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17
00816 비비앙, 뜻밖의 활약. =========================================================================
왕국의 지원을 받아 난다 긴다 하는 전문가들을 투입한 지도 어느새 이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소식은…. 여전히 없다.
근래 수도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병사들은 또 자신들이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으며, 가시적인 성과를 바라는 왕국 수뇌부는 내 지도력을 의심하는 상황이다.
혼란스럽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돼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든 수를 내야 하는데….
『아틀란타 비밀 도서관 ‘발칸(Balkan) 왕국 멸망사 – 진중일기(陣中日記)’ 中』
*
부글부글!
비비앙이 철통을 들고 온 이후 야영지 일대로 무서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걸쭉한 액체가 잇따라 야단스럽게 끓는 소리뿐.
“응?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어서 오라니까? 식으면 맛없어!”
탕탕, 국자로 철통을 두드린 비비앙이 생글생글 웃으며 외쳤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내심 ‘맛있다!’ 는 칭찬을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 비비앙의 음식을 먹고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선유운을 생각하면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괜한 기우일 수도 있다. 어쨌든 겉보기로 큰 문제는 없으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니까. 그러나 마냥 좋게 생각하기에는 한쪽에 죽은 듯 쓰러져 있는 근원이 걸린다. 비단 나만 본 건 아닌 듯하다. 몇몇 클랜원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공포의 빛이 떠올랐으니.
그렇게 대부분이 침묵하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으음~. 스메에엘~.”
진수현이 눈을 감은 채로 코를 벌름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상대적으로 늦게 가입했다 보니 그때 그 참사(?)를 알지 못하는 모양.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제갈 해솔은 확실히 영리했다. 재빠르게 주변의 반응을 살피더니 반쯤 뗀 궁둥이를 살그머니 도로 붙였으니까.
“자. 어디 한 그릇 내놔봐. 내 친히 먹어주도록 하지.”
“흥. 건방지기는. 영광인 줄 알라고. 내가 날이면 날마다 요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새침하게 말한 주제에 비비앙은 한껏 기뻐하는 태도로 진수현이 내민 그릇에 한 국자 가득히 부어주었다. 문득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그냥 스치기만 했다. 어쩌면 근원이 쓰러진 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희생양, 아니 실험 대상이 한 명 필요했다. 그래. 어쩌면 한 국자 정도는 먹어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아 뭐야. 꼴랑 한 국자?”
그때 진수현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볼멘소리를 뱉었다.
“야. 겨우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미친놈인가?
“아이 참. 욕심부리기는. 더 많이 만들 걸 그랬나?”
“보니까 많네. 인간적으로 좀 더 줘라.”
“알았어. 알았다고. 많이 먹어~.”
“그렇지. 특히 고기 좀 팍팍. 더, 더, 더, 더….”
결국 그릇이 넘칠 만큼 그득하게 받고서야 진수현은 만족한 얼굴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흐뭇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따끈따끈한 스튜를 응시하더니 은색 숟가락을 들어 푹 꽂는다.
치이이익, 그릇에서 돌연히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나는 물론 관찰하고 있던 전원이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진수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검게 변색한 숟가락을 흡족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야. 고기가 큼직한 것이 아주 푹 익었구먼? 잘 먹겠습니다!”
큰소리로 외치더니 입을 크게 벌려 숟가락을 입으로 밀어 넣는다. “합.” 입이 닫히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아. 씨발.”
벙글벙글 한 얼굴이 단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와짝 구겨졌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안 먹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진수현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는 듯이.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허리가 꺾이더니 입을 막은 채로 “우웨에엑.”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고이 모으고 있던 비비앙은 두 눈이 분노로 치떠졌다.
“뭐? 씨발?”
“아, 아니…. 그게….”
“너 방금 씨발이라고 했어?”
“자, 잠깐만. 내가 욕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우욱.”
진수현은 아니라는 듯 머리를 흔들다가 또 한 번 허리를 숙였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전원 중앙에 신경을 집중하는 찰나 돌연 날카로운 파공음(破空音)이 귀를 찔렀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온 화살이 정확히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저격이다.
그 찰나의 순간, 흘끗 머리를 든 진수현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튕기듯 몸을 일으켜 번개같이 검을 뽑아 휘두른다.
카앙!
뻐엉!
진수현은 확실히 자신을 저격한 화살을 쳐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무언가 요란스럽게 터지는 소리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화살 끝에 매달린 터진 주머니서 분분한 분홍 가루가 흩날린다. 어찌나 퍼지는 속도가 빠른지 시야의 하늘이 순식간에 절반 이상 가려질 정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기습입니다. 모두 전투…?”
이윽고 칼자루를 잡으며 힘껏 일어난 순간 이번에는 세찬 열풍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가 그을리는 듯한 느낌.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글거리는 불덩이 여덟 개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낙하하고 있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퍼붓는 공격이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공격이다. 말인즉 저 마법은 우리가 아닌 가루를 노린 공격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투쾅!
맑은 불빛이 미끄럼틀을 타듯이 내려와 대지로 세차게 내리꽂혔다. 반구형 그릇을 거꾸로 뒤집은 듯한 장막이 한순간 사방을 점거했다. 딱히 이 이상 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내 의도를 알아차린 화정이 영역 안으로 들어온 모든 불(火)의 통제권을 빼앗았으니까. 여덟 개의 불덩이는 흡사 ‘홀드(Hold)’ 마법에 걸린 것처럼 허공에서 정지돼 있었다.
소강상태도 잠시. 옆을 돌아보자 이제 막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용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는 약 스물 남짓. 궁수나 마법사를 생각하면 더 있을 수도 있다.
이윽고 눈이 마주친 순간 놈들이 걸음을 주춤했다. 황당하다는 눈초리들이 느껴졌다. 그렇겠지. 무슨 가루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효용도 보지 못했고, 마법 공격은 허공에 멈춰 있으니까.
그 순간 불현듯 맨 앞에 선 놈이 신속히 우리를 훑더니
“…후퇴.”
짧고 차분한 한 마디와 함께 그대로 몸을 돌려 수림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남은 놈들 또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한다.
“호?”
저놈들 좀 보게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루와 마법으로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려고 했겠지만, 기습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거기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광경까지. 즉 일순간 잘못 건드렸다고 판단하고 바로 후퇴를 결정했다.
앞선 공격도 그렇지만 상황 판단이 굉장히 빠르고 움직임도 일사불란하다. 좋게 말하면 이렇고 나쁘게 말하면 쥐새끼 같다.
아무튼,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놈들은 아닐 터. 실력도 제법 괜찮은 듯하고.
“수현.”
고연주가 빠르게 나를 불렀다.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영역 선포를 해제하며 입을 열었다.
“양동 작전일 가능성도 있으니 전부 추격하지는 않습니다. 고연주, 임한나, 이유정 그리고….”
“형님. 저도 가겠습니다.”
그때 진수현이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숨이 약간 거칠어 보이지만 딱히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헛구역질을 참느라 입을 막고 있던 것이 가루의 침입을 보호해준 것이다. 새옹지마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두 눈만큼은 아주 이상했다. 날카롭다 못해 분노를 뚝뚝 흘리는 게 광기(狂氣)까지 엿보일 정도였다. 온몸으로 ‘나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어.’ 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분노를 풀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붕붕 휘두른다.
“아니. 너까지 굳이….”
“아 저도 가겠다고요. 닭 새끼 잡는데 소 잡는 칼 쓸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라.”
“예. 저 개 같은 새끼들. 싹 다 죽여버려도 되죠?”
사실 고연주 한 명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만. 그러나 기세에 밀려 나도 모르게 허락하자 진수현은 이를 악물며 수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고연주, 임한나, 이유정은 멍하니 서 있다가 내가 재촉하자 황급히 추적을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야 이 개 같은 새끼들아아아아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흡사 짐승과도 같은 거센 노호성이 수림을 떠르르 울렸다. 들어보니 벌써 쫓아가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무언가 거칠게 휘두르고 퍽퍽 때리는 기척도 느껴졌다. 아마 자신을 저격한 것에 화가 난 것 같은데.
“감히 나한테 그딴 걸 처먹여? 이 씨발 새끼!”
“으, 으아아악!”
이번에는 집어 던지고, 세게 걷어차 버리고…. 응? 뭘 먹인다고?
“욕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저절로 욕이 나왔다 이 새끼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건…. 아, 안 돼! 크아아악!”
“입 닥쳐! 그냥 단순히 맛이 없으면 말도 안 해! 근데 그건 맛없는 수준이 아니잖아! 이 개새끼야!”
“도, 도망치고 있는데 이건 너무 심하잖아! 우리와 무슨 원한을 졌다고…. 아아아악!”
연달아 들려오는 고성과 비명. 어찌나 난리법석인지 수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문득 누군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제갈 해솔이었다.
“클랜 로드.”
“……?”
“저 스튜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종의 버프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
스리슬쩍 눈을 돌리니 철통을 앞에 두고 열렬히 응원하는 비비앙이 보였다.
“저 나쁜 놈들! 잘한다 진수현! 아주 깡그리 죽여버려!”
…설마 모르고 있는 건가?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비명이 이어지는 수림을 보며 가볍게 애도했다. 놈들로서는 뜻하지 않게 진수현의 화풀이 상대가 됐으니까.
잠시 후.
약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림의 소란이 사그라졌다. 추적에 들어갔던 네 명은 매우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아까 모습을 드러낸 스무 명은 물론, 어딘가에 숨어 있던 궁수와 마법사도 싹 다 잡아온 것이다.
그렇게 전신이 꽁꽁 묶인 채 야영지 중앙에 무릎 꿇린 놈들의 수는 총 스물여덟 명. 아니. 열두 명. 열여섯 명은 추적하는 과정에서 죽었는데 대부분이 진수현의 손에 사망했다. 개중에는 머리통이 으깨진 놈이나 복부가 터진 년 등등 끔찍한 시체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진수현은 씩씩거리며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중이었다.
“이놈들이 아마 그놈들이려나….”
“어머?”
미끼를 조심하라. 조승우의 연락을 떠올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와중 돌연 깜짝 놀란 음성이 들렸다. 고연주가 토끼 눈을 한 채 딱딱히 굳어 있었다. 아까 놈들의 품을 한 명씩 뒤지는 것 같던데 무언가 발견한 듯싶다.
“얘 좀 봐. 이거 완전히 웃긴 애들이네.”
“…….”
“너 이거 어디서 났니? 말 안 할 거야?”
“…….”
고연주는 아까 선두에 섰던 사내의 멱살을 잡고 틀어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닫고 있자 사내의 정수리에 오른손을 얹고 눈을 맞췄다. ‘유혹의 눈동자’를 사용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고연주. 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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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네요. 2015년 한해 평화와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독자님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