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39
00838 Master Of Performance. =========================================================================
쾅!
사내가 입찰한 순간 거센 소음이 장내를 울렸다. 삽시간에 객석이 어수선해졌다. 몇 명은 깜짝 놀란 얼굴로 이 층을 돌아보기도 했다.
사내는 천천히 숨을 흘리며 구슬을 흘끗거렸다. 김수현의 안면은 경악과 분노로 일그러졌고, 움켜쥔 주먹은 호출석을 내리찍었다. 이윽고 관리자로 보이는 이들이 황급히 달려오는 장면이 잡혔다.
– 스톱을 요청합니다. 삼십 분, 아니 이십 분이면 됩니다. 같은 도시 아닙니까? 연락하면 바로 가져올 겁니다.
– 머셔너리 로드. 그건 중단 사유가….
– 아니, 돈이 없는 게 아니라.
– 경매장에 들어오신 이상 가져오신 자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서로 실랑이를 하는 광경을 보며 사내는 빙긋 웃었다. 다른 세 명도 구슬을 봤는지 만면에 득의의 미소를 띠고 있다. 그중 한 명이 몰래 신호를 보냈다. 사내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직 경매가 끝난 건 아니었으니.
“오백삼십만! 진행 안 할 거요?”
“아…!”
여인이 탄성 비스름한 신음을 질렀다. 한껏 당황한 얼굴로 이 층을 흘깃거리는 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사내가 거듭 재촉하자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낙찰을 선언했다.
“오, 오백삼십만 금화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사내는 의자에 편히 기댈 수 있었다. 팔걸이에 비치된 잔을 잡으며 살그머니 웃었다.
한순간 벼랑 끝으로 몰리나 싶었는데 막판에 역전에 성공했다. 작전 세력이 이례적으로 힘을 합친 결과 머셔너리라는 거함을 무너트린 것이다. 잔에 담긴 액체는 약간 밍밍했으나 바싹 마른 목을 부드럽게 적셔주는 것이 몹시 달게 느껴졌다.
남은 물품은 무척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여덟 번째 물품인 깃털 같은 풍성한 무녀 의상은 삼천오백 금화로, 아홉 번째 물품인 세련된 칠흑색 부츠는 이천팔백 금화로 각각 낙찰됐다.
작전 세력은 가져온 자금을 깡그리 소모했고, 개인으로 참여한 사용자들은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방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을 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최소 십만 단위로 이루어지는 금의 전쟁에 참여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마지막 열 번째 물품으로 환이 한 번 더 나오기는 했다. 작고 둥글지만 은은한 기운이 흐르는 신비로운 흰색의 환이었다.
사내는 혹시나 싶어 구슬을 살폈으나 이내 안심할 수 있었다. 김수현은 분노한 얼굴로 이를 갈고만 있을 뿐 끝끝내 입찰하지 않았다. 작전 세력이 잠잠하니 개인 참가자들도 지레짐작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결국에는 첫 입찰가인 오백 금화에 낙찰됐다.
그리하여 치열했던 블라인드 경매도 마침내 종료를 알렸다. 경매가 끝나자마자 김수현은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입구를 나섰다.
사내는 비릿하게 웃었다. 어차피 이 바닥이 이런 세상이다. 뭘 하던 필사적인 놈이 살아남는다. 구슬을 통해 반응 보기를 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김수현의 잘못이다. 사실 미안한 감정보다는 머셔너리라는 최고의 클랜을 이겼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머셔너리 로드. 너무 언짢게 생각 마시오. 우리도 이기기 위해서 최소 운영 자금만 빼고 모조리 끌어왔으니.’
이렇게 생각한 사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놀렸다. 몰래 설치한 구슬도 회수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줏빛 환의 효능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입찰가를 내고 낙찰 물품을 받는 과정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백삼십만이라는 거금을 건넬 때 손이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에 담긴 자줏빛 환을 보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주최 측에서는 물품을 건넬 때 서비스로 구즈 어프레이즐을 동봉했다. 사내도 직접 확인하는 편이 마음이 놓이는 터라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렇게 홀가분한 걸음으로 경매장을 나오니 세 명의 사용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으로 모였다. 아까 같이 힘을 합쳤던 이들이다. 사내는 구즈 어프레이즐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먹고 튈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건네기 전에 할 말이 있소만.”
“네. 그쪽이 가장 많은 금액을 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차액은 차후 보내드리도록 하죠.”
로브를 눌러쓴 여인이 재빠르게 말했다. 알겠으니 어서 구즈 어프레이즐이나 사용하라는 투였다.
사내는 남은 두 명에게도 똑같은 확답을 받은 후 구즈 어프레이즐 사용 준비를 시작했다. 입속으로 주문을 외는 사내를 전원 흥분과 설렘이 섞인 눈길로 응시한다. 모두의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스쳤으나 현재 공통된 기대는 아마 이게 아닐까.
왜 머셔너리는 이걸 사백만 이상의 금화를 내고서라도 사려고 한 걸까? 도대체 어느 정도의 효능을 지녔길래?
이윽고 사내의 주문이 끝나는 동시에 구즈 어프레이즐이 빛을 발했다. 텅 빈 기록에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졌다. 사내는 물론, 세 명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기록을 잡고 침착하게 들여다본다.
잠시 후.
“…….”
순간적으로 사내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더니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독한다.
그러나 눈을 부릅떠서 읽는다고 해도 구즈 어프레이즐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똑같다.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사내는 돌연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오백삼십만 금화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거미줄처럼 번지며 힘이 쭉 빠졌다. 결국에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게…?”
“어때요? 네? 아 빨리 말 좀 해봐요.”
“어, 어, 어, 어…?”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여인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얼른 기록을 낚아챘다. 구즈 어프레이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활성(活性)의 영약』
자칭 홀 플레인 최고의 천재라는 여성 연금술사가 만든 영약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한탄해 마력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원래 의도와 살짝 다른 결과물로 나왔습니다. 이렇다고는 해도 실패작은 아닙니다. 복용 시 신체의 감각이 한층 예민해지며 마력 흐름이 0.5배 빨라집니다. 향상된 능력은 열두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활성의 영약.
복용 시 열두 시간 동안 신체 감각이 한층 예민해지고 마력 흐름이 0.5배만큼 상승한다.
일단 영약은 맞다. 드러난 사실을 봐도 썩 나쁜 효능은 아니다. 추적이나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으아…?”
“뭐, 뭐야 이거? 이거 뭐냐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오백삼십만 금화를 낼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으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악!”
많이 쳐줘도 아마 일천 골드 이하로 거래되지 않으려나?
*
『마력 상승의 영약』
여러 희귀한 약초를 배합해 조제한 고대의 영약입니다. 유수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전서는 소실됐으며, 제조에 필요한 약초 중 일부가 멸종해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력 능력치 95포인트 이하의 사용자(거주민)가 복용한다면 2포인트~4포인트만큼의 능력치 상승을 이룰 수 있습니다.
“후후.”
허공에 출력된 설명을 보니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의 영약을 오백 금화에 사다니. 이 정도 수준이면 부르는 게 값이니 완전히 거저 얻은 것과 진배없다. 오죽하면 수작을 부린 판매자나 헛돈을 쓴 작전 세력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어쨌든 이로써 비비앙의 고민도 해결된 셈인가? ‘사멸 무저갱’ 원정으로 얻은 마력 영약이 하나 더 있으니 분명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삼 군단은 물론, 이 군단, 아니 어쩌면 일 군단을 소환해 게헨나와 수나를 볼 수 있을지도…. 아, 이건 김칫국인가?
나는 새하얀 영약을 나무 상자에 넣고 소중히 품속에 보관했다. 어떻게든 참으려 애썼으나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옆을 보니 고연주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면사 안에서 듣기 좋은 허밍(Humming)이 흘러나오며 구즈 어프레이즐을 읽는다. 품에 물품을 한 아름 들고 있는 것이 꼭 쇼핑이라도 마치고 나온 모양새다.
“뭘 그렇게 많이 샀습니까?”
“응? 아, 선물이요.”
고연주는 보란 듯이 몸을 돌리며 싱글벙글한 목소리를 냈다. 품에는 검붉은 화살 세트와 하얀색의 무녀 의상이 안겨 있었다.
“화살은 임한나 주려고요?”
“아니요? 걔는 화살 필요 없잖아요. 선유운 씨가 좋아하겠죠.”
“흠. 그 옷은요?”
“이건 희영이 꺼.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계승했는데 축하 선물로 줄 거예요.”
고연주의 설명에 머리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림자 여왕의 눈썰미도 대단하니 나름 괜찮은 성능을 지녔을 것이다.
“아, 영약 구매 축하해요.”
“축하는요.”
“처음에는 왜 도와달라고 하는지 몰랐는데…. 정말, 수현의 수완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그 수작 부렸다는 사용자, 내일 대금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네요.”
“밤길에 칼 안 맞으면 다행이겠죠.”
나는 쓰게 웃으며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고연주는 문득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건 뭐예요?”
“예?”
“오른손에 쥔 거요. 수현도 뭐 산 거 있어요?”
“…….”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으나 헛기침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얇은 칠흑색 사슬로 이어진 블랙 다이아몬드가 요요한 빛을 뿌렸다.
“포스커스 아드마스…. 라는 목걸이인데요.”
“포스커스 아드마스? 뭐 좋은 능력이라도 붙었나 봐요?”
“그게…. 제가 방금 이 보석에 제 마력을 흘렸는데….”
“아~. 수현이 쓸 거예요? 성능은 모르겠지만, 남자가 목에 걸기에는 너무 예쁜 것 같은데요? 호호.”
“으음. 이 보석은 흡수한 마력을 영구히 보존해주는 것으로….”
“응? 네, 네.”
“말인즉 보존된 마력이 소멸하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처음 마력을 흘린 사용자가 사망했을 때만….”
“저, 수현? 말 끊어서 미안한데 갑자기 왜 그래요? 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줄게요.”
“…네?”
에라 모르겠다. 결국에는 눈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목걸이를 내밀고 말았다. 젠장, 왜 갑자기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거지?
“…….”
그렇게 십 초를 기다렸으나 손에 걸린 목걸이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흘끗 눈을 돌리자 어느새 걸음이 멎은 고연주가 보였다. 물론 내 발도 멈춰 있었다.
고연주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격을 추스르는 것처럼 보였다.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살그머니 다가가 손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가늘고 고운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블랙 다이아몬드는 고연주와 아주 잘 어울렸다. 색정적인 분위기에 우아함이 곁들여졌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고연주는 여전히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면사를 걷어 얼굴을 확인했다.
“헉.”
비로소 얼굴을 확인한 순간 깜짝 놀랐다. 고연주는 그야말로 완벽한 얼음 상태였다. 눈동자는 아득해 보이고 입을 벌린 것이 넋이 살짝 나간 듯하다. 이윽고 서로 눈이 마주친 찰나 돌연 고연주의 몸이 스르르 품으로 무너졌다.
“고, 고연주?”
“…요.”
“예?”
“…만요.”
“뭐라고요?”
“자, 잠시만요. 잠시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줘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부탁할게요.”
문득 나를 껴안은 양팔이 부드러이 등을 압박했다. 고연주는 내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호흡이 거칠고 어깨도 떨고 있다. 무언가 쑥스럽다는 기분에 먼 산만 응시했다.
그때였다.
“삐에….”
허리 부근에서 진동이 느껴지더니 미약한 울음이 흘렀다.
“삐앙삐앙….”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진동과 소음은 점차 커져만 갔다.
“아 진짜.”
고연주도 느낀 걸까. 입을 짓씹으며 살짝 떨어지더니 신경질적으로 허리를 내려다본다. 아래에는 어깨끈으로 건 아기 카오스 미믹이 징징거리는 중이었다.
“왜, 왜 또 우는 건데.”
“삐무룩….”
“정말,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인데. 이렇게 방해하면 어떡하니.”
“삐아아아….”
“어휴, 못살아 정말…. 수현. 솔이 좀 어떻게 해봐요.”
“…예?”
나는 떨떠름히 안솔, 아니 아기 카오스 미믹을 받아 들었다. 내 손이 닿자 진동이 한층 심해지며 더욱 크게 울어 젖힌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이러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우선 고연주가 버린 것들을 주워담는 게 좋을 것 같다.
“삐, 삐엑?!”
양손으로 세게 움키자 아기 카오스 미믹이 흠칫 떨었다. 입 부분이 꼭 오므려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나는,
“삐…………?”
최대한 힘을 빼며 살며시 좌우로 열어젖혔다.
“잠깐, 가만히 좀 있어봐.”
“?”
“옳지…. 착하다….”
“?”
무언가 물음표가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으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흐트러진 화살을 모아 담고 무녀 의상까지 차곡차곡 접어 넣은 후, 부드러이 입을 닫아주었다. 진동이나 울음은 어느새 상당히 사그라졌다.
“이건 제가 들고 가도록 하죠.”
“네? 아니 그럴 필요는….”
“제가 아빠, 엄마 카오스 미믹을 갖고 있거든요. 부모와 같이 있으니 안정을 찾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면야.”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도로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무에 그리 좋은지. 발그스름한 눈동자는 나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입가에는 행복해하는 미소가 걸려 있다.
잠시 후.
“목걸이…. 고마워요. 평생 간직할 거예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요.”
“근데,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요?”
“천천히 걸어줄래요? 최대한 느리게….”
“…그럽시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어두운 거리를 거닐었다.
들어올 때는 이삼십 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나갈 때는 약 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