도로 평정을 유지하는 걸 보니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궁금하네요. 그분이 왜 저한테 최면을 거신 걸까요?”
오호. 반 억지로 말을 넘기고 바로 화제를 전환해 일을 묻으려는 건가.
이건 배울만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혹시 한 번 물어봐 주실 수는 있나요?”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요?”
“게헨나는 지금 이 차원에 없으니까요. 한 달도 더 전에 수나와 함께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갔습니다.”
“……!”
그 말을 꺼낸 순간 한소영이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동시에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손은 책상에 곱게 얹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잘못 본 듯싶다.
“어째서…?”
“뭐, 여러 사정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 차원에 머무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다시 소환될 가능성은요?”
“글쎄요. 천운과 기적이 합쳐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한소영은 잠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돌연히 손을 들어 하품을 하는 도도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러이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섬섬옥수가 간드러지게 턱을 간질이고 날개를 살며시 어루만진다. 도도도 한소영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특히 도도는 콧노래라도 부를 기세였다.
“좋네요.”
“예?”
“이 아이요. 페가수스는 처음 보거든요.”
“아. 사실 저도 신기합니다. 원래는 제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는 놈인데, 이스탄텔 로우 앞에서는 얌전하게 있네요.”
한소영은 새삼스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페가수스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흘려 지나가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별로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봐요?”
“……?”
“그분이 떠났는데….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느껴져서요.”
“하하.”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설마 한소영한테까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남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서로 다름을 인정했을 뿐입니다.”
“?”
“게헨나는 자신의 차원에서 이뤄야 할 오랜 숙원이 있습니다. 저 또한 제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목표가 있고요. 게헨나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돌아갔으니 저 또한 그럴 예정입니다.”
“음, 으음.”
여태껏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이던 한소영은 느닷없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턱을 주억였다. 무언가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것처럼.
문득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한소영이 뛰어갔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보나 걱정했는데, 우리는 어느새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전처럼,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제 어느 정도 기분도 풀린 것 같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도 될 듯싶은데.
“이스탄텔 로우 로드. 아까 사용자 박다연한테….”
“산기슭 근처의 입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우리도 원정을 준비하고 있어요.”
“역시 그랬군요.”
“네. 보아하니 머셔너리 클랜에서도 그곳의 원정을 준비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랬다. 암암리에 소문이 떠돈다는 건 ‘사멸 무저갱’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용자들이 소수나마 있다는 소리다. 설마 벌써 공략됐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터. 대표 클랜에 구출이나 실종 의뢰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유적과 가장 가까운 동 도시라면 더더욱.
현 상황인즉 서로 원정을 준비하는 장소가 겹치고 있다. 그래서 이스탄텔 로우를 찾아온 것이다.
“잠시만요. 말을 하기 앞서, 한 가지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어요.”
갑자기 한소영이 이야기에 제동을 걸었다. 자세를 바로 앉더니 지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당연히 머셔너리 로드도 아시겠지만…. 저희도 나름 정보를 수집해본 결과, 내부적으로 그 유적이 그리 쉽지는 않은 곳이라 결론을 내린 상태예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썩 가고 싶은 곳은 아니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겠다는 건…. 저희를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머셔너리 클랜을 위해서인가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부탁을 드리러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실 무슨 의미가 있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순간, 착각이었을까.
불현듯 한소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한소영은 두 손으로 도도를 안아 들고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
한소영과의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침에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기분대로 일이 잘 풀렸다. 원정도 양보받았고, 한소영은 5%의 이익을 주겠다는 제안을 뜻밖에도 선선히 받아들였다.
단, 완전히 받는 게 아니라 빌리는 조건이었다. 들어보니 근래 여러 정책으로 사용자들을 끌어당기느라 이스탄텔 로우의 재정이 상당히 어려워졌던 모양이다.
아무튼, 무엇보다 나락까지 떨어진 줄 알았던 한소영과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됐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다.
머셔너리 캐슬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광장 게시판을 이용해 원정 공지를 띄웠다. 이전과는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사건을 해결하러 가는 게 아닌, 말 그대로 탐험이 목적인 순수한 원정이다.
클랜원들도 그걸 느꼈는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9명으로 제한했던 인원을 전부 모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가볍게 원정을 클리어하고 형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내일 있을 원정 준비를 차분히 점검하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늦은 시간, 이번 원정에 관해 상담할 게 있다며 남다은과 정하연이 동시에 찾아온 일이 있었다. 허나 공교로이 마주친 두 여인은, 서로 어색한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고는 어색이 말을 흐리며 돌아갔다.
그런 해프닝만 제외하면 푹 잘 수 있었던 밤이었다.
*
청명한 하늘에 구름이 잔잔히 흐르는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머셔너리 캐슬은 원정 출발을 앞두고 조금 어수선했다. 김수현이 장비를 걸치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10명의 사용자가 한 곳에 모여 김수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정 공지를 띄웠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지원한 클랜원들이었다. 아, 한 명은 빼고.
여하튼 몇 개월은커녕 길어야 열흘 안으로 정리되는 원정이라 그리 신경 써서 준비할 것도 없다. 김수현은 가벼운 차림으로 서 있는 클랜원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하고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군요. 제갈 셔틀은?”
“뭐요?”
김수현의 등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발끈한 음성으로 회답했다. 주변에서 킥킥대는 웃음이 터졌다. 김수현은 싱겁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여기 있었네요. 바로 출발하고 싶은데, 좌표 계산은 끝내놨겠죠?”
“정말, 그때 좀 놀렸다고 이러기에요? 사내가 좀스럽게.”
이번에도 강제로 끌려 나와서 그런지 제갈 해솔은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이은 재촉에 이를 박박 갈면서도 차분히 주문을 외웠고, 곧 영롱하고 푸른 마력이 사방에서 점점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퉁!
세찬 폭음과 함께 푸른 마력에 둘러싸인 11명의 모습이 한순간 사라졌다.
수송 어빌리티. ‘사멸 무저갱’의 원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시작되었다.
‘그 사건’이 터지기 직전, 김수현 최후의 원정이.
============================ 작품 후기 ============================
사실 마지막 말을 적는데 상당히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꽤 중의적인 표현이거든요.
조금 풀어서 말씀 드리자면, 차후 메모라이즈에서 이런 소소한 원정의 경우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원정의 공백은 다른 소재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