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9
00828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
“────. ────.”
우우우우우우우웅!
영창을 끝낸 근원이 혼돈의 솜니움을 들어 올리자 허공의 마법 진들이 격렬히 공명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진의 회전이 멈추고, 진동도 멈췄다. 그리하여 모든 소음이 완전히 잦아들었을 즈음, 마침내 진의 중앙서 각양각색의 마법이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꺼번에 사출된 어마어마한 마법이 눈 깜짝할 새 벌레 무리를 뒤덮었다.
이상함을 느낀 벌레들은 급히 흩어졌으나 이미 한참 늦었다. 각각 형상과 빛깔이 다른 마법들은 흡사 빗발치듯이 쏟아져, 모조리 작렬했다.
세찬 폭음이 귀를 때리고 흙 연기가 자욱이 터졌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다. 임한나의 기원(祈願)은 후드득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빛의 화살을 떨어트렸고, 비비앙도 최후의 마력을 쥐어짜내 기어코 제 4군단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윽고 마수들이 사방으로 달려들어 가는 것을 시작으로, 상황은 혼전으로 빠져들었다. 이것은 벌레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제껏 압도적인 수를 바탕으로 쉴 틈 없이 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깨질 듯 말 듯 위태위태하던 상대가 갑자기 거세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반항을 한참이나 넘어선, 상황이 반전될 정도의 무시무시한 반격이다.
화르르륵,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는다. 우왕좌왕하던 놈들은 시시각각 옮겨붙는 염화에 휩싸여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로 제 4군단의 마수가 뛰어들어 헤집으니 당연히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벌레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근접 계열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그때였다. 천장에서 마구 쏟아지던 마법이 돌연 뚝, 끊겼다. 허공을 오색찬란한 색으로 밝히던 빛무리도 시들해졌다. 마지아(Magia)의 마법 진이 일시에 희미해지고, 공중을 부유하던 근원은 땅으로 추락해 하릴없이 쓰러졌다. 그로기(Groggy) 상태. 이제는 손 하나 움직이기도 어려울 만큼 온 기력을 소비한 것이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하던 폭격이 끊기자 벌레들도 조금씩 기세를 일으켰다. 그러나 원정대는 입을 열기는커녕 무서우리만치 집중했다. 왜냐면 전원 느끼고 있었으니까. 간신히 잡은 이 승기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금 여기서 싸우는 모두가 남은 기력을 남김없이 쏟아붓고 있다는 것을.
결국에는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의 싸움이다. 이 최후의 여력이 다하는 순간,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상황은 점차 난전을 넘어 아수라장으로 치달렸다. 진정으로 어지러움의 절정을 달리는 격전이었다. 사방에서 괴성이 난무하고 폭음, 굉음이 어우러졌다. 천장까지 치솟은 흙 연기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만들었고, 가끔은 통로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벌레, 사용자를 구분하지 않고 덮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끝이 보이지 않던 전투도 서서히 끄트머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벌레의 사체가 산처럼 쌓였으나 무너지는 사용자도 하나둘 늘어났다. 마력을 한계까지 소비한 마법사들은 대부분 쓰러졌지만, 기절한 건 아니었다. 약간이라도 마력이 모이는 족족 주문을 외워 날리고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남은 사용자들도 이를 악물며 악착같이 싸워나갔다. 임한나는 반쯤 주저앉은 자세에서도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고, 남다은은 전신에 상처를 입고서도 벽에 기댄 채로 부단히 검을 움직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끝끝내 버티던 비비앙이 허물어지자 제 4군단도 차차 소멸하기 시작했다. 이미 첫 소환에 비해 삼 분의 이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지만, 공간이 어느 정도 트이며 전황이 정리된다. 간신히 눈동자를 굴린 비비앙은 엎드린 채로 웃었다.
푹! 땅에서 꿈틀거리던 벌레를 내려찍은 진수현은 있는 힘껏 머리를 치켰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젖히며 검붉은 액체를 흩뿌리고, 닫혀 있던 입이 진득이 벌어졌다.
“푸하아아!”
이윽고 칼자루를 잡은 채 한쪽 무릎을 꿇는 동시, 단내 섞인 숨이 거칠게 토해졌다. 일어난 이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 진수현이 정지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흙 바닥은 질척하다 못해 벌레가 뱉어낸 체액이 발등까지 차올라 있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액체가 쏟아져 미처 전부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전투의 웅덩이 속에 떠오른 승리는 벌레가 아니라 원정대에게 돌아갔다. 그래, 이겼다. 비록 업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심지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전투지만, 여덟 명의 사용자는 무려 일천이 넘는 벌레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말만이 아닌, 진정한 일당백(一當百)을 이루어냈다.
“고생했어.”
꿇어앉아 호흡을 가다듬는 진수현에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겨우 눈을 들자 손이 불쑥 내밀어 져 있다. 고연주가 옅은 미소 띤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하해. 이제는 애송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네?”
진수현의 눈을 끔뻑거렸다. 고연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숨을 추스르던 남다은은 소리 없이 웃으며 살짝 끄덕였다. 방금 전투에서 진수현은 분명히 누군가의 역할을 해냈으니까.
“감사합니다….”
진수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이어서 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나려는 찰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냐면 목만 남은 벌레가 오른손목을 물고 있었으니까.
“어머.”
고연주는 깜짝 놀랐으나 정작 진수현은 멍한 눈으로 손목을 응시하다가 몇 번 흔들어 떨어트렸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이빨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 살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경기공(硬氣功)으로 막아낸 것이다.
“흐응. 고작 이 정도에 감각을 잃을 만큼 위태롭다면, 방금 한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은데?”
“에이, 설마요. 너무 약해서 몰랐어요.”
“정말?”
“그럼요. 아, 어디 벌레가 물었나?”
고연주가 장난스레 반문하자 진수현은 아니라는 듯 손목을 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쪽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근원은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벌레 맞지 않습니까?”
그 순간 한껏 으스대던 진수현의 낯에 떨떠름함이 스쳤다. 그리고 한 5초가 지났을 즈음, 누군가 갑작스레 “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힘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킥…. 그러네…. 벌레 맞네.”
“흐하하하….”
누구도 이 웃음의 의미는 모른다. 그러나 부정적인 느낌이 아닌, 기분 좋은, 홀가분하다고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웃음은 곧 전염되듯이 번져, 고요한 통로에 한참 동안 흘렀다.
*
어두운 방 안, 낡은 침대. 그리고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두 여인.
“…….”
우선은, 서글프고 안타깝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이제 와서 유세를 부리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김한별과 이유정은 내가 통과의례 때부터 거둬 키워온 애들이다. 말인즉 금동이, 은동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어쨌든 나름 금이야 옥이야 키워왔건만, 좀 컸다고 하는 짓이 가관이다. 한 명은 눈 똑바로 뜨고 바락바락 대들지를 않나, 또 한 명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대꾸까지 한다. 어쩌면 이렇게 안현이랑 차이가 날까? 이래서 딸내미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푹푹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것들이 지금 꽤 기세등등하게 쳐다보는데, 내가 어디 가서 말로 밀릴 사람은 아니니까(물론, 형은 제외한다).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설득에는 자신 있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으음. 아까도 말했지만, 너희 마음은 정말 기쁘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한 말 또 하면서 시간 끌 생각하지 마요.”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다는 이야기야.”
“갑작스럽다고요?”
“그래. 자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이러는 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자고로 남녀 관계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가는 건 좀 아니잖아? 나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건 말도 안 되는 궤변이죠. 왜 스리슬쩍 현 상황에 초점을 맞추시려고 하세요? 제가 오빠한테 처음 고백한 건 아틀란타를 공략하기도 전이었고, 그 후로도 계~속 기다렸는데요. 그리고 오빠는 대답해주겠다고 확실히 말씀하셨고요. 설마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어.
“그러네. 한별이 말이 맞네. 나도 오빠한테 처음 말 꺼낸 게 F등급 되기도 전이었거든. 벌써 몇 개월도 전이잖아?”
그, 그런가? 그렇게 시간이 빨리 흘렀나?
“…생각하니까 열 받네? 오빠. 혹시 밀당 즐기는 성향이야?”
“무, 무슨.”
“그럼 말을 해~. 좋아, 싫어. 이렇게 딱 말하면 되잖아. 그래야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아냐. 이게 어려워?”
“…그럼, 싫다고 말하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냐?”
무언가 밀린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강하게 나가자 둘은 흠칫했으나 곧 동시에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서글프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엉엉 울다가 자존심 상실하고, 결국에는 우울해져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지 모르겠지만요.”
“응. 나도 시원하게 포기할게. 만날 환상의 악몽에 시달리다가 미쳐서 돌아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는 숫제 으름장, 아니 협박을 한다.
– 글쎄. 나는 쟤들의 말이 좀 걸리는데.
문득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 아니. 어쩌면 조금 위험한 상태일지도?
‘왜?’
–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잖아. 무슨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감 잡히지 않아?
환상, 악몽? 그러고 보니 아까 박동걸 어쩌고 한 것 같은데.
“……!”
나는 아차 하며 눈을 들었다. 두 명을 자세히 살피자 확실히 여러 흔적이 보였다. 눈동자는 울다 그친 것처럼 발개져 있고, 눈매나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설마, 그런 종류의 환상을 본 건가? 만일 내 예상이 맞는다면 100% 회복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 가능성은 굉장히 높아. 특히 환상에 걸리면 그 세상은 놈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거든? 심지어 시간조차도 말이지.
‘시간?’
– 그래. 너야 알고 있으니 금방 깨어났지만, 쟤들은 아니잖아? 막말로 며칠, 아니 몇 주, 아니 몇 달, 아닌 몇 년 동안 계속 주야장천 당했다고 생각해봐. 안 미치고 배겨? 오히려 저렇게 정신 줄 잡고 있는 게 용하지.
‘으음….’
돌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정이 꼭 약장수로 변한 느낌이다. 마치 어떻게든 나와 이 둘을 붙이려는…. 얘는 본처라면서 질투도 안 하나.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둘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 큭큭….
‘?’
– 좋아. 게헨나…. 어디 한 번 NTR 당하는 기분을 느껴보라고…. 후후후후!
‘뭐?’
–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답 나왔네. 생각해봐. 쟤들이 약 먹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안아달라고 하겠어? 그 끔찍한 기억을 너를 통해서 잊고 싶어서 저러는 거잖아.
‘…….’
–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걸? 너도 알다시피, 자연 발생으로 인한 정신병은….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라.’
나는 속으로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빨빨거리며 따라오는 두 쌍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나를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정말 이게 맞는 건지,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화정의 말을 듣고 행동하는 건 합리화에 불과하니까.
사실 아직 자신은 없다. 분명히 망설임은 남아 있다. 허나 나도 천성이 사내인 걸까. 스스로 더 가까이 다가오려는 애들이 그리 싫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먼저 나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같이 갈 자신은 있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이유정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 오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뻐하는 목소리. 나는 그대로 이유정의 어깨를 질질 끌어 내가 자고 있던 자리에 살며시 눕혔다. 그러니까, 천장을 쳐다볼 수 있도록.
“아, 아…. 정말로? 나 처음이지만, 그래도 기승위가 좋은데…. 아니야! 정상위도 괜찮아!”
처음치고는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풀이 죽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김한별의 어깨를 잡고 살짝 일으켰다. 흠칫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김한별은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김한별을 엎드리게 했다. 정확히는, 이유정의 위로 포개어지도록.
잠깐, 어리둥절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잠시 후, 서로 마주 보던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빠?””
오, 몸이 겹치니 목소리도 겹쳐서 나오는 건가.
나는 깊숙이 숲을 들이킨 후,
“…잠시만 그렇게 있어 봐.”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Q 1. 다음 문장을 해석하고, 알맞은 단어를 적으시오.
Bowl of rice served with topp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