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32
00831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문득 정신을 차리니 후덥지근한 방의 열기가 느껴졌다. 멍한 기분에 머리를 흔들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러 냄새가 섞여 콧속을 찔렀으나 익숙해져서 그런지 썩 나쁘지는 않다.
천천히 침대를 둘러보니 축 휘늘어진 두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사내를 모르던 눈부셨던 나신은 긴 시간 동안 맺은 광기의 흔적으로 잔뜩 더럽혀졌다. 몸이 간헐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상당히 지친 듯하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한 것은 기억나는데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열여섯 번부터는 횟수도 세지 않았으니까.
하기야 고참(?)도 힘겨워하는데 이제 갓 시작한 애들이 안 힘들까.
“얘들아?”
약간 걱정되는 마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은 깨 있었는지 둘은 약간 비틀거리며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초점 없는 멍한 눈동자로 보는 것도 잠시. 이내 엉금엉금 기어와 내 하반신으로 고개를 묻는다. 이유정은 아앙 입을 벌려 남근을 집어삼키고, 김한별은 더 아래로….
“오.”
이내 남근과 고환을 부드러이 자극하는 혀의 감촉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기교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냥 물고 빨아들이는 것에 불과했으나 이렇게 반응하는 모습이 몹시 어여쁘다. 손을 뻗어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자 고개를 살살 비비면서 열심히 머금는 것도 사랑스럽다.
이윽고 한 차례 사정이 끝난 후, 둘은 정액을 절반씩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내 품으로 찰싹 안겼다. 마치 아기 새처럼 자꾸만 몸을 밀착해오는 행동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언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앞선 여인들이 왜 그렇게 나를 품에 못 안아서 안달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이렇게 기대와야 나도….
쾅…!
그때였다. 기분 좋게 한숨 자볼까 생각한 찰나, 돌연히 폭음이 울렸다. 그리고 삼 초 동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청력을 높이니 웬 무리가 우르르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아.”
문득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그, 그러고 보니 그랬나? 그러니까 우리는 원정 중이었고, 원정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아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우선 옷, 아니 애들부터…!
“유, 유정아?”
“새근~새근~.”
“하, 한별아!”
“코….”
젠장, 벌써 잠든 거야? 어깨를 흔들었으나 깨기는커녕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척은 빠르게 아래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이 속도라면 아마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발견하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 문이잖아?
– 봉인돼 있는 것 같은데요….
그 순간,
“아, 안 돼!”
나는 곧장 침대를 뛰쳐나왔다.
*
철컥!
문이 열린 순간 임한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직 한 걸음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상한 공기가 확 덮쳐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독연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뜨끈뜨끈한 열기, 은은히 풍기는 달착지근한 향취, 진한 밤꽃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콧속을 찔러온다. 가만히 음미해보자 익숙한 내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갸웃하며 안으로 두어 걸음 들어간 순간 임한나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수, 수현아?!”
“유정아! 한별아!”
등 뒤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방은 문이 여러 개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했지만, 거실로 보이는 공간에 세 남녀가 쓰러져 있었다. 우선 김한별과 이유정은 각자 뭔가 어설픈(?) 자세로 바닥에 누워 있다. 그리고 김수현은 머리를 한쪽으로 돌려 벽에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아무튼, 겉으로만 보면 기절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클랜 로드!”
“…….”
“흐윽! 어서 물약을…!”
“…….”
부산스럽게 달려간 클랜원들은 호들갑을 떨며 물약을 꺼냈고, 강제로 입을 벌려 들이붓기 시작했다.
“수현, 수현! 눈 좀 떠봐요!”
“꿀꺽…. 크업…! 쿨럭…! 꿀꺽….”
“저, 정신이 좀 들어요? 수현!”
“…….”
그러나 뺨을 치고 어깨를 흔드는 등 아무리 깨워도 김한별, 이유정은 실눈으로 힘없이 천장을 바라보고만 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그리고 김수현은 아예 일어날 생각조차 없는 듯 일말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약 삼십 분간 난리를 치던 클랜원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하라며 말리는(?) 근원의 말을 듣고 간신히 진정했다.
잠시 후, 가장 지식이 풍부한 근원이 주변을 요모조모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환상에 당한 것 같습니다.”
“환상?”
“공간을 심도 있게 분석한 결과, ‘환상의 도플갱어’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습니다.”
“환상의 도플갱어?”
고연주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전원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기야 희귀한 괴물이니만큼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정작 문제는 이게 아니었지만.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상대에게 강제로 환상을 걸고, 약해진 틈을 타 좀먹어가는 무서운 괴물입니다.”
“글쎄. 아무리 그래도 그냥 환상으로 이렇게 됐다고는…. 수현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데.”
“그래 봤자 인간입니다. 이 괴물의 무서운 점은 일단 성공한 순간, 구축한 환상을 멋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정에는 시간도 포함돼 있습니다.”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년,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간 어떤 환상을 겪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
며칠도 아니고 수백 년일지도 모른단다.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두의 낯빛에 심각한 빛이 서렸다.
“잠깐만요. 듣고 보니 이상한 데? 그럼 그 환상의 도플갱어라는 괴물은 어디 있는 거죠? 이 세 명이 당했다면 아직 남아 있을 거 아녜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갈 해솔이 예리하게 반문했다. 근원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돌연 합, 닫았다. 그리고 갑작스레 먼 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근원 씨?”
“모르겠습니다.”
“네?”
“모르겠습니다.”
제갈 해솔이 계속 채근했으나 돌아오는 건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고연주는 여전히 근심이 가시지 않았으나 우선은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정신 쪽에 문제가 생겼든 아니든, 회복을 위해서라도 이 장소를 신속히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는 근원에게 세 명을 봐주기를 부탁하고, 남은 클랜원과 함께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심층부까지 들어왔으니 눈앞의 성과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 고연주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칫했다. 수심 어린 눈매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처음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상한 향을 맡기는 했다. 허나 조금씩 익숙해지려는 찰나, 느닷없이 냄새가 물씬 강렬해졌다. 정확히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때였다. 냄새의 발생지를 찾아가던 한 쌍의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한껏 치떠진 두 눈의 시선이 오롯이 침대에 꽂혀 있다. 고연주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침대의 시트를 들췄다.
아니. 실은 들출 필요도 없었다. 고연주가 누구인가. 첩보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심지어 김수현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그림자 여왕’이 아닌가.
침대를 집게손가락으로 푹 찔렀다가 빼니 질펀한 액이 실처럼 이어졌다. 시트에는 붉은 핏자국이 세계 지도처럼 얼룩져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여기까지만 봐도 충분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침대에서 어떤 일이, 아니 행위가 있었는지. 눈에 잡힐 듯이 훤하다.
“누구는 어떻게든 구하려 갖은 애를 썼는데….”
살짝 내민 혀끝으로 검지에 묻은 액을 부드러이 핥는다.
“누구는 침대에서….”
불현듯 고연주의 눈동자가 싸늘한 안광을 뿜었다.
“호…, 호호…. 정말, 어이가 없네?”
이어서 요사스러우면서 차가운 웃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언니. 여기 뭐 있어요…?”
공교롭게도 웃음을 듣고 찾아온 임한나가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침대를 앞에 두고 웃고 있는 고연주의 모습이 몹시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침대로 다가간 임한나는,
“후…, 후후….”
약 10초 후, 상냥한 낯으로 고연주와 똑같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 하하….”
이어서 들어온 남다은도,
“하…, 하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정하연도.
모두 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우와! 장난 아닌데?!”
“누님들! 이것 보세요! 금은보화에, 영약에, 약초에, 장비에! 여기 진짜 무슨 보상이…!”
기쁨에 겨운 소리를 지르며 싱글벙글 방으로 찾아온 진수현은,
“호호호호호호!”
“후후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침대를 둘러싼 네 여인이 미친 듯이 웃어 젖히는 모습을 보며 입을 딱 다물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지금 잘못 끼어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그렇게 생각한 진수현은 얼른 조용히 물러나기로 했다. 실로 신속한 결정이었다.
이윽고 문은 살그머니 닫혔으나, 방에서 들려오는 한 맺힌 웃음들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
한편, 같은 시각.
탕!
“안 돼!”
갑자기 탁자를 세게 내리친 안솔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푸흡!”
“콜록!”
그 여파로 옆에 앉은 허준영과 맞은편 의자에 앉은 김유현이 마시고 있던 음료를 푸 뿜고 말았다. 그러나 김유현은 곧 로브 안에서 천 조각 하나를 꺼내 차분히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음…. 사용자 안솔?”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갑자기 소리를 질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오라버니가 위험해요!”
탕, 안솔이 또 한 번 탁자를 치며 외쳤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말이다. 하지만 김유현은 눈앞의 사용자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허투루 넘기지 않고 침착히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수현이가 위험하다니요?”
“저, 저도 잘은 몰라요. 그냥….”
안솔이 입을 깨물었다.
“오라버니를 원망하는 집단이…. 이제 막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느낌이….”
“…원망하는 집단?”
김유현이 눈을 빛냈다. 안솔의 말에서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악마 놈들이…!’
허준영은 또 시작이라며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으나 김유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집단이라면…. 어떤 느낌의?”
“그 집단은…. 오라버니를 노리고 있어요…. 서로 힘을 합쳐 잡아먹겠다는…. 하나의 숙원을 가지고….”
“혹시 그놈들이 누군지, 아니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어, 없어요.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이번만큼은 막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김유현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윽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듯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불안에 떠는 안솔과 멀뚱멀뚱 쳐다보는 허준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계획을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뭐, 상관없습니다.”
“오늘 만남은….”
“물론, 원하시는 대로. 우선은 비밀로 해두죠.”
김유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단.”
그러한 찰나, 허준영의 말소리가 김유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김수현의 선택을 지지하는 것뿐입니다.”
“…….”
“해밀 로드의 계획은…. 글쎄요. 언뜻 들으면 나쁜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침묵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해밀 로드가 모든 사정을 말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그 이상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을 겁니다. …그저, 김수현의 선택과 행동에 동조할 뿐.”
“…제가 당신들에게 원하는 것도, 딱 그 정도입니다.”
그렇게 말한 김유현은 곧장 몸을 돌려 정문을 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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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여담입니다만. 고연주, 남다은, 임한나, 정하연이 있는 모임의 이름은 ‘Someday Fivesome’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