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6
00825 Magician Hunter, Returned. =========================================================================
김수현이 ‘연락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한 후 방은 고요한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사실 이렇게 있어 봤자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기다리는’ 것만 가능할 뿐.
워낙 강력히 말한 것도 있지만, 애초 둘은 김수현의 말을 거역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김한별이 김수현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 ‘기다리는 동안 식사나 식수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라는 말에는 조금 반응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쓸데없는 노력이었다. 원정에 챙겨온 두 개의 카오스 미믹 중 하나가 이유정의 침낭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두 남녀는 왜 이게 이유정의 침낭에 있는지 궁금해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먼 산을 쳐다보며 모르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식(食) 문제를 해결한 후 세 명은 방을 돌아다녔다. 곳곳에서 찾아낸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장치나, 총 두 방에 쌓인 성과들을 보고 잠시 떠들 수는 있었다. 그러나 효능을 모르는 이상 그림의 떡이었다. 카오스 미믹에 구즈 어프레이즐은 없었다. ‘저주가 걸려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라는 말이 나오자 두 여인은 학을 떼며 물러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럼 원정대가 우리를 찾기 전까지는, 오빠랑 데이트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입을 오물거리며 히히 웃는 이유정을, 김한별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오빠 속도 모르면서.’
김한별은 카오스 미믹에서 꺼내온 말린 육포를 주워 먹으며 눈을 돌렸다. 방 안에는 일찍이 식사를 끝낸 김수현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갑옷을 벗고 등을 대고 누운 채 한 손에 쥔 통신용 수정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이따금 눈을 감으며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낯빛은 담담하기 그지없으나 행동에서 알 수 있다. 적어도 김한별은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연락 한 통만 하시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서도, 한편으로는 김수현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말을 듣는 내내 가슴이 뜨끔했다. ‘인정 못 한다.’ 는 말이 비단 원정대만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이유정은 물론, 머셔너리 클랜 전체를 겨냥한 말이었다. 어쩌면 클랜원 중 유일한 ‘EX 등급’인 안솔은 제외일지도 모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쉬울 게 없는 원정대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내로라하는 사용자이며 어딜 가든 한 무리를 이끌만한 능력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면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실제 원정 내용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김한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유정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오빠.”
탕, 문이 닫히자 김수현이 휘둥그런 눈으로 바라본다.
“또 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히 구하러 와줄 거예요.”
“…응?”
“한 명도 잃지 않고, 모두.”
멀뚱히 바라보던 눈동자가 멍해졌다. ‘뭔 헛소리냐.’ 가 아닌, 의외라는 기색이 강하다. 김한별은 까닭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김수현은 느릿하게 품속으로 구슬을 집어넣었다. 깍지 낀 양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며 싱겁게 입을 터뜨렸다. 하나 분명한 건, 미미하게나마 웃었다는 것.
“그래…. 고맙다.”
고맙다, 는 말이 나왔다.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말이었다. 이 말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김한별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조르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것만’.
잠시 후, 마주 미소 지은 김한별이 스리슬쩍 김수현의 옆으로 드러누웠다. 갑옷을 벗어서 그런지 진한 남성의 냄새가 콧속을 훅 찔렀다.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이번 기회를 틈타 해결할 일이 하나 있었다. 이유정의 말대로, 아틀란타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쯤 한창 고생하고 있을 원정대한테는 미안하지만, 김한별로서는 몹시 오랫동안 기다려온 회답이었다. 그렇기에 놓칠 수 없었다.
“그런데요.”
쿵쾅쿵쾅, 미친 듯이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추스르며 김한별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혹시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응? 무슨 말?”
역시 잊고 있었다. 김한별은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사랑해요.’
‘오빠, 사랑해요.’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들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입장이 확실해진다. 받아들여 줄지, 아니면 이만 포기하고 새로운 인연을 찾을지.
“그 차원으로 끌려갔을 때…. 이 세상으로 돌아오면, 말씀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
“그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
끔뻑끔뻑,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던 두 눈이 한순간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조용히 반응을 지켜보던 김한별은 예의 쌀쌀맞은 눈동자로 팔짱을 꼈다. 빤한 눈초리에 김수현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허겁지겁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천하의 김수현도 지금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하, 한별아. 그게 말이다.”
쾅!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한별은 반사적으로 입을 짓씹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
흡사 무법자와 같이 등장한 이유정은 가깝게 붙어 있는 두 남녀를 보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대로 점프, 김수현의 남은 옆자리를 차지했다.
“무슨 말인데? 나도 들어도 되지?”
그리고 김수현의 옆에 찰싹 붙으며 천연덕스레 종알거렸다. 김한별은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언니. 혹시 ‘넌씨눈’이라는 말 아세요?”
“그럼 너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 알아?”
“그럼…!”
“그만, 제발 그만 해.”
파츠츠츳! 둘 사이로 무형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하니 김수현이 급히 중재에 나섰다. 둘을 한 번씩 쳐다본 후, 침착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우선 너희 둘 다 자는 게 좋겠다. 너무 힘들어 보여.”
아닌 게 아니라, 각자 환상을 겪고 나온 두 여인의 낯은 피로가 가득히 그늘지어 있었다.
*
정하연의 선공으로 원정대와 벌레의 전투가 서전(緖戰)을 알렸다. 근접 계열은 마법사를 중심으로 서서 방진을 갖추고 있었다. 진수현은 칼을 땅에 세게 부딪혀 묻은 체액을 털어냈고, 정하연은 지팡이를 겨눈 채 곧바로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벌레들은 꿈틀꿈틀 물 흐르듯 다가오는 중이었다. 이윽고 놈들이 쩍 아가리를 벌리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본격적인 전투의 신호탄이 울렸다.
“크윽!”
진수현은 자신이 맡은 쪽으로 흘러오는 놈들을 향해 쉬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왜…. 왜 이렇게 힘들지?’
힘들다, 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단순한 체력 부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러나 전혀 반갑지 않은 낯선 감각이다.
분명 별것 아닌 놈들이다. 일대일로 붙으면 벌레보다 진수현의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자고로 물량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이건 현재 원정대 전원에 통용되는 말이었다. 아무리 사용자 정보가 뛰어나도, 워낙 수적으로 밀리는 탓에 차차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눈 감고, 호흡 멈추고, 귀도 막아요!”
그때 제갈 해솔이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직접 맞서 싸우는 근접 계열한테는 자살하라는 소리였으나 진수현은 빠르게 물러나며 순순히 말을 따랐다. 이렇게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는 마법사의 지시를 따라도 하등 나쁠 게 없었다. 오히려 생명줄이 될 가능성이 높다.
“────! ────!”
제갈 해솔이 무어라 크게 소리 질렀다. 대부분 귀를 막은 터라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찡하고 이명이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번쩍 눈을 뜨자 눈앞으로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하는 벌레들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마법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시간 없어요! 어서!”
그 말이 들린 순간 진수현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벌레들은 마치 누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진수현은 마음껏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딱딱한 껍질을 자르는 게 약간 버거웠지만, 아직 여력은 남아 있던 터라 삽시간에 열 마리를 깡그리 눕힐 수 있었다. 그때였다.
“끄어어어어어어엉!”
살짝 여유가 생기려는 찰나 구슬픈 비명이 귀를 때렸다. 비비앙이 소환한, 한쪽을 막고 있던 사티로스가 휘청휘청 무너지고 있었다. 막 정신을 차린 벌레들에 둘러싸인 채 온몸을 물어뜯기는 중이었다. 전신에서 흐릿한 연기를 줄줄 흘리는 것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으아아악! 야! 도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야!”
비비앙이 방방 뛰었다. 진수현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직감했다. 제갈 해솔의 말을 듣지 않은 사티로스도 마법의 영향에 들어간 것이다. 애초 마수는 소환사의 명령밖에 따르지 않으니 누구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진수현은 재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우선 맡고 있는 왼쪽은 가장 벌레가 적었다. 정면은 고연주가, 후방은 남다은이 막아내고 있다. 근처에는 스물이 넘는 사체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나 벌레들은 아직도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잠시 후, 검은 연기가 불처럼 타오르며 사티로스가 역 소환됐다. 진수현은 더 볼 것도 없이 땅을 박찼다.
“닥치고 빨리 소환이나 해!”
이를 가는 비비앙을 세게 밀친 다음, 물밀듯 밀려오는 벌레들을 마주했다. 이내 맞부딪치지 직전,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 수 발의 불덩어리가 정확히 벌레 무리에 내리꽂혔다. 진수현의 지원을 인지한 근원이 타이밍 좋게 지원 사격을 날린 것이다.
콰콰콰쾅! 고막을 흔드는 폭음과 함께 두꺼운 불기둥이 치솟는다. 그러나 그런 불길을 뚫고 튀어나오는 놈들도 확실히 있었다. 특히 몇몇 놈은 전신이 노릇하게 익었으면서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진수현도 이를 악물며 칼을 내리쳤으나 껍질을 반쯤 파고드는 선에서 멈췄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칼날이 날카로운 예기를 잃었다.
텅!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갑자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약 50센티미터는 될까. 바로 옆에서 벌레가 미친 듯이 주둥이를 움직이며 무언가를 갉아먹고 있다. 누군가 때맞춰 보호막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유효타를 허용했을지도 모른다.
“젠장…!”
그러나 진수현은 당황하는 대신, 보호막이 유지되는 동안 적을 처리하는 길을 선택했다. 지금껏 아끼고 아껴둔 마력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진수현이 괴성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사방으로 검광이 번뜩이고, 곳곳에서 체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야말로 기병 돌격을 방불케 하는 돌진에, 벌레 무리가 모세의 기적처럼 반으로 갈라진다. 진수현은 어느새 호흡도 잊은 채 사방팔방 검을 뿌리고 두드렸다.
한바탕 미친놈처럼 날뛰니 공격이 조금 시들해진 것 같기도 했다. 진수현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전신이 갈라지고 터진 벌레의 사체가 그득했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형님만 있었다면….’
전투 와중 한 번쯤 김수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형님만 있었다면 이까짓 놈들쯤 모조리 쓸어버렸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 현 상황을 낯설게 느끼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동안 김수현이 맞서왔던 놈들은 이런 하찮은 벌레 따위가 아니다.
악마 14 군주, 쿠샨 토르, 아스트랄 차원, 고대 악신…. 훨씬 더 강한 놈들 앞에서, 정말 이길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드는 놈들 앞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클랜원들을 이끌었고, 끝끝내 승리했다.
‘내가 그때 뭘 했더라?’
스스로 자문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
한 게 없다는 소리다.
탁 까놓고 말하면, 그냥 구경만 했다. 끼어들 수준의 전투가 아니라는 같잖은 이유로, 김수현의 목숨을 건 전투를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한 적도 있었다.
“킥.”
…그래서, 우스웠다.
형님은 그렇게나 강한데, 누구는 고작 이런 벌레 앞에서 헉헉대고 있는 꼴이라니.
‘형님도…. 이런 기분이셨나?’
입이 벌어지고 허연 이가 드러났다. 숨이 차서 그런지 침이 자꾸 고여 뚝뚝 떨어졌다. 진수현은 합, 입을 닫으며 떨리는 숨을 추스르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앞쪽에서 새로운 벌레 무리가 출현을 알렸다. 사각사각,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면서.
“…빌어먹을!”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벌레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계속 수를 불렸다.
“비비앙! 도대체…!”
진수현은 황급히 뒤돌아보며 으르렁거렸으나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수는 이미 소환된 상태였다. 군단장뿐만 아니라 군단 전체가 소환됐다. 그러나 마수 군단은 어느새 자신이 비워둔 왼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
이상함을 느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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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적고 싶은 파트가 나왔군요.
무엇이냐고요?
하하.
속ㄷㄷ내ㅡ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