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1
00820 사멸 무저갱(死滅 無底坑). =========================================================================
계단을 내려간 후 원정대는 바로 탐험을 재개했다.
지하 2층은 개미집을 방불할 정도로 알기살기 얽혀 있었다. 통로는 좁은데 공간은 어찌나 요리조리 섞였는지 까닥 잘못하면 길을 잃을 판이었다.
초입을 벗어나자 함정도 본격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돌이 굴러오는 등 조잡한 꾀 따위가 아니었다. 통로를 통과하는 도중 난데없이 벽이 맞닿을 정도로 길이 좁아지고, 어느 공간은 들어가자마자 방 전체에 뾰족한 창이 솟구치기도 했다.
한 번은 마법사들의 소모된 마력을 채우려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앉자마자 바닥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일도 있었다. 김수현이 재빠르게 잡아주지 않았다면 김한별은 미아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엉겁결에 겨우 도망치고 서서 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뿐일까. 걸을 때나 쉴 때나 사각거리는, 마치 다리 많은 벌레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자꾸만 귀를 긁었다. 몇 번이나 행군을 멈추고 주변을 정밀하게 조사했으나 그럴 때는 귀신같이 기척이 사라졌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니 어느새 클랜원들의 신경도 한참 예민해졌다. 이미 자신들이 어디를 걷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유적 안으로 들어온 이상 낮과 밤을 구분하는 개념은 사라졌고, 어둠을 밝히는 서너 개 구체에 의지해 그저 걸어갈 뿐. 원정대를 선도(先導)하는 김수현의 등을 기계처럼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나마 하나, 아니 두 가지 위안거리가 있다면 우선 벽에서 울리던 이죽거림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활약으로 사방에 도사린 함정을 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근원이었다. 점차 함정이 출현하는 빈도가 심해지자 지하 1층에서 선보인 ‘전장 분석(BattleField Analysis)’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전장 분석은 마법사의 ‘마법 진지 구축’과는 궤를 달리하는, ‘초 정보 집합체’에 기인한 능력이다. 말인즉 근원의 고유 능력이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만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전 아스트랄 차원에서처럼 100% 상태라면 모를까. 현재 근원이 최대한도로 낼 수 있는 출력은 40%도 채 되지 않는다.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지식을 흡수하고 꽃의 마녀 세트로 회복한 출력이 그 정도였다. 예외에 해당하는 60%에 관한 함정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꾸어 말하면 아득한 옛날 이 무저갱을 건설한 마법사들이 그만큼 뛰어난 지식의 소유자라는 방증이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발을 잇달아 내딛는 소리가 어두운 통로를 울린다. 발에 천근 추라도 매었는지 묵직하기 짝이 없는 걸음이다. 실제로 클랜원들의 어깨는 살짝 처져 있고 이따금 발을 끄는 소리도 들렸다. 하기야 먼지가 켜켜이 쌓이고 곳곳에 숭숭 구멍 뚫린 길을 반나절 넘게 걸었으니 슬슬 지칠 법도 했다. 게다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음과 음산한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정신을 압박하고, 마법사들은 몇 시간이나 라이트 마법을 유지한 상태라 체력 소모가 훨씬 심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와중 돌연 선두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이윽고 김수현의 발이 완전히 멈췄을 즈음 원정대의 앞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표면에는 붉은색과 녹색이 섞인 녹이 잔뜩 슬었고,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듯 굳게 닫혀 있다. 김수현은 철문을 꼼꼼히 살폈다. 별 이상한 건 발견 못 한 듯 곧 양손을 대고 힘껏 밀었다. 철문이 비명을 질렀다.
끼깅, 끼기기깅! 불쾌한 소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자 웬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 100미터 세로 200미터 정도 되는 공간은, 특이하게도 가운데를 제외한 양옆이 우묵하게 패여 있었다. 마치 볼링장의 레일 하나를 확대해 옮겨놓은 듯했다. 좌우 외벽과 천장은 흙이 아닌 커다란 벽으로 막혀 있는데 표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길이 끝나는 건너편에는 다음 통로로 갈 수 있는 문이 하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에는 통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누구도 ‘좋아! 돌진이다!’ 라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별 의심 없이 건너기에는 이미 당한 전적이 너무나 많으니까. 외려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토하며 지친 눈으로 쳐다볼 뿐.
“여기는 또 어떤 방일까….”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김수현은 허리를 굽혔다. 바닥의 흙을 한 줌 쥐고 주물럭거려 단단하게 뭉쳤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던졌다.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문득 천장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오더니 화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다음 순간, 흙덩이는 채 5미터도 날아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김수현은 무심한 눈동자로, 나머지는 역시나 하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두 눈을 치뜨는 등 방 안을 응시했다.
잠시 후, 일부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근원은 언제나처럼 바로 전장 분석을 사용하는 대신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한 번입니다.”
“…….”
“저는, 이제, 여기서, 전장 분석을,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마력이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으음.”
김수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근원은 곧 입속말로 주문을 웅얼거렸다. 이윽고 세찬 바람에 로브가 펄럭이고 형형한 두 눈이 벽과 천장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총 사십사 개의 영구 마법 진을 확인했습니다. 하나하나 빈틈없이 맞물린 구조를 갖추고 있고, 전 진(陣)이 침입자를 말살하려는 용으로 새겨진 듯합니다. 한 걸음이라도 들어가는 즉시 순차적으로 발동하며 개중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형식도 있습니다.”
긴 설명이 끝나자 클랜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근원의 말은 방 안에 44명의 마법사가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것도 대기 시간 없이 무한히 마법을 뿜어내는. 물론 ‘매직 미사일’ 정도의 마법이라면 해볼 만하겠으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죠?”
“으아, 한결이를 데려왔어야 했나.”
“우선 있는 대로 보호막을 치고….”
“모두, 제 주변으로.”
서로 망연히 의견을 주고받을 즈음, 문득 강한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일깨웠다.
김수현은 차분한 눈길로 클랜원들을 훑고 입을 열었다.
“마침 수가 딱 맞아떨어지네요. 우선 근접 계열이 마법사를 안도록 하지요.”
“…아!”
머리 회전이 빠른 제갈 해솔이 탄성을 질렀다. ‘빙하의 설원’ 원정에 참여한 클랜원들도 곧바로 의도를 알아차렸다. 한동안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돌연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두 눈을 끔뻑끔뻑 움직였다. 그냥 한 명씩 안으면 되는데, 갑자기 여덟 여인이 원형으로 모여 서로 지그시 바라본다.
가볍게 손을 풀던 김한별은 문득 옆을 보고 왼쪽 눈을 찌푸렸다.
“유정이 언니?”
“응.”
“언니 근접 계열 아니에요?”
“응.”
“이유정. 장난하지 마.”
“…네.”
고연주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눈에 힘을 줬다. 이건 무시하기 어려웠는지 이유정은 스리슬쩍 걸음을 물렸지만, 이내 억울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허나 고연주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 높이 손을 들었다.
“자. 그럼 해볼까? 가위, 바위, 보!”
고연주가 힘차게 손을 내렸다. 가위였다. 그러나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손을 내지 않았다. 그저 물끄럼말끄럼 쳐다보고만 있을 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고연주는 호호 웃으며 다시 손을 들었다.
“자, 그럼….”
“고연주. 장난하지 마십쇼.”
그러한 찰나 서릿발 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고연주는 칫 혀를 차며 물러났고 남다은과 임한나도 시무룩이 빠졌다. 이유정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은 가운데, 마침내 남은 네 여인의 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가위, 바위, 보!”
그리고 동시에 손이 내려지고,
“이겼다! 내가 이겼어!”
낭랑한 환호가 이어졌다.
“우헤헤헤.”
비비앙이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다가 김수현의 품으로 냉큼 안겼다. 마치 아이처럼 몸을 뒤척이더니 김수현의 왼손이 궁둥이를 받쳐주자 만족한 신음을 흘리며 활짝 웃는다. 이윽고 김수현이 가만히 비비앙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어깨를 축 늘어트린 여인들이 한 명씩 짝을 찾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근원은 이유정에게, 정하연은 고연주에게, 김한별은 남다은에게, 제갈 해솔은 임한나에게 안겼다. 진수현은 침울한 얼굴로 홀로 서 있었다.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김수현은 조용히 앞을 바라봤다.
“그럼.”
우웅!
김수현이 입을 여는 동시에 품에서 터져 나온 붉은 장막이 클랜원들을 둥글게 감쌌다. 게헨나의 보호 요새가 발동된 것이다. 확실히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이 있다. 단순히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기하급수로 마력이 사라진다. 외부 공격을 방어할 시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김수현이 무릎을 구부렸다. 누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겠습니다.”
이윽고 동시에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 명이 비로소 문으로 들어갔다.
우웅우웅우웅우웅!
치이이이이이이익!
빨간빛이 번쩍였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방은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삽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마 장막이 없었다면 금세 열기에 삼켜 녹아내렸을 터.
100미터를 지나쳤을 때 불현듯 푸른빛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시야에 흰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뜨거워졌다가 냉각돼서 그런지 흙길이 쩍쩍 갈라졌다.
이어서 노란빛이 번쩍였다. 이제는 거진 빗발치는 수준이었다. 열기, 냉기, 뇌전이 뒤섞인 마법의 폭우가 붉은 장막을 가열차게 두들겼다. 그러나 구슬은 요새라는 말에 걸맞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히 방어해냈고, 그에 힘입은 원정대는 무조건 앞으로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길의 거의 끝 부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제가 열게요!”
아무도 들지 않은 진수현이 장막 내 가장 선두로 이동했다. 그리고 끝에 도착하자마자 있는 힘껏 달려가 문을 밀었다. 그 순간 잠깐 멈칫하더니 도로 문을 세게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육중한 철문은 꿈쩍도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문의 상부에 빛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진수현이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며 외쳤다.
“무, 문이 안 열려!”
“그게 무슨 소리야!”
얼른 근원을 내려놓은 이유정이 나는 듯 달려가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꺄악!”
퉁,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진 이유정이 흙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고연주가 재빠르게 발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밖으로 튕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문이 안 열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유정이 얼떨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젖혔다. 방 안은 어느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마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일까. 덜덜덜덜, 붉은 장막이 떨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하연이 이를 악물며 소리 질렀다.
“문! 문에서 방금 진의 형상이 떠올랐어요!”
“젠장, 문에도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거야?”
누군가 거친 욕설을 뱉은 찰나, ‘이번에도’ 김수현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었다. 문에 댄 오른손에서 맑은 불꽃이 일었다. 불빛은 철문 안으로 살며시 스며들어 전체를 가볍게 훑었다. 이윽고 장막의 떨림이 한층 격해졌을 때 문을 밝히던 불빛도 툭 꺼졌다. 가볍게 밀어내자 철컹,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지며 다음 공간을 드러냈다.
그런 김수현의 모습은 너무나 침착하고 차분했다. 실제로 잠재 능력 중 ‘심안(心眼)’이 있기는 하나, 그 어떤 위기도 김수현을 흔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흐음…. 아, 여긴가?”
김수현이 안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입속말이라 그 누구도 자세히 듣지 못했다.
“안 들어옵니까?”
잠시 후,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들어오라 손짓하는 김수현은 모습은,
“…….”
보는 이의 눈에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사용자를 보는 듯했다.
드디어,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조금씩 자각(自覺)을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로써 사멸 무저갱 공략도 팔부능선은 넘었네요. 사실 이번 에피소드의 목적은 유적 공략이 아닌, 다른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원래는 빙하의 전설 원정과 비슷한 길이로 구상했다가, 싹 다 자르고 대폭 줄였습니다. 서로 목적이 다른 만큼, 원정보다는 다른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거든요.
아, 선도하다 라는 말은 먼저 선(導), 인도한 도(導)로 남의 앞에 서서 인도하다, 앞장서서 이끌고 인도하다. 이 정도로 해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타는 아니랍니다. 🙂
긴 연휴가 끝났네요.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우울한 월요병 따위는 힘차게 날려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