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3
00822 “…인정 못 해.” =========================================================================
딱, 딱…. 딱, 딱….
무언가 딱딱한 것을 물어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공동을 울렸다.
찰나(時間)의 습격이 끝난 후, 야영지에는 을씨년스러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고연주는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임한나와 정하연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가끔 빠드득빠드득 신경질적으로 이를 가는 소음이 들렸으나, 대부분이 망연한 얼굴로 하염없이 움푹 파인 구멍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어떤 여지도 없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일이다. 불시의 습격을 막지 못한 원정대에 손해가 발생했다. 근접 계열 두 명과 마법사 한 명이 원정대서 이탈했다. 아니. 당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용은 간단하나 현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김한별의 침낭이 사라지고, 이유정의 침낭도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수현의 침낭이 사라졌다. 이 사실이 현재 클랜원들이 침묵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김수현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는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머셔너리 클랜원들에게는 더더욱.
“살아…. 계시겠죠?”
문득, 누군가 홀연히 입을 열었다. 허나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확신을 못 하는, 누군가가 그렇다고 해주기를 바라는 음성이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외려 딱딱거리는 소리만이 한층 심해졌을 뿐, 기대에 부응해주는 회답은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상상을 한다. 상상력의 장점이자 단점은 무한한 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적으로 생긴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이 끼어드는 순간, 상상은 망상으로 변한다. 말인즉 사고(思考)의 이상 현상이랄까.
그 결과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일환으로 평소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고는 한다. 지금 정하연이 파르르 떨리는 입으로 연신 손톱을 깨무는 것처럼.
고요한 정적이 이어질수록 고연주의 표정도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두 여인처럼 망연한 얼굴이었으나 점차 낯빛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을 거울삼아 빠르게 속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이렇게 계속 망부석처럼 서 있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으니까.
“우선 근원이는 들어가서 쉬어. 이런 분위기에 푹 자지는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마력이라도 회복해.”
그 순간 남은 인원의 눈이 모조리 쏠렸다. 언뜻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초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연주는 곧장 말을 이었다.
“물론, 구출…. 되찾을 거야. 클랜 로드는 물론, 한별이도 유정이도.”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일인 만큼 말을 아꼈다. 정확히 말하면 구출이 아닌, 되찾는다고 말을 바꿨다. ‘위험한 상태에서 구해낸다.’ 는 말과 ‘도로 찾는다.’ 는 의미는 같지 않다. 일견 비슷해 보여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
“살아 계시겠죠? 그렇겠죠?”
누군가 또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가능성은 높아. 다른 차원에 끌려갔는데도 나보란 듯이 살아 돌아온 이인걸.”
희망적인 말을 했지만 고연주는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살아 있든 아니든, 이제 남은 클랜원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김한별과 이유정도 그렇지만, 김수현의 공백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커다란 타격이다. 그래서 강제 휴식을 지시한 것이다. 김수현이 없는 원정대. 근원은 그나마 유적을 돌파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유일한 열쇠니까.
“내 잘못이야…. 내 잘못….”
그렇게 고연주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에도 임한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경계조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자책하는 것이다. 남다은, 정하연, 진수현도 마찬가지였다. 고연주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임한나. 허튼소리 그만하고 가서 천막이나 정리해. 사체를 분석하고 있을 테니까 정리하다 이상한 거 있으면 알려주고.”
“어, 언니….”
“정신 차려.”
“…….”
짧지만 냉엄한 일갈. 이렇게 말은 했으나 고연주 역시도 막막한 기분은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막말로 이전에 통과한 함정이 또 한 번 출현한다면 그때는 장담할 수 없으며, 설령 어찌어찌 통과한다손 해도 괴물과의 사투도 염두에 둬야 한다.
특징도 모르고,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앞에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는지 깜깜하다. 어깨는 시시각각 무거워져 가는데 아득하기는 매 한 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
약간 뒤로 물러난 제갈 해솔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 김수현이 누워 있던 자리를 흘깃거리면서.
*
드드드득, 드드드득!
흙을 스치는 되바라진 소리가 쉴 새 없이 귀를 때렸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가늠할 수 없고,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냥 최종 보스 괴물이 있는 방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시간은 꽤 흘렀구나 등 짐작만 할 뿐. 왜냐면 현재 현상이 내가 노린 ‘요행수’와 완전히 일치하니까.
딱 한 번, 중간에 가늘고 뾰족한 것이 목을 살짝 찔러오기는 했다. 내 내구를 뚫은 걸 보면 굉장히 날카로운 침인 듯싶은데, 별 효과는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화정의 힘으로 태웠기 때문이다. 잠깐 느껴진 뻣뻣함으로 보아 마비를 시키려 한 모양. 괜히 꿈틀거리면 일이 틀어질 것 같아 나는 얌전히 감긴 채 괴물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놈도 내가 마비됐다고 생각하는지 이동에 박차를 가하기만 했다.
어쩌면 상당히 웃긴 상황이 아니려나. 괴물의 긴 몸체가 침낭 속 나를 단단히 감고 있고, 지하를 거침없이 유영한다. 물 흐르듯이 라고 말하기에는, 사실 상당히 거칠다. 시야는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몸도 덜컹덜컹 흔들린다. 마치 놀이 공원 열차를 타는 기분 같다.
게다가 속력은 또 얼마나 빠른지. 체감되는 속도는 내 0년 차 시절 7할의 힘으로 달리는 수준과 맞먹는다. 계속 눈을 뜨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릴 정도라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나마 조금 전부터 흔들림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다. 이따금 흙가루가 따갑게 튀겼으나 훨씬 나아졌다. 설마 직선일 리는 없고, 미리 파둔 구멍으로 이동하는 건가? 여하튼 지루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참을만한 수준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니 그냥 눈을 감고 잠깐 쪽잠이라도 잘까 한창 고민하고 있을 즈음.
“응?”
문득 몸이 길쭉하게 늘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니. 솟구쳤다고 해야 하나. 이어서 가볍게 내동댕이쳐지는 감각과 함께 갑자기 시야가 덜컥 고정됐다.
서너 번 눈을 깜빡이자 간신히 내가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눈앞으로 황토색 빛깔을 띤 흙모래가 보였다.
어둡지 않은 건 의외라 생각하며 나는 주섬주섬 침낭에서 빠져나왔다. 힘껏 숨을 들이켜자 축축하고 습한 대기가 아닌 텁텁한 공기가 목젖을 두드렸다.
이윽고 차분히 몸을 일으킨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첫 번째는 보스 괴물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아닌, 웬 끝없는 황무지가 보였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나 말고 다른 누군가의 음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나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는.
눈을 돌리자 왼쪽 그리 멀지 않은 거리서 땅에 쓰러진 채 양팔을 허우적거리는 이유정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한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듯한 모습이다. 설마 이유정도 같이 딸려온 건가?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죽여버릴 거야! 박동걸!
아, 안 돼…. 오빠! 오빠아아!
아아, 아아, 아아아악!
이유정은 그야말로 쇼를 하는 중이었다. 허우적거리다가, 뺨을 맞는 것처럼 고개가 휙휙 돌아가다가, 미친 듯이 도리질 치더니 종래에는 전류에 감전된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축 늘어졌다.
한편으로는 들려오는 목소리도 꽤 이상했다. 선명하게 들리는 게 아니라 흡사 머리와 가슴을 울려 전달되는 느낌이다. 혹시 누군가 있나 싶어 주변을 면밀히 살폈지만 자욱한 안개만 보일 뿐 별다른 건 보이지…. 뭐?
“……!”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방이 아닌 끝없는 황무지가 보였다. 연기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 그러할진대….
으흑…. 으흐흐흑….
또 다른 소리가 돌연히 귓전으로 흘렀다. 이번에는 김한별이었다. 오른쪽에서 몸을 웅크린 채 몹시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무어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입속말이라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 김한별의 주변에도 자욱한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겼으나 다가가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 김한별도, 안개도.
“흠.”
나는 한숨과 함께 한숨을 흘렸다.
계획의 성공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 아마 환영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환영이라.’
그건 알고 있다. 시야에 간극이 있다는 건 내게 모종의 이상함이 발생했다는 뜻일 터. 그중에서 화정의 말대로 환영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진정 의외인 건, 내가 이걸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심안과 제 3의 눈의 조합이면 어지간한 환영은 얼씬도 못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 과연? 100% 자신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
– 생각해봐.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때도 그랬잖아.
‘아…. 그때….’
확실히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은 있다. 입구를 억지로 뚫으려는 순간 반전 현상이 일어나 결계의 모든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됐고, 결과적으로 잠깐이나마 환영을 봐야만 했다. 벨페고르와 박다연 그리고 한소영의 목소리였나…? 여하튼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 그때가 반탄력으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라면, 지금은 고농축에 의한 잠식 현상 같은데?
‘고농축이라면…. 아까 연기를 말하는 건가?’
– 그렇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쌓인 향이나 연기는 절대로 무시 못 할 수준이니까. 그래도 완벽하게 걸린 건 아닐 거야. 비록 완전하게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네 능력은 확실히 신호를 보내주고 있으니까.
‘으음.’
–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걸. 아까 그 두 명은 거짓이 아니야. 서두르지 않으면 먼저 먹힐지도 몰라.
‘글쎄. 서두를 이유까지야….’
– …뭐? 그럼 게네가 당해도 좋다는 소리야?
‘그게 아니라. 굳이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싱겁게 웃은 후, 품에서 연초를 꺼냈다. 불을 붙이며 턱을 젖히자 작열하는 태양과 먼지 가득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계획이 조금 어긋나기는 했다만 딱히 안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길게 연기를 흘리며 천천히 황무지를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여러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당연히 클랜원들이었다. 과연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지가 가장 궁금하다. 설마 꼴사납게 질질 짜고 있지는 않겠지.
반대로, 무작정 쫓아오는 것도 곤란하다. 우선 냉정해져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차근차근 남은 통로를 돌파하는 것이다. 근원이 있으니 함정은 걱정되지 않으나 여타의 부분은 100% 자신할 수 없다.
…뭐, 고연주가 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마는.
그때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를 걷다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치켰다.
“……!”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놈’을 찾으러 구태여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곧 스스로 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먼빛으로 누군가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이번 에피소드도 이제 두, 세 챕터 가량 남았는데, 끝이 다가올 때마다 생각도, 고민도 많아집니다.
예전에 소설에 관해 이런 말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시작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완결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때는 사실 크게 체감하지는 못했습니다. 완결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고, 그래서 연재 전에 미리 구상을 해두고 들어갔거든요. 한데 요새 들어 조금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이 말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공부가 쉬운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먹고 살려면 공부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시놉에 기반한 플롯을 세워두기는 했는데, 왜 이렇게 미련이 생기는지요. 이건 괜찮을까, 아니 이렇게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자꾸만 눈이 가고 생각하고 손을 대게 되네요.
어느 소설이든 간에, 요새 첫 구상대로, 본인의 의도대로 완결을 내신 작가 분이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