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16
00815 비비앙, 뜻밖의 활약. =========================================================================
이번 원정 인원을 김수현 포함 10명이 아닌, 11명으로 수정합니다.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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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선발대로 500명. 두 번째는 1,000명. 세 번째는 1,500명. 네 번째는 3,000명….
근 두 달에 걸쳐 무려 6,000명의 병사가 저 빌어먹을 은신처에 잡아먹혔다.
승리의 환희도 잠시. 이제는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느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애꿎은 병사들을 소모하기보다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나을 테지.
두고 보자. 개 같은 놈들. 잡히기만 하면 갈아 마셔주마.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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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로 우리는 단숨에 사흘 거리를 도약할 수 있었다. 능력을 최대한도로 사용한다면 조금 더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제갈 해솔은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말했다. 동쪽으로 멀리 나가본 적이 없어 좌표에 자신이 없으니 가면서 계산해보겠다고.
여하튼 사흘이라도 충분하다. 우선 오늘 하루는 행군하면서 대기 시간(Cool Down Time)을 기다리고, 이후 한 번 더 도약하면 바로 부근까지 다다를 수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낙낙한 기분으로 앞을 바라봤다. 눈앞에는 맑은 빛을 반사하는 강을 낀 초원이 활짝 트여 있다. 먼빛으로 간간이 오고 가는 캐러밴도 한두 무리 보였다. 어느 무리는 탐험을 나가는지 한창 들뜬 분위기인 반면, 상당히 침체한 빛을 띤 돌아오는 무리도 하나 보였다. 아마 탐험에 실패했거나 동료를 잃었겠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현재 선두에서 우리를 선도하는 여인은 임한나였다. 원정으로 감각을 끌어올리고 싶으니 꼭 참가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쁜 생각은 아니다. 주야장천 틀어박혀 수련만 하는 것보다는 실전 경험이 백 배 도움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마 저번 대련 이후 나름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옆으로 설렁설렁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형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진수현의 목소리였다. 깍지 낀 양손으로 머리 뒷부분을 받치고 팔자걸음으로 걷는 것이 아주 느긋한 모양새다. 예전이었다면 단박에 불호령을 내렸겠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원정이고 이 정도 거리에서 괴물이 나온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또 원체 실력 있는 놈이기도 하고.
“뭔데.”
“형님이 아까 그러셨잖아요. 내일쯤이면 도착할 거 같다고.”
“그런데?”
“그럼 수송 어빌리티를 빼고 생각해도 도시와 엄청 가깝게 있다는 소린데. 왜 지금까지 발견이 안 된 거예요? 아틀란타를 공략한 지도 꽤 지났잖아요.”
아하.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는 다시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간단해. 유적이라고 꼭 눈에 잘 보이라는 법은 없거든.”
“예?”
“말했지? 이번에 갈 곳은 은신처라고. 그저 그런 은신처가 아니라 고대 왕국이 건설한 은신처야. 왕족의 은신을 목적으로 만들었으니 꽤 심혈을 기울였겠지.”
“흠. 그래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리고 발견이 안 된 게 아니라 발견됐어. 떠들썩하게 소문만 나지 않았을 뿐. 알고 있는 사용자들이 없는 건 아닐걸?”
“그럼 왜 쉬쉬하는 건데요? 아, 괜스레 사용자들이 몰리는 게 싫어서 그런 건가?”
가끔 보면 얘도 꽤 재밌다. 혼자 묻고 혼자 답을 한다. 조금만 생각하면 스스로 답을 내릴 줄 안다는 소리다. 그 생각이란 걸 하기 싫어해서 그렇지.
“그런 것도 있지만, 애초 아는 사람이 적은 이유도 있지.”
“응? 또 뭐가 있는데요?”
“그 유적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용자가 없거든. 그러니까 그 사용자들의 지인들이 추측만 할 뿐 확신까지는 하지 못한다는 소리야.”
“…….”
그러자 진수현이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내리고 깍지를 풀었다. 흘깃 보니 갑자기 낯빛이 진지해졌다.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없다…. 그럼 만만한 곳은 아니라는 소리네요.”
나는 소리 없이 긍정했다. 기실 사멸 무저갱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가능하기는 한 일이며 또한 굳이 정면으로 돌파할 필요는 없다. 과거 요행으로 사멸 무저갱을 공략한 사용자가 나왔으니 그 방법을 따라 하면 되지 않겠는가.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용이 잠든 산맥이나 야만 왕의 무덤 같은 곳이라면….”
나는 싱겁게 웃었다.
“설마. 그런 곳과는 댈 수도 없지. 아마 빙하의 설원과 비교해도 훨씬 쉽지 않을까 싶다.”
“아 그래요?”
그 순간 진수현의 경직된 표정이 탁 풀렸다.
“에이 뭐야. 괜히 걱정했네. 그럼 이번에도 형님만 믿고 가면 되겠네요? 헤헤.”
이어지는 밝은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걸까.
“수현. 무슨 일이에요?”
후방을 보던 고연주가 곧장 다가와 물었다. 나는 간신히 머리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떨어졌는지 등 뒤로 진수현과 이유정이 신 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형님만 믿고 가면 되겠네요?’ 라는 말이 갑자기 머릿속을 울렸다. 물론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는 알 것 같다. 그러나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말투가 까닭 없이 언짢다. 비단 진수현만이 아니라 나조차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거슬리는 것이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한 걸까. 그건 전혀 당연한 게 아닌데.
상념과 함께 동쪽으로 걷자 점차 초원이 사라지며 주변 풍경도 서서히 험난해졌다. 한층 길쭉해진 수풀은 어느새 무릎까지 닿았고, 드문드문 보이던 나무도 아름드리만 한 것들이 한곳에 붙어 출현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강줄기도 차차 굵어지더니 수림 곳곳에서 구부러지며 썩 세찬 물소리를 냈다.
한층 머릿속이 복잡해진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억지로 털어냈다.
우선은 원정에 집중하자.
*
원정 계획에 미세한 착오가 생겼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에 기인한 오착(誤錯)이었다. 원래 대기 시간이 하루에서 이틀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 시간이 전보다 줄어든 것이다. 게헨나가 알려준 방법을 적용하니 훨씬 부담이 덜해졌다고 하는데 아무튼 나쁜 착각은 아니었다. 외려 환영할만한 일이지 않을까.
어차피 해도 저물어 가겠다.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나는 한 번 더 수송 어빌리티를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오늘 부근까지 도착하고 야영한 후, 내일 바로 들어가는 게 깔끔할 테니까. 강행군을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한 번 더 수송으로 도약하고 나서 우리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야영지를 설치했다. 천막을 짓고 침낭을 펴고 나오니 고소한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느새 완연해진 어둠을 밝히는 모닥불에 다가가 앉자 고연주가 사근사근한 태도로 술을 한 병 꺼내왔다. 약초로 담근 가벼운 술이라고, 식전에 입맛을 돋우는데 좋다고 말하니 도저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가볍게 목을 넘어가는 느낌도 좋았지만, 혀에 달착지근하게 감기는 맛이 아주 그만이다.
그렇게 고연주가 손수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켤 즈음.
“수현. 조승우 씨한테서 연락이 왔네요.”
별안간 정하연이 차분히 걸어와 오른쪽에 앉았다. 손에는 이제 막 빛이 꺼진 통신용 수정이 쥐어져 있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장소와 관련한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고 해요.”
“실종 의뢰입니까?”
“아니요. ‘미끼’를 조심하라고 하네요.”
“미끼…?”
의외의 말이기는 했으나 곧 머리를 끄덕였다. 드물기는 하지만, 미공략된 유적이 있는 장소에 그런 놈들이 있다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오빠. 미끼가 뭐야?”
그때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에는 목울대를 꼴깍꼴깍 움직이는 이유정이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가 든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한 주제에 저런 모습이라니. 염불은커녕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다.
쯧쯧 혀를 차며 잔을 내밀자 이유정이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주춤하더니 자리에 도로 앉으며 시무룩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옆을 돌아보자 고연주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이유정을 쏘아보고(?) 있다. 이어서 손을 내밀어 내가 내밀었던 잔을 몸소 거두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나만 마시라는 뜻 같은데. 한 잔 정도는 줘도 괜찮지 않나.
이윽고 고연주는 자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정아. 미끼라는 건 우리가 미끼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야.”
“언니 너무하다 진짜. 물론 언니가 담근 술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빠가 준 거잖아.”
“발견된 유적에 사용자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럼 역으로 그 사용자를 노리는 무리도 생기거든.”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맞아. 물론 부랑자는 없어지기는 했지.”
“아, 아니.”
“하지만 정민이가 토벌한 건 뼛속까지 부랑자인 놈들이고. 여기서 말하는 놈들은 평소에는 사용자처럼 생활하다가 돌변하는 놈들을 뜻해. 살인멸구라는 말을 알고 있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언니 미워.”
이유정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가지런히 모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정하연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오늘 밤은 경계를 강화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글쎄요.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를 노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오른쪽에 앉은 정하연의 말에 답한 건 왼쪽에 앉은 고연주였다.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사자도 토끼를 사냥할 때는 최선을 다한다고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방심은 금물이에요.”
“그러네. 하연 언니랑 다은이 말이 맞네. 방심, 은 금물이죠.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 약속, 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죠? 연주 언니?”
정하연의 옆에 앉은 남다은의 말에 답한 건, 고연주의 옆에 앉은 임한나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심’과 ‘약속’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어조 자체도 상당히 가시가 돋쳐 있다.
“그런가? 하기야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그러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을 수도 있으니까?”
“어머. 이 약주 조금 이상한데요? 어떤 약초를 넣은 거지?”
고연주가 묘하게 말끝을 올리며 옆을 흘기자 정하연은 술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말을 흐렸다.
“어머. 설마 이거 그거 아닌가? 사내의 정력을 증진해주는….”
“어머. 그게 무슨 상관이죠? 하연 씨가 언제부터 이런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어머. 뭐, 그냥요. 찢어진 이파리를 보니 갑자기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가 생각나서요.”
“어머. 그것참 이상한 상상력이네요. 혹시 찢어진 캐미솔처럼 보이지는 않나요?”
돌연히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에는 고연주와 임한나가. 오른쪽에는 정하연과 남다은이. 네 여인이 두 편으로 나뉘어 빤히 쳐다보고 있다. 얼굴은 화사한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마치 서로 웃으며 총질을 하는 느낌이랄까.
그때였다. 담담히 술을 털어 넣는 와중 느닷없이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마침 약주 덕에 입맛도 돌겠다. 슬슬 배가 고프다. 아까 천막에서 나왔을 때 분명 음식 냄새를 맡았고, 지금도 맡아진다. 한데 항상 요리를 담당하던 고연주, 임한나는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아이고 힘들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쿵, 돌연 무거운 것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낭랑한 음성이 꼭 누군가와 닮았다.
문득 몇 년 전 악몽이 뇌리를 스쳤다. 축제 때 이 누군가의 음식을 먹고 게거품을 물며 기절했던 선유운이 어른거리며 눈앞에 떠오른다. 나는 속으로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조금씩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근원?”
천천히 돌리는 시야로, 땅에 죽은 듯 엎드려 누운 여아가 먼저 눈에 잡혔다. 요리를 준비하느라 더러워진 주변을 차치하고서라도, 미동도 보이지 않는 것이 기절한 게 분명하다. 하하. 초 정보 집합체인 근원도 견디지 못한 건가.
“저녁 대령이요!”
이윽고 김이 펄펄 오르는 큰 통을 앞에 두고 생글생글 웃으며 이마를 닦는 비비앙을 확인한 순간,
땡그랑!
나도 모르게 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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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이라는 건 이번 원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그냥 일종의 분기점이라고 보셔도 무방하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