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0
00839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
아틀란타(Atlanta).
북 도시, 해밀 클랜 하우스.
“그럼 다녀올게.”
“괜찮으시겠어요?”
백진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막 문을 나가려던 김유현이 뒤를 돌아봤다.
“뭐가?”
“아무리 동생이라도 연락도 없이 찾아가는 건….”
“뭐, 상관없지 않을까. 수현이는 화내는 모습도 좋은데.”
“클랜 로드. 제발.”
능글맞게 말하던 김유현은 백진하의 표정을 봤는지 싱겁게 웃었다.
“진담이고. 일부러 안 하고 가는 거야.”
“…일부러 안 하고 가는 거라고요?”
“응. 확인하고 싶은 게 있거든.”
“정말….”
폭 한숨을 내쉰 백진하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유현은 로브를 단단히 여민 후 다시 앞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그건….”
“네. 동서남북, 전부 끝내놨어요. 이제 연락만 넣으면….”
“아니. 아직 연락은 하지 마.”
“네?”
“말했잖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게 있다고.”
“……?”
아까와 똑같은 말에 백진하의 고개가 또 한 번 기울어졌다.
그러나 김유현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는 뚜벅뚜벅 걸었다.
그대로 방을 벗어나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
눈을 뜨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을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양팔을 쭉 뻗으며 상반신을 일으키자 어깻죽지가 개운해졌다.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벼운 기분이다.
특히 간밤에 묵은 액을 뽑아낸 하반신에서는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시트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새벽녘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으면서, 고연주는 벌써 정리하고 나간 듯싶다.
“엇차.”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벗었다. 세안하며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니 해는 서서히 중천으로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맑고 조용한, 기분 좋은 아침이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나는 산뜻한 기분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일 층으로 내려가 식당으로 가는 와중 어수선한 소음이 느껴졌다. 통로에는 왁자지껄한 소란과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흠. 일찍 일어나는 클랜원은 벌써 아침 먹고 나갔을 테고, 원래 이 시간대는 한산해야 정상인데?
갸웃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탁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수십의 클랜원이 보였다. 오늘 무슨 축제라도 있는 건가?
“어, 클랜 로드 왔네?”
인기척을 느꼈는지 노노 누님이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 어째서 식당의 총 책임자가 나와 있는 거지? 왜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거야? 이렇게나 식사를 기다리는 인원이 많은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곳곳에서 쏟아지는 인사를 받으며 묻자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응? 아~. 쫓겨났어.”
“하하. 쫓겨난 건 아니고요. 고연주 씨가 오늘 아침을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옆에 앉은 상남 형님이 부연하니 사방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에헤, 어쨌든 기대돼요. 연주 언니가 만든 음식은 오랜만이라서….”
“그럴걸. 오늘 기분도 굉장히 좋아 보이시고. 근래 누님이 그렇게 활짝 웃는 거 처음 봤어.”
“맞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던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여기저기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어제 목걸이를 선물한 영향인가? 하기야 새벽 때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최상의 서비스를 맛보지 않았는가.
인상 깊은 기교로 내게 극치의 쾌감을 안겨준, 정성스러웠던 유방 성교(Mammary Intercourse)를 회상하며 탁자 사이를 가로질렀다. 마침 김한별이 은근슬쩍 빈 의자를 발로 미는 것이 보여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한 찰나, 두어 개의 그림자가 주변에 나타났다. 눈을 돌린 곳에는 담담한 얼굴의 선유운과 우물쭈물 서 있는 차희영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선유운이 돌연 허리를 깍듯하게 숙였다. 차희영은 흠칫 토끼 눈을 뜨더니 황급히 따라 고개 숙였다.
갑자기 식당이 조용해졌다. 이들이 왜 이러나 곰곰이 생각할 즈음, 불현듯 선유운의 오른손에 들린 통이 눈에 들어왔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통에는 검붉은 화살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리고 차희영은 풍성하고 새하얀 무녀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사정을 깨달았다.
“화살은 마음에 드나요?”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네요. 하지만 그건 제가 산 게 아니라 고연주가 산 겁니다.”
“그림자 여왕님은 클랜 로드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선유운의 음성은 무뚝뚝했으나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괜히 과장해서 호들갑 떠는 것보다는 백 배 나으니까. 나는 싱겁게 웃으며 차희영을 바라봤다. 동시에 제 3의 눈을 활성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 이름(Name) : 차희영(1년 차)
2. 클래스(Class) : 백야(白夜)의 무희(舞姬)(Arousal Secret, Sorcerer, Begi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운명에 춤추는 마녀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67.4cm • 51.3kg
8. 성향 : 수줍음 • 순정(Shyness • Pure Love)
1. 꺼지지 않는 지혜의 빛(Rank : B Minus)
1. 대(對) 마(魔) 주술(呪術)(Rank : F Zero)
2. 기원 악가(祈願 樂歌)(Rank : E Plus)
3. –
4. –
1. 마녀 유희(魔女 遊戲)
1. (변경 전) [근력 34] [내구 41] [민첩 49] [체력 57] [마력 90] [행운 6](Total : 277 Point)
2. (변경 후) [근력 38] [내구 45] [민첩 52] [체력 58] [마력 97] [행운 11](Total : 301 Point)
“허?”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혹시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떴으나 눈앞의 수치는 변하지 않았다. 차희영의 마력 능력치가 97포인트로 출력돼 있다.
삼 초 정도 멍하니 보다가 아래 잔여 능력치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백야의 무희를 계승한 이후 남은 6포인트를 모조리 마력에 투자한 것 같다. 이래서야 애송이라 생각할 수 없는 사용자 정보가 아닌가. 물론 아직 경험 측면에서는 한참 부족하겠지만.
“잘 어울리네요.”
“가, 감사…. 합니다….”
웃으며 말하자 차희영은 낯을 잔뜩 붉히며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희영아~. 그러면 안 돼요. 적어도 고맙습니다는 제대로 말해야지.”
그때 어디선가 몹시 너그러운 목소리가 차희영을 꾸짖었다. 주방 쪽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어느새 문을 열고 나온 고연주는 양손에 커다란 냄비를 든 채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정적이 흐르던 식당은 이내 아까처럼 시끄러워졌다. 물씬 흐르는 고소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가끔 탁자를 쾅쾅 두드리는 소음도 들리는 것이 배고픈 클랜원이 한두 명이 아닌 듯싶다.
맛있겠다거나, 빨리 달라는 등의 환호 속에서, 고연주는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차례대로 음식을 들고 나왔다. 가끔 천연스레 뛰는 걸음으로 나올 때마다 가슴에 얹힌 블랙 다이아몬드가 찰랑거리며 사방으로 광채를 뿌렸다.
“우와, 언니! 그 보석 목걸이는 뭐예요? 정말 아름다워요!”
“고마워~.”
“그러게. 진짜 예쁘다. 어디서 산 거예요?”
“사기는. 선물 받은 거야.”
“선물이요? 누가 사줬는데요?”
“후후. 글쎄?”
고연주는 모호한 빛을 비췄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더니, 곧 푸짐하게 쌓인 음식 그릇을 들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잠시 후, 고연주는 내 앞으로 살짝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목걸이 고마워요. 쪽.”
속삭이듯 말하는 동시,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
갑자기 귀가 먹먹해졌다.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꽥꽥 소리 지르거나 탁자를 쾅쾅 두드리는 등, 전보다 배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음이 식당을 가득 채웠다. 고연주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사뿐사뿐 걸어가는 뒤태를 하염없이 바라볼 즈음.
시이이잉….
문득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한두 군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
“하….”
왼손 약지의 반지를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김한별.
“후후….”
상냥하게 웃고는 있지만, 실눈으로 노려보는 임한나.
그 외에도 사방에서 한기가 몰아쳤고, 이유정의 “나는? 나느으은?” 이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내가 대단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수저를 들고 말았다.
다음부터 선물을 살 때는, 모두의 것을 같이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가시방석 같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도망치듯이 집무실로 돌아왔다. 혹시 득달같이 쫓아오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다들 업무가 있는 것 같아, 크게 안도하며 비비앙을 호출했다.
책상에는 미리 준비한 마력 영약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근래 고민이 많은 것 같던데 이걸 보면 굉장히 기뻐하지 않을까.
어차피 주기로 작정한 거, 나는 호출석을 누른 채 여유롭게 기다렸다. 어쩌면 마지아에 있을지도 모르니 오는 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뚜벅뚜벅….
그렇게 생각한 찰나, 예상이 빗나갔다.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설마 벌써 도착한 건가? 이상하네. 아까 식당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똑똑.
“클랜 로드. 손님이….”
“손님? 들어와.”
달칵,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칠흑색 로브를 걸친 훤칠한 키의 사내였다. 누군지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형?”
“그래, 오랜만이다.”
형은 살짝 웃고는 안내인에게 가볍게 머리 숙여 묵례했다.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한, 말 그대로 의외의 방문이다.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형이 의자를 향해 눈짓했다.
“어, 앉아.”
“고맙다. 혹시 문전 박대당하는 거 아니냐고 진하가 많이 걱정했거든.”
피식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을 유심히 살폈다. 별것 아닌 일이라면 안부나 물으러 왔다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형의 얼굴은 미소는커녕, 잔잔히 가라앉은 빛이 가득했다. 적어도 놀러 온 건 아니구나, 그렇게 직감했다.
“그래서, 무슨….”
“좋아 보인다?”
“……?”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네가 그렇게 밝아 보이는 거,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형의 말에 나는 의미 없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혹시 키스 자국을 보고 저러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형은 차분히 머리를 저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칭찬이니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그게 너다운 것 같으니까.”
“나답다고?”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처음 너를 보고 내가 아는 동생이 맞나 의심했거든. 아, 나중에 얘기를 듣고 이해는 했지만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런 데서 쉬이 꺼낼 얘기는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바로 본론을 요청했다. 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냥….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응?”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일 회차 이 회차를 떠나, 현재의 너에게?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김수현이라는 사용자의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그런 만큼 정말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뭔데.”
“그전에,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화 안 낼게. 말해봐.”
바로 약속하자, 형은 잠깐 입을 닫았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순간,
“…수현아.”
느닷없이 음성이 가라앉았다.
형은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