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34
00833 The Town At Night. =========================================================================
노을이 길게 누운 시간, 오후를 맞이한 캐슬 1층은 상당히 한산하다. 정오 즈음만 해도 꽤 북적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간간이 돌아다니는 하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발길이 끊겼다. 하기야 이 시간대면 일과를 정리할 시간이니, 화급을 다투는 일만 아니면 찾아오는 게 이상한 일이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중앙 쉼터를 둘러본 후,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정원의 풍경을 담아내는 네모나고 커다란 수정이 붉은 황혼빛으로 물들어 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즈음, 달그락, 탁자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엔 무슨 일을 할까~. 누구를 또 꾀려는 걸까~.”
이어서 들려오는 흥겨운 노랫가락. 언제 다가온 걸까? 고연주가 작은 쟁반을 옆구리에 낀 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탁자에는 허연 김을 피우는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고맙습니다. 마침 입이 심심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또 어떤 년이에요?”
“사용자 차희영이요. 후루룩.”
“희영이요? 걔는.”
무어라 말하려던 고연주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눈을 한껏 치뜨며 흘겨보는 것이 흡사 짐승을 보는 듯하다.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 잔잔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압니다. 안현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요. 설마, 뺏으려는 생각은 아니시겠죠?”
나는 대답 대신 품속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 슬쩍 보여주었다. 그러자 고연주의 두 눈에 이채가 스치더니 삽시간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아직 미심쩍은 빛은 남아 있었으나 어쨌든 오늘 만남의 목적을 이해한 듯싶다.
“결국, 결정하셨네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시간이 없어요?”
“아, 정령석처럼 오래 쟁여두고 싶지 않아서요. 성장하는 시간도 염두에 둬야 하니까요.”
순간 아차 싶어 말을 바꿨다. 기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속내를 곧이곧대로 드러낸 말은 아니었다.
저번에 받은 예비 사용자는 열여섯 명. 그러나 탁 까놓고 말하면 딱히 눈여겨본 사용자는 한 명도 없다. 정확히는 방패 혹은 집 지키는 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5년 차에는 테라로 진군할 예정인데, 이제 와서 키운다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그러나 차희영의 경우는 다르다. 기초를 다시 다져오라는 명분으로 아카데미에 집어넣기는 했지만, 연차로 따지면 이제 곧 2년 차로 오르지 않는가. 즉 현재가 딱 좋은 시기라고 볼 수 있으니, 예비 사용자들과 동일 선상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 예비 인원 중 제갈 해솔 급의 사용자가 출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으니까.
“아깝다. 간만에 바가지 좀 긁으려고 했더니만.”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문득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목소리기는 했으나 나 들으라고 말한 게 분명하다.
“바가지라면 얼마든지 긁어도 됩니다.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겠죠.”
“흐응. 말투가 의미심장한데요?”
“적당히 좀 하면 안 될까요. 서로 모여 쑥덕거리는 걸 볼 때마다 불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입니다.”
“푸.”
고연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불안해하는 거죠. 아니면, 우리가 애들한테 해코지할까 봐?”
“…둘 다요.”
“뭐, 최소한 후자는 기우겠네요. 사실 생각해보면, 저도 한별이나 유정이한테 할 말은 없거든요. 걔들 처지에서 보면 우리가 선수 친 입장이겠죠.”
“하, 하하.”
“…그래요, 그건 그렇다 쳐요.”
“…….”
나는 찻잔을 기울이는 걸 멈추고 고연주의 말에 집중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웃음기가 가시고 진지한 기색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요.”
어느새 고연주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에 둘러싸여 말을 잇는다.
“이거 하나만, 진심으로 대답해줘요.”
“…할 수 있는 거라면요.”
“그때…. 왜 연락을 받지 않은 거예요?”
“그건.”
“몰랐다고는 하지 말아줘요. 통신 수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확인했고, 하연 씨가 시도한 횟수는 세 자릿수가 넘어가니까.”
“…….”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쉬이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이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물론 질문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진심’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야 더 필사적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여러 변명이 뇌리를 스쳤으나 결국에는 처음 생각한 그대로 말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고연주가 원하는 진심이었다. 또한, 돌아오는 내내 오묘한 뉘앙스를 풍겼으니 속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한동안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나도 시선을 돌린 터라 지금 고연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먼저 말문을 꺼낸 건 고연주였다.
“그러니까 우리를 필사적으로 만들려고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런 말인가요?”
“액면 그대로의 뜻이라면, 맞습니다.”
“그러다 만에 하나 우리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아마.”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켠 후,
“좌절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번 진심을 내뱉었다.
그 순간 비로소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나는 살짝 식은 찻물을 한입에 마신 후, 다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두근거려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차의 영향인가? 기분이 잔잔하니 말도 술술 나온다. 이건 조금 주의해야겠군.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믿고…. 아니, 아니죠.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고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줘요.”
“내가 머셔너리 클랜을 창설한 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구나. 내가 잘못 이끌어온 게 아니구나. 아직 가능성이 있구나. …대충 이런 뜻입니다.”
“…….”
아무튼, 머셔너리 클랜 창설이 분기점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냥 아는 미래를 따라 춘추 전국 시대를 겪어야 했는지, 아니면 미래를 바꾼 게 잘한 일인지. 나는 이 문제로 한참을 후회하고, 고민했었다.
이번에는 고연주가 침묵했다. 서서히 눈을 돌리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심원한 눈동자가 보였다.
“이게 제 진심이자, 대답입니다.”
어떠냐는 의미로 물어보자, 고연주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여졌다.
“글쎄요….”
그리고 잠시 후,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수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지만요.”
조용히 말을 흐리더니 돌연 반전을 예고한다.
“정말 몰랐다, 아니면 우리를 믿었다, 혹은 몹시 슬퍼했을 거다…. 적어도 이런 말보다는, 훨씬 기분이 괜찮네요. 최소한 진심인 건 느꼈으니까.”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때, 우리는 동시에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탁탁, 탁탁…!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고연주는 짧은 한숨을 뱉고는 텅 빈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울리는 반대쪽으로 바로 몸을 돌렸다.
“당분간 두 애한테 잘해주세요.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아직 많이 힘들 거예요. 정신은 육체와는 달리 그리 쉽게 나아지지 않는답니다?”
응? 그것도 알고 있었나? 아니면 애들이 말한 걸까?
“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순간, 고연주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단숨에 점이 돼버린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 부르지 마.
문득 화정의 목소리가 내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 불러서 어쩌게. 미안하다고 하게?
‘그게 아니라….’
–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이 악물고 말했을 거야. 네가 어설프게 행동할수록, 오히려 쟤 자존심만 더 상처받는다고.
‘…….’
화정의 음성은 조용했으나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틀어박혔다.
탁탁탁탁!
“늦어서 죄송합니다!”
동시에 홀을 울리던 발소리가 멈추며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나는 간신히 의자에 몸을 앉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안에 쓰디쓴 감각이 진한 여운처럼 맴돌았다.
*
차희영은 교육이 늦게 끝났다고, 그래서 늦었다며 여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변명은 아니다. 아카데미 교관들한테 있는 대로 굴리고 최대한 괴롭히라고 일러뒀으니까.
그리하여 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죄하는 차희영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에야, 겨우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야기에 앞서…. 박현우 교관이 뭘 전해주라고 하지 않던가요?”
손을 내밀자 차희영은 쭈뼛쭈뼛하면서도 품에서 다소곳이 기록 더미를 꺼내놓았다. 별것은 아니고 차희영의 아카데미 성적표였다.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는 차희영을 보고 웃어준 후, 나는 천천히 기록을 읽어 내렸다.
“호.”
유심히 검토한 결과, 작은 탄성이 터졌다. 예전 차희영이 예비 사용자였던 시절에는 아카데미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나서 한동안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점수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는 180도 다른 성적이 나왔다. 특히 마법과 관련한 부문에서 모조리 만점을 받은 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게 굉장히, 엄청나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냉정히 말해서 차희영은 현재 예비 사용자가 아니니 이 정도 해주지 않고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내건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사실은 좋게 생각된다.
“성적이 꽤 괜찮네요?”
칭찬해주자 차희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깜빡거리는 것이 꼭 간식을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를 보는 듯하다. 그 기대에 부응해 품에 손을 넣어 물건을 꺼냈다. 은은한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 드디어 마지막 각성 시크릿 클래스인 ‘백야의 무희’를 계승할 때가 왔다.
“사용자 차희영?”
“네, 네!”
“저번에 제가 한 얘기는 기억하고 있나요?”
“…기억하고 있어요.”
말을 꺼낸 순간, 불현듯 차희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
변한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자신 있습니까?”
그 순간 탁자에 꽂혀 있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언뜻 멍해 보이지만, 어딘가 요사스러운 빛이 흐르는 눈동자와 마주하자 돌연히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올려놓은 부채를 바스러지듯이 움켰다.
“앞으로 엄청나게 힘들 겁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각오하고 있어요. 아니, 각오했어요.”
“정말로요?”
“…….”
“각성 시크릿 클래스. 가벼운 이름이 아닙니다. 무거운 이름값을 갖고 있는 만큼, 그만한 활약이 요구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단순히 수련이 힘들다고 겁주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겁니다. 와중에 어쩌면 죽음과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죠. 이뿐일까요? 장담하죠. 분명 클랜 안에서도 여러 말이 나올 겁니다. 이 귀한걸 ‘그런 사용자’에게 줘도 되느냐. 차라리 제갈 해솔이나 주지.”
“…….”
말이 없다. 은근슬쩍 신경을 긁어도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부채를 꺼냈을 때부터 맹목적으로 쳐다만 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 이상 얘기를 끄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그러한 것들을 극복할 자신이 있다면….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말을 마침과 함께 나는 부채를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그리고 차희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덥석 부채를 잡았다. 그렇게 손에 물건을 움키자 그제야 토끼 눈을 뜨며 가벼운 탄식을 터뜨린다.
“아, 아…?”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하지만, 좋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면 외려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나는 차희영이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바로 저 ‘맹목’에 걸고 있었으니까.
과거 ‘마녀’ 차희영은 확실히 대단했다. 어쨌든 안솔도 두 번 성공할 자신은 없다는 게헨나의 소환을 한 번이나마 실현하지 않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걸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 맹목적인 ‘분노’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해답은 간단하다. 1회 차의 ‘분노’를 2회 차에서는 ‘안현’으로 대체하면 된다. 안현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접때 은근히 안현과의 관계를 들먹였다.
만약 차희영이 마녀로 각성한다손 쳐도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만한 일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1회 차서 우리를 노린 마녀의 칼끝을 현재 악마에게 돌릴 수 있다면, 강력한 무기를 하나 쥐게 되는 셈이니까.
생각을 끝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에, 네?”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차희영이 바보처럼 허둥댔다.
“왜요? 그 부채는 이제 사용자 차희영의 소유물인데.”
“하, 하지만요….”
“자신 있게 가져갔잖아요?”
“그, 그건! 아, 죄, 죄송, 그러니까요. 방금 제가 잠시….”
“저는 개인적으로 좋게 봤습니다. 이런 모습보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아요.”
“…히끅!”
참, 딸꾹질도 참 귀엽게 하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봐요. 아까 말을 조금 심하게 하기는 했지만, 내심 사용자 차희영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으니까요. 이건 진심이에요.”
오늘따라 진심이라는 말을 많이 써먹는군. 하지만 이건 1회 차서도 호기심을 가졌던 부분이었다. ‘천재’와 ‘마녀’. 둘 중 과연 누가 더 뛰어날까?
차희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 낯을 붉혔다. 괴롭히는 건 이쯤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정원을 응시했다.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쯤 안현의 수련이 거의 끝난 시간일 것 같은데….”
이번에는 확실히 내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화들짝 고개를 들더니 곧장 몸을 일으켰으니까.
반은 때려 맞추기는 했지만, 아마 안현의 앞에서 가장 먼저 계승하고 싶겠지.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해주는 것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용자 정보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겸사겸사 ‘맹목’도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을 테고.
이윽고 차희영은 정확히 여덟 번 허리를 굽혔다가 편 후, 후다닥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하나 궁금한 건, 나가는 도중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안 돼! 넘어가면 안 돼!’나 ‘현이 오빠! 흔들려서 미안해요!’ 라는 등, 뜻 모를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내내 거리를 돌아다녀야 할 것 같으니, 시간이 있을 때 약간이라도 자두는 게 좋을 터.
“…후우.”
계단을 오르면서 무언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끝이 다가오는 걸 느껴서일까.
이로써 끝까지 쥐고 있던 백야의 무희도 드디어 떠나 보냈다. 곧 백야의 무희를 계승했다는 소문이 돌면, 이제 중간 단계인 머셔너리의 강화도 일단락 짓게 되는 셈이다.
“…아.”
아니, 아니지.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 있다. 오늘 새벽 일이 무사히 끝나야 귀환 계획의 두 번째 단계를 끝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오늘 밤의 거리를 마지막으로….
*
눈을 뜨자 방 안에는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아직 희끗희끗한 불빛이 곳곳을 비추고 있다. 밤의 거리가 열리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딱 적당한 때에 일어났다. 느긋하게 준비하고 나가면 얼추 시간이 맞겠지.
침대에서 나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금이었다. 어느새 갖다 놨는지 책상에는 두 개의 카오스 미믹과, 작은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다. 이윽고 하나하나 열어 확인해본 찰나, 숨이 멎을 뻔했다.
아빠 카오스 미믹에는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백금화가, 엄마 카오스 미믹에는 다채로운 빛을 반짝이는 보석이 그득하게 들어 있었다. 거기다 중간중간 입장료로 사용할 금화를 작은 주머니에 따로 담아놓기까지. 조승우의 센스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수입이나 금번 원정 등으로 재정이 넉넉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절약을 중시하는 조승우의 성격상 이렇게 많이 넣을 리가 없는데….
“응?”
머리를 갸웃하며 미믹들을 챙기는 순간, 문득 아래 깔린 작은 기록 하나가 눈에 밟혔다. 쪽지였다.
『아마 클랜 로드가 이 쪽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이미 한창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겠지요.』
…참 쓸데없이 거창한 서두군.
『하하.
농담 한 번 해봤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오후 늦게 입수한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원래는 바로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오래간만에 곤히 주무시는 것 같아 차마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그림자 여왕님께 몰래 부탁 드린 거라서요.
제 어설픈 실력으로 들어가면 단박에 알아채 깨실 것 같아서 말이죠.』
또 한 번 쓸데없는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차분히 아래를 읽어 내렸다.
『아무튼, 신 코란 연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면, 오늘 경매가 꽤 가열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제가 물밑 접촉을 했다는 사실이 어느 루트로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머셔너리 클랜’이 이번 경매에 참가한다, 이 정도 수준으로요.
신 코란 연합의 소행은 아니고, 아마 영약 판매자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경쟁을 유도해 최대한 비싼 값을 받으려는 목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호, 꽤 깜찍한 짓을 했군. 아마 이쪽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적당한 선에서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현 상황으로서는 딱히 뭐라 할 건더기는 없다. 크게 보면 원칙을 어겼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먼저 선을 넘은 건 신 코란 연합과 우리니까. 아마 그 점을 인지하고 야료를 부렸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잡아 족치고….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당장 급한 건 우리고, 경매가 눈앞이니까요.
그리고 이 건에 관해서, 상인 조합 로드인 서지환이 필요하시면 최대한 협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글쎄, 협조라. 서지환이라면 아마….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리어 이번 기회를 이용해 판을 크게 키우고 싶어하는 눈치더군요.』
그래, 그러고 싶겠지.
『들어보니 직전에 이번 경매 물품 리스트를 새로 업데이트한 것 같습니다만….
아마 여느 때보다 큰손들이 참가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간 아껴둔 물품이 꽤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몰라, 모든 추측을 고려해 자금을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선택은 클랜 로드에게 맡기겠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그놈을 생각하니 괘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군요.
여하튼 부디 클랜 로드의 현명한 결단을 기대합니다.』
하기야 상황이 이렇다면, 처치 곤란한 물품이 블라인드 경매로 나와도 크게 이상할 건 없다. 후후. 그럼 나야 좋지.
『PS. 아차, 아기 카오스 미믹이 조금 이상합니다. 처음에는 얌전히 있더니, 클랜 로드의 방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기를 일으키며 심히 울어 젖히더군요. 그래서 부모 카오스 미믹으로 대체했습니다만, 혹시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피식 웃으며 쪽지를 품 안에 넣었다.
그냥, 조금 우스웠다. 밤의 거리는 대표적인 음지라 볼 수 있는데, 그런 만큼 돌아가는 생리가 훤히 보여서 말이지. 어떻게든 비싼 값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만, 사실 괘씸하다 느끼는 건 매 한 가지였다.
주섬주섬 작은 주머니를 챙긴 후, 미리 준비한 잿빛 로브를 눌러쓰는 것으로 채비를 마쳤다.
이윽고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가, 입구를 넘어 정문을 벗어나려는 찰나.
“…….”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돌연히 허전한 감정이 온몸을 엄습한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은 듯한 기분.
잠시 후, 나는 품에 넣었던 쪽지를 도로 꺼내 펼쳤다.
============================ 작품 후기 ============================
많은 걸 느낀 하루였습니다.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