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7
00826 Magician Hunter, Returned. =========================================================================
“으윽…!”
김한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호흡이 헐떡거리고 등은 땀으로 젖은 것이 흡사 악몽이라도 꾼 듯한 모양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끊임없이 쓸어내린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김한별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쳤다. 누군가를 찾는 걸까. 주변이나 침대 아래를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김수현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 문을 열고, 이내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 순간 김한별의 걸음이 멈칫했다.
“…언니?”
문밖에는 선객이 있었다. 이유정이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하나 특이한 건, 어딘가 굉장히 아파 보인다는 것이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것이 금세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세요?”
이유정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마침…. 잘 나왔다.”
끓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간신히 김한별을 돌아본다. 그리고 힘없는 손놀림으로 느닷없이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김한별이 주춤했다. 갑자기 옷을 벗어서이기도 했지만,
“언니….”
투명하고 진득한 액체가 내려가는 바지를 따라 쭉 늘어졌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음부는 물론, 훤히 드러난 허벅지 안쪽도 흥건히 젖어 있다. 게다가 속옷의 중앙 부분은 숫제 샛노란 빛으로 흠뻑 얼룩진 상태였다. 은근히 풍겨오는 열기에는 미미한 지린내도 섞여 있었다. 김한별이 낯을 찡그렸다.
“…쉬했어요?”
“아니. 요실금.”
“그게 그거죠.”
“침대에서 싼 거 아니거든?”
“그럼….”
“닥치고 물 좀 내놔봐. 빨아야 할 것 같으니까. 찝찝해 죽겠어.”
이유정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김한별은 바지와 속옷을 벗고 쭈그려 앉는 이유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깐 낯에 갈등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곧 자신의 어깨로 살그머니 손을 올렸다.
“물 좀 달라니까…. 응?”
사르륵, 사르륵. 로브와 바지가 차례대로 흘러내렸다. 이유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줍은 듯 오므린 양 가랑이 사이, 새하얀 속옷이 푹 젖다 못해 축축해 보일 지경이었다. 속옷을 끌러내리니 꾹 닫힌 음부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점점이 적셨다. 이내 맞은편에 쭈그려 앉는 김한별을, 이유정은 묘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너도냐?”
“…….”
“무슨 환상이었는데?”
“언니 먼저 말하면 나도 말해줄게요.”
그렇게 말한 김한별은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치사하다고 중얼거렸으나 손끝에서 물줄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얼른 바지와 속옷을 가져왔다.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김한별의 것까지.
얼마의 침묵이 흘렀다. 두 손으로 옷가지를 꾹꾹 짜내고 비틀던 이유정이 돌연 푹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모기만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과의례였어.”
“통과의례요?”
“그래, 통과의례. 거기서 박동걸이라는 새끼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죠. 그 야비한 놈을 어떻게…. …언니, 설마.”
무언가 깨달은 듯한 목소리. 여전히 아래를 보는 채로 이유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진짜 존나게 따먹혔어. 무려 일주일 내내.”
김한별이 남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씨발, 무슨 레스트 룸이 조교실이야?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였는데. 그렇지?”
이유정은 찢어질 듯 옷가지를 비틀었다. 억지로 밝은 척하기는 했지만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어느새 어깨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렇지?’ 라는 말이 김한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굳이 말을 꺼낸 이유가 어쩌면 동질감을 느꼈거나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쓱쓱, 손등으로 눈을 비빈 이유정이 코를 훌쩍 들이켰다. 김한별이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까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건 척한 거지. 괜찮은 척.”
“왜요?”
“생각해봐. 오빠가 그렇게나 괴로워하시는데…. 더 징징댈 분위기는 아니었잖아.”
김한별의 눈에 새삼스럽다는 빛이 돌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설마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문득 이유정이 눈을 들었다. 발개진 눈으로 김한별을 응시한다.
“그래서, 너는?”
“네? 아. 저, 저는 뭐….”
“뻥 칠 생각은 하지도 마. 자면서 끙끙대는 소리 다 들었으니까.”
“…상납이요.”
김한별은 눈 딱 감고 실토했다. 이유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납? 혹시 성 상납 말하는 거야?”
“잘 아시네요.”
“머셔너리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 누가.”
“…머셔너리가 아니라, 그전이요.”
이유정이 아, 탄성을 터뜨렸다. 김한별의 전 클랜을 기억해낸 것이다. 흘끗 눈을 올린 김한별은 우울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언니보다는 낫네요. 저는 체감상 나흘이었으니까.”
“이런 거에 낫고 말고가 어딨어. 아무튼, 나는 여기 나가면 박동걸 그 새끼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야. 기필코.”
“그거야 언니 마음 이기는 한데…. 그런데 그때 왜 그렇게 처음부터 각을 세운 거예요?”
“내가 현대에서 경찰대 준비하다 왔다고 말했지? 그 새끼가 자꾸 솔이 흘깃거리는 거 보니까 딱 촉이 오더라고. 모르긴 몰라도, 그 새끼 분명 범죄자 출신일 거야.”
이유정은 속옷을 탁탁 털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뒷담화를 곁들인 빨래가 끝난 후, 한쪽에 옷을 잘 펴놓은 두 여인은 함께 탁자에 걸터앉았다. 여분이 옷이 없어 의도치 않게 하의가 실종된 상태였다. 김한별은 부끄러운 듯 상의를 벗어 하반신을 감쌌지만, 이유정은 스스럼없이 가랑이를 벌리며 종아리를 흔들거렸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잘 있으려나…. 걱정되네.”
“잘 있겠죠. 길은 근원이가 있고, 여차하면 비비앙 씨의 군단도 있고….”
“그래도. 있잖아, 우리 오빠 몰래 연락할까?”
“절대로 안 돼요.”
김한별은 딱 잘라 거절했다.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시계추처럼 앞뒤로 흔들리던 이유정의 다리가 우뚝 멈췄다.
“왜?”
“안 그래도 오빠 고민 많은 것 같던데….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요. 오빠 화나면 무서운 거 몰라서 그래요?”
“흠. 이번에는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됐어요. 그냥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게 최선이에요.”
이유정은 젖힌 고개를 도로 내렸다. 한동안 앞을 망연히 응시하더니 홀연히 입을 열었다.
“글쎄.”
“…글쎄요?”
“아니. 과연 그게 최선일까 싶어서.”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불현듯 이유정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잖아. 나는 잊고 싶은 게 있고, 오빠도 그렇고. 아, 말이 좀 이상한가?”
“엄청나게 이상해요.”
“그, 러, 니, 까. 나나 오빠나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데…. 나 이번 원정만 끝나면 잘하면 B 등급으로 올라갈 것 같거든?”
“그, 그래서요?”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걸까. 김한별이 말을 더듬으며 반문했다. 그러자 이유정의 눈매가 오묘한 호선을 그리는 동시, 살며시 옆을 흘겼다.
이유정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나 부탁 하나만 좀 하자.”
*
한편, 같은 시각.
“뭔, 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순간에는 사방, 아니 팔방(八方)이 벌레들로 빽빽이 에워싸여 있었다. 열, 스물, 마흔, 여든…. 가히 셀 수도 없을 물량으로 완벽하게 둘러싸였다. 퇴로는 모조리 차단됐다. 더욱 놀라운 건, 벌레 무리는 아직도 출현 중이라는 것. 어느새 기백(幾百)은커녕 갑절은 될 듯한 놈들이 동족의 시체를 덮고 끊임없이 꾸물꾸물 기어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진수현이 머뭇거린 순간, 벌레 무리는 동시에 S자를 그리며 돌진을 시작했다.
콰르르륵, 콰르르륵! 일여덟 마리 수준이 아니다. 최소 서너 배에 달하는 놈들이 한꺼번에 몰아쳐 오는 광경은, 한껏 분노한 검은 해일이 덮쳐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새로운, 더 많은 물결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이대로 집어삼키겠다는 듯 아가리를 쩍 벌리는 성난 파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졌다.
‘이건…. 도저히….’
결국 기세에 압도당한 진수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물러나기도 전, 벌레들은 신속히 진수현을 에워쌌다. 맹목적인 악의에 뒤통수가 시큰거린다. 좌우는 물론, 후방까지 점거당했다. 거의 끝났다고 여겼건만. 여태껏 상대한 놈들만 족히 천을 넘을지 모른다. 한데 아직도 이 정도나 남아 있을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터.
사방은 고함과 쇳소리로 가득했다. 곳곳이 아수라장이다. 어느 한 군데도 여유롭지 않다. 이미 중앙도 침범당한 지 오래였고, 비비앙와 임한나가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저지조차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어디 하나 지원을 요청할 상황이 아니다.
“…….”
‘끝’을 느낀 걸까. 멍하니 앞을 바라본 진수현은 순간 이를 악물며 칼을 휘둘렀다. 벌레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상반신을 일으켜 쏜살처럼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보호막을 번뜩이는 이빨로 갉아먹기 시작했다.
수가 좀 적었다면. 아니, 지쳐 있지 않았다면. 아니, 마력만 충분했다면. 하다못해 퇴로라도 트여 있었다면. 최소한, 버티기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을 끌어안은 진수현은 그야말로 그로기(Groggy)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대여섯 마리를 쓰러트리며 분전했지만, 최후의 보루였던 보호막은 ‘파각!’ 소리와 함께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이어지는 일까지 막을 도리는 없었다. 진수현은 미친 듯이 칼을 뿌렸으나 목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여러 군데를 물어뜯겼다.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악착같이 달라붙는 놈을 내리찍었으나 상처는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경기공(硬氣功)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갑작스레 천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한 박자 늦게 몸이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털썩, 고슬고슬한 감촉이 등과 맞닿았다. 체액으로 젖은 흙은 차갑고 축축했으나 진수현은 그 어느 침대보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각을 느꼈다. 시커먼 무리가 이불처럼 몸을 덮어온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편안한 암흑으로 변했다.
“진수혀언!”
비비앙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방진이 무너져 버티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누군가의 위로 겹겹이 쌓이는 벌레 무리를 보며 소리쳤다.
“꺼내와! 꺼내오란 말이야!”
황급한 목소리에 군단장과 십수 마리 마수가 돌아섰다. 거대한 낫을 붕붕 돌리며 벌레를 걷어차고 베는 등 안간힘을 다해 혈로를 뚫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수현은 외부의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뜨겁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힘없는 몸부림만 칠뿐이었다.
‘여기는….’
눈앞은 암흑.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다.
잠시 후, 전신을 태우는 뜨거운 감각조차도 발목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죽는 건가….’
진수현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죽어간다는 사실을.
‘죽는다.’ 는 감각. 신기하게도 생각한 것처럼 그리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다. 아니.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진수현의 몸을 가득 채우는 감정은 두려움도, 통증도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
허탈함.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했으나 죽음은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이 간극에서 느껴지는 허무함은 여타의 감정을 깡그리 몰아낼 만큼 강렬했다. 한편으로는 가슴 터질 듯이 갑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걸까. 어쩌면 이미 감겼는지도 모르지만 진수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돌연히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어른 떠올랐다.
‘아라?’
아니. 맹아라는 아니었다. 차가운 눈동자, 건장한 몸, 칠흑색 갑옷, 붉은 망토…. 느닷없이 스친 회상은 분명 김수현의 모습이다. 진수현은 희미하게 자조적으로 웃었다.
‘형님만…. 형님만 있었다면….’
후회의 순간,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문득,
‘…왜?’
최후의 의문이 찾아왔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 상황에 관한, 자신을 눕힌 벌레 대한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오롯한 격분이다. 또한, 누구도 아닌 진수현이기에 느낄 수 있는 분노이기도 했다.
일찍이 진수현은 천사의 계획 아래 포스트 김수현으로 키워졌다. 도중에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때의 진수현은 분명히 리더였다. 따라다니는 처지가 아니라 중심적인 위치에서 동료를 이끌었다. 비록 만들어진 상황일지라도, 위기 때는 항상 선두로 나서 처리했다. 그래. 그랬던 진수현이다.
그러할진대.
‘언제부터….’
비로소 깨달은 순간, ‘그것’은 서서히 느껴졌다.
‘내가, 언제부터…!’
죽음 직전, 조금씩 심지를 좀먹던 불길이 일순간 크게 발화(發火)하며 미친 듯이 도화선을 불태웠다.
진수현의 얼굴이 분노한 짐승처럼 일그러졌다.
‘…인정 못 해.’
그렇게 생각한 찰나.
“진수혀어어어어언!”
애달픈 비명과 동시, 공교롭게도 눈앞을 가리던 어둠이 걷혔다. 트인 시야로 무언가 투박한 것이 뻗어온다. 갑자기 되찾은 시력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진수현은 순간적으로 마주 손을 뻗어 그것을 굳게 맞잡았다.
잠시 후, 파묻혀 있던 몸이 강제적인 힘에 의해 허공으로 딸려 올라갔다.
그리고.
============================ 작품 후기 ============================
아니, 10회 후 각성이라니요…. OTL
어제 회 기준으로, 2회 후 각성입니다. ㅜ.ㅠ
여하튼 이 파트도 끝났고, 아마 다음 파트가 이번 에피소드의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아, 그나저나 고민입니다.
고백하자면 좀 약해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베드 신을 써보고 싶은데, 자꾸만 야하게, 야한 쪽으로만 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아무래도 수련이 부족한 것 같아요.
요새 음란마귀가 끼어서 그런가요….
어쨌든 마음을 다스려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