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4
00823 “…인정 못 해.” =========================================================================
지하로 들어온 이상 낮인지 밤인지 알 수는 없다. 쉬라는 말을 들었으나 클랜원 대부분이 좌불안석이었다. 침낭으로 들어갔다가 도로 나오기 일쑤였고, 괜스레 방을 서성거렸다. 아니면 주저앉아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거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무언의 항의였다. 그러나 ‘그림자 여왕’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고연주도 얼른 구하러 가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걱정돼서 못 참겠어! 모두 준비해!’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성공 확률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되면 구출은커녕 돌파 자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전을 기해도 부족한 데 지친 몸으로 들어간다는 건 명백한 자살 행위였다. 김수현이 상시 체력을 강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간 무리한 행군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김수현은 안전이 확보됐거나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을 경우에만 강행군을 했다. 설령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다 해도 충분히 해결할만한 무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같은 행동을 하기에는…. 고연주에게는, 자신이 없었다. 김수현의 역할을 100% 수행할 자신이.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살 깎아 먹는 짓만 안 할 뿐.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비로소 고연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레 사체를 짓밟으며 근처를 둘러보니 모두가 눈을 흘깃거리고 있다. 고연주가 입을 열었다.
“하연 씨. 연락은 어떻게 됐나요?”
“쉰 두 번을 했어요. 한 번도 받지 않아요.”
어느새 정하연의 얼굴은 예의 평정을 되찾았다. 통신 수정을 일그러뜨리려는 듯이 쥐고 있었지만.
고연주는 시선을 돌렸다. 임한나는 벌써 천막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카오스 미믹 하나가 보이지 않아요. 구멍으로 같이 딸려 들어간 것 같아요.”
“그건 아까 들었고.”
“그 외에는 딱히….”
“좋아. 그럼….” 이라 말한 고연주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준비해.” 라는 말이 나온 순간 클랜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했다. 눈 깜짝할 사이 야영지가 정리됐다. 꺼진 모닥불이 검고 흐릿한 아지랑이를 올리는 가운데, 원정대는 문을 마주 보고 섰다. 선두에는 임한나가 고연주, 남다은, 진수현은 삼각 진을 형성하고 마법사들은 근원을 둘러싸는 형태로 중앙에 포진했다.
임한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얼굴이었다. 잔뜩 긴장한 손으로 살그머니 문을 밀어젖혔다. 곧 입구가 짐승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지는 걸 시작으로 마침내 8인의 원정이 재개됐다.
고연주의 우려와는 다르게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휴식을 취한 게 유효했다. 몸의 회복은 물론, 쉬는 동안 각자 속을 추스른 것이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 마력을 가득 채운 근원은 적재적소에 전장 분석을 사용했고, 고연주도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길을 이끌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원정대는 짧은 시간에 적잖은 거리를 행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아갈수록 클랜원들의 안색도 처음보다 나아졌다. 꽉 조여 터질 것 같던 긴장이 부드러이 완화된다. 처음에는 은근히 자신 없어 했지만 직접 부딪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초조한 근심은 점차 사라지고 희망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계속 이렇게만 갈 수 있다면….”
조심스러운 어조이기는 했으나 이제는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비록 가슴 한 켠의 무거움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클랜원들은 희망찬 얼굴로 행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놈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
걸음을 옮길수록, 아니 ‘그것’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풍경도 서서히 변화했다. 모래바람 흩날리던 황무지는 어느 순간 붉은빛과 어둠이 뒤섞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축축하면서 습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누군가 막막히 지르는 울부짖음이 귀를 간질인다. 나는 어느새 어둑어둑한 감옥 통로를 걷고 있었다. 흡입한 연기를 길게 뿜으며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흐릿한 연기가 사라지고, 비로소 그것이 모습을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연갈 빛 머리카락이었다. 칼에 썩둑 베여 떨어졌는지 사선으로 베인 결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다. 천천히 눈을 들자 금세 주저앉을 듯 부르르 떨리는 종아리가, 붉은 핏물과 허연 진액으로 뒤범벅된 국부가, 채찍 자국이 가득 새겨진 불룩한 유방과, 그렁그렁한 갈색 눈동자가 차례대로 들어온다. 여인은 벽에 묶인 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성스러운 여왕’ 유현아였다.
“당신 때문이에요….”
“흠?”
“김수현, 너 때문이라고!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부랑자한테 이렇게…!”
“아니. 부랑자가 아니지.”
나는 머리를 흔들며 단호히 말을 끊었다.
“이 광경은…. 그렇지. 이스탄텔 로우에 패배한 이후의 기억이지. 부랑자한테 당한 건 네 입으로 듣기는 했는데 직접 본 적은 없거든.”
“…….”
“어때. 네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아?”
“……!”
찰나의 순간, 유현아의 두 눈이 샐쭉하게 가늘어졌다. 이어서 눈앞의 광경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소멸했다. 나는 절반쯤 탄 연초를 물고 걸었다. 그러나 얼마 걷지도 않아 다시 한 번 풍경이 변화했다. 싱그럽고 푸릇한 초원에 익숙한 사내가 털썩 쓰러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나를 보며 힘겹게 손을 뻗는다.
“수현아….”
이번에는 형인가.
– 이번에도 더미(Dummy)네.
알고 있다. 복부에 구멍 뚫린 건 잘 구현했지만, 주변 풍경이 이래서야 웃음만 나온다.
“너 왜 내 말을…?”
형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나는 걷는 그대로 지나쳤다. 어차피 더미인 이상 볼 일은 없으니까.
“어디 가는 거냐! 돌아와! 돌아와서 나를…!”
“싫다 이놈아.”
“뭐, 뭐라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놀고 있네. 그 장소가 이렇게 싱싱하고 향기로운 줄 아냐? 제대로 읽고 구현하던가.”
코웃음 치며 대꾸하자 목소리도 뚝 끊겼다. 그놈도 이제 슬슬 열이 오르지 않으려나.
– 야. 너 지금 뭐 해?
‘뭐가?’
– 아니 걸려든 척을 해도 모자랄 판에 조롱하면 어떡해?
‘더미라며?’
– 그러니까. 네가 걸린 척을 해야 본체가 기어 나올 거 아냐.
‘그것도 좋지만 도발해서 나오게 하는 방법도 있잖아. 더미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화정도 나름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이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
세 번째 환상은 어떤 전조도 보이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갑작스레 캄캄해졌다. 이윽고 10미터 앞을 바라본 순간 우뚝, 걸음이 정지됐다. 본능적으로 끓는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클랜 로드?”
거의 전라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한소영이 기둥에 묶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갑옷은 온데간데없고, 넝마에 가깝게 찢어진 옷은 간신히 몸을 군데군데 가리고 있다. 동공이 풀린, 이지를 상실한 듯한 눈동자를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수현아….”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손에 쥔 연초를 떨구고 말았다. 아차 했으나 이미 늦었다. 한소영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으니까. 실수라면 실수였다.
…라고 생각하겠지?
– 진(眞). 네 말이 맞았네.
화정의 확인 사살.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나는 곧장 이형환위를 사용해 한소영의 뒷공간을 점거했다.
“결국…. 와줬네…?”
한소영이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아직 남아 있는 내 잔상을 보면서. 나는 ‘예.’ 라고 말하는 대신, 희고 고운 목덜미를 향해 망설임 없이 팔을 뻗었다. 잔상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과 한소영이 치뜬 눈으로 돌아보는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수…! 키에에에에에에엑!”
세게 목을 움키자 한소영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짐승 멱따는 소리가 터졌다. 놈은 미친 듯이 꿈틀거리면서 빠른 속도로 희미해졌다. 아마 황급히 도주하려는 것 같았으나,
– 어딜!
화륵, 화르르륵! 놈의 움직임을 알아챈 화정이 바로 불꽃을 뿜어 탈출을 저지했다.
이윽고 염화(炎火)에 살라 먹힌 한소영의 모습이 점차 사그라지고, 동시에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도 사라졌다. 그 대신 물컹물컹한 젤리 같은 것이 손아귀에 한가득 잡혔다. 어느새 손에는 표면이 일렁일렁 물결치는 허연 덩어리가 잡혀 있다. 이놈이 바로 사멸 무저갱을 총괄하는 ‘환상의 도플갱어(Vision’s Doppelganger)’인가.
이윽고 놈은 별다른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잿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보통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쉬운 놈은 아니다. 상대의 기억을 읽고 환상으로 비약하는 능력이나, 스스로 침투해 상대의 정신을 무너트리는 능력은 상당히 무서운 편에 속한다. 김한별과 이유정도 끽소리 못하고 무너지지 않았는가.
단. 나와 상성이 몹시, 굉장히 안 좋았다. 심안과 제 3의 눈의 조합을 뚫은 건 인정하지만 결국에는 그뿐. 내가 환상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이놈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잠시 후.
키에에에에에….
단말마의 비명치고는 작은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는 한 줌 재로 변해 분분히 흩날린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주변은 희멀건 한 연기가 자욱이 흐르고 있다. 비로소 진짜 은신처로 들어온 것이다.
좋아. 이로써 사멸 무저갱의 공략을 완료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차분히 인근을 둘러봤다. 하나 의외인 건 방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 그러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천장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내려오고는 있으나 연기 때문인지 시야가 상당히 제한된다.
연기를 걷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우선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강화한 안력으로 바닥을 면밀히 살폈다.
김한별과 이유정은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었다. 허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유정은 눈이 까뒤집힌 채, 허리는 있는 대로 들어 올려 푸들푸들 떨고 있고, 김한별은 흡사 실 끊긴 인형처럼 온몸을 대자로 누워 벌려 있다. 죽은 생선 같은 눈동자가 유난히 눈에 밟힌다. 이 둘은 과연 어떤 환상을 보고 있으려나.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느긋한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체 않고 다가가 한 명씩 정화 작업을 시도했다. 화정의 힘을 흘려 넣으려 손을 대자, 그제야 애들의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꽤 격한 환상을 보는 중인 것 같다.
그렇게 정화 작업을 마치고 나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드러운 흙이 아닌 딱딱한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차피 본체를 쓰러트린 이상 각성(覺醒)은 기정사실이다. 그저 깨어나는 시간을 앞당겼을 뿐.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김한별과 이유정이 차례대로 정신을 차렸다.
아마 요리조리 비틀거리며 ‘여, 여기는…?’ 따위의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둘은 후닥닥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몽롱하고도 서글픈 눈으로 고개를 휘휘 돌렸다.
“그래. 몸은 좀 어때.”
이윽고 가볍게 말을 꺼낸 순간, 두 쌍의 눈동자가 번개처럼 내게 꽂혔다.
그리고,
“…오, 오빠.”
망연히 나를 보던 김한별의 눈에서 돌연 눈물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고,
“…오빠?”
이유정도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흐윽흐윽,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괴물도 처치해줬겠다. 기껏 깨워줬건만 왜 울어.
“오빠하아아앙….”
“오부으아어엉….”
그러나 속을 채 추스를 틈도 없이 김한별과 이유정은 엉금엉금 기어와 함께 내 품으로 안겼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흐느끼고, 구슬프게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하염없이 눈만 끔뻑거리다가, 이내 양손으로 두 여인을 감싸 안으며 말없이 토닥였다. 아마 당치도 않은 악몽을 꿨을 거라 생각하면서.
============================ 작품 후기 ============================
Q 1. 1 + 1 = 2(X)
Q 2. 1 + 1 = 3(O)
Then,
Q 3. 1 + 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