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1
00840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
“혹시, 여기서 계속 살 생각은 없어?”
말이 나온 순간,
“…뭐라고?”
반사적으로 반문하는 동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여기서 계속 살 생각 없느냐고. 집…. 아니, 예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홀 플레인에 눌러앉을 생각은 없느냐. 이 말이야. 사용자로서 말이지.”
그러나 형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예전 세상’이라는 말소리가 상당히 거슬린다. 형은 느닷없이 왜 이런 말을 꺼낸 걸까? 도대체 어떤 의도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이러는 와중에도 형은 소름 끼칠 만큼 태연한 얼굴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것이 내 반응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화내지 않는구나.”
“갑자기 무슨…. 뭐?”
“이 말을 꺼내면 네가 펄쩍 뛸 줄 알았거든. 조금은 욕먹을 각오도 했고. 그런데 의외이기는 하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러자 형이 살며시 두 눈을 치떴다.
“나쁠 건 없지 않나?”
그렇지 않으냐는 듯이 말을 잇는다.
“나쁠 게 없다고?”
“안 그런가? 생각해봐. 나나 너나 지금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고. 아니, 자리 잡은 정도가 아니지.”
“고작 그것 때문에.”
“물론 가족이나 친구가 그리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내가 너보다 이 년이나 먼저 들어왔음에도 지구의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또 제대로 형 노릇도 했다고 하니, 너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최소한 부모님은 모르시겠지.”
“형.”
“그리고 탁 까놓고 말해서…. 그래, 일이 잘 풀려서 돌아간다고 치자. 그럼 그때 네 처지는 더 심하지 않을까?”
“심하다고?”
“그렇잖아. 지구에는 또 하나의 네가 있기라도 하지, 여기서는 네가 아예 사라져버리는 건데. 이렇게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이제 너는 홑몸도 아니잖아.”
문득,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뱃속의 끓는 기운이 올라오다 명치에 턱 걸린 듯한 느낌.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위, 재산, 명예, 그리고 인연….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로 돌아가겠다…. 감당할 수 있겠어?”
“…….”
“이것뿐만이 아니지. 지구는 이곳과는 다르게 아주 평화로운 세상인데, 십사 년 넘게 홀 플레인에서 살아온 네가.”
“형이.”
결국에는 말을 끊어버렸다. 더 이상 듣다가는 가슴이 퍽 터질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형은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왼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형이…. 어떻게 이래.”
말을 꺼낸 찰나, 나를 쳐다보던 두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형은 알고 있잖아.”
겨우 말을 이었지만,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아니 시야도, 숨소리도, 내가 인지하는 모든 감각이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추스르려 애썼으나 외려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그럼 형은, 아니 형이 이러면 안 되잖아. 형만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때였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심정으로 돌아왔는지…!”
“내 핑계 대지 마.”
낯설다 생각될 만큼 예리한 음성이 들려온 순간,
“내가 너한테 살려달라고, 이렇게 해달라고 했어?”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질끈 눈을 감았다.
형은….
‘혹시 내가 죽으면 다시 살리지는 말아줘.’
‘왜냐고? 이상하잖아. 죽어도 다시 살리면 된다니. 내 목숨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수현아….’
‘도망쳐…. 너라도 살아남아….’
…그러지 않았다.
떠올린 순간, 돌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동시에 형의 말이 이어졌다.
“확실하게 말하는 게 낫겠지. 나는 여기서 살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너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럼….”
“아까도 말했지만 네 진정한 속내를 알고 싶은 거야.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변했는지.”
“그걸 왜 나한테….”
스스로 들어도 잔뜩 쉰 음성.
“네가 모든 것을 되돌린 장본인이니까.”
형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하고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는 것이 내가 어떤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탈력감에 삼켜져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왜냐면….
“…미안하다.”
그때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늦게 눈을 들자 형은 이미 소파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형.”
“내일 정오에 공식 발표를 잡아놨다.”
문고리를 잡으며 우뚝, 걸음이 정지했다.
“발표?”
“이미 말은 맞춰놨어. 중앙은 물론, 동서남북 도시 모두…. 정말 많은 사용자가 모일 거야. 아마도 말이지.”
“나는 전혀 듣지 못했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별것 아닌 일이야. 그리고 계획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렇게 말한 형은 얼굴을 반쯤 돌려 나를 바라봤다.
“중요한 건 너지.”
“내가…?”
“복잡해 보이는 것 같으니 긴말은 안 하마. 내일 공식 석상에는 당연히 네 자리도 있다. 내일 참가할지 안 할지는 네 자유고.”
“안 가도 된다는 거야?”
“네가 오면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거고, 아니면 그냥 간단하게 발표하는 걸로 끝낼 거야. 그러니 오늘 대답은 내일 참가 여부로 듣는 걸로 하자. 지금 바로 말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잠깐만.”
“그리고 여기서 미리 말할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무조건 네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생각이다. …이건 진심이야.”
“형!”
철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형은 바람처럼 모습을 감췄다.
“…….”
나는 한동안 형이 있던 자리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머리를 젖혀 천장을 쳐다봤다.
시야에 보이는 상앗빛 문양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마를 맴도는 강한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감은 눈을 뜨지는 않았다.
차분히 호흡을 고르자 머릿속도 조금은 가라앉은 듯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뿐만이 아니지. 지구는 이곳과는 다르게 아주 평화로운 세상인데, 십사 년 넘게 홀 플레인에서 살아온 네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 아니, 정말로 듣기 두려웠던 말. 그래서 생각지도 않고 말을 끊었다. 설마 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야!”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면전을 때렸다. 황급히 눈을 뜨고 고쳐 앉자 눈앞으로 허여멀건 한 것이 가물거렸다. 그제야 누군가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왜 불러도 말이 없어? 노크도 몇 번이나 했는데.”
비비앙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책상 바로 앞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자 조금이나마 시야의 초점이 돌아왔다. 비비앙은 어디 아프냐는 듯 의아히 눈썹을 치켰다.
“호출이 와서 기껏 달려왔더니 팔자 좋게 자고 있네~.”
그러나 곧 흥, 콧소리를 내며 양손에 쥔 것을 책상에 텅 내려놓았다. 축구공 크기만 한 두 주머니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건…?”
“금화. 아마 삼백칠십일만 금화 정도 될 거야. 클랜 자금에 보태 써.”
“삼백, 뭐? 이걸 어디서 난 거야?”
“에, 실은 연구 성과물 중에서 경매장에 올린 게 있거든? 그냥 장난삼아 올린 건데, 이렇게 비싸게 팔릴 줄은 몰랐어.”
비비앙은 아랫입술을 내밀며 어깨를 들먹였다. 경매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낙찰된 물품의 대금은 칠십 퍼센트 판매자가, 삼십 퍼센트는 주최 측이 가져간다. 즉 비비앙이 말한 액수를 역산해보면 원금은 정확히 오백삼십만 금화가 나온다.
“…대단한데.”
헛웃음을 흘리며 칭찬하자 비비앙은 가슴을 쭉 펴며 콧대를 들었다.
“뭐 내가 대단한 게 하루 이틀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왜 부른 거야?”
맞다. 그러고 보니 줄 게 있었지. 원래는 살짝 으스대면서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서랍에서 검은색과 흰색 영약 두 개를 동시에 꺼내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1. 이름(Name) :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근력 51] [내구 52] [민첩 58] [체력 47] [마력 94] [행운 74]‘사멸 무저갱’ 원정으로 얻은 영약은 제한 조건 마력 95포인트 이하로, 복용 시 마력 상승 수치는 1포인트. 그리고 경매장에서 구매한 영약은 동일 제한 조건이며, 복용 시 마력 상승 수치는 2포인트에서 4포인트 사이.
즉 원정, 경매장 영약 순으로 먹으면 두 개 모두 효과를 볼 수 있다. 못해도 97포인트까지는 올라가고, 최대 99포인트까지 노릴 수도 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왜 불렀냐니까?”
“아,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채근하는 듯한 말투에 영약 두 개를 얼른 앞으로 밀었다. 비비앙은 눈을 홉뜨더니 호기심 어린 기색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후.
“어…!”
역시나. 천성이 연금술사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예전에 영약을 만든 경험이 있으니 바로 알아봤을 수도 있겠다. 두 영약을 번갈아 살피던 두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거 설마…?”
“그래, 마력 영약이야. 근래 마력 부족으로 소환에 고민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라?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원한다면 구즈 어프레이즐을 사용해도 좋고.”
“기, 김수현!”
“단, 복용 전에 꼭 주의해야 할 게 있어.”
나는 영약을 복용하는 순서에 관해 설명했다. 무조건 검은색 영약을 먼저, 흰색 영약을 두 번째로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비비앙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쁨과 감동이 섞인 낯빛을 비췄다.
“야~. 너 뭐야 진짜~.”
“……?”
“미리 언질이라도 주던가. 나 진짜 깜짝 놀란 거 알아? 지금도 심장이 막 벌렁거린다고!”
“하하….”
양손에 영약을 꼭 쥔 채 방방 뛰는 등, 비비앙은 온몸으로 환희를 표현했다.
원래는 같이 기뻐해야겠지만, 나도 모르게 살그머니 눈을 돌리고 말았다. 왜인지 돌연히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까닭 없이 거북한, 그런 기분. 그러자 소란스럽던 기척이 이내 시들해지는 걸 느꼈다.
“저, 김수현?”
“응?”
“너…. 괜찮은 거야?”
“뭐가? 이상한 건 없는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실은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 보였거든.”
“아…. 별것 아니야.”
무언가 견디기 힘들다. 나는 머리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응? 어디 나가?”
주섬주섬 옷을 입자 비비앙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미안. 약속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
거짓말이다. 약속도 없고 바로 나갈 필요도 없다. 사실 이대로 문을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여전히 바쁜가 보네.”
그대로 지나치려는 찰나, 비비앙의 눈동자에 서운해하는 빛이 스쳤으나, 이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복용 순서를 거듭 강조한 후, 바쁜 체 걸음을 놀렸다. 그때였다.
“김수현!”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낭랑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흘끗 눈을 돌리니 비비앙이 양팔을 번쩍 올리고 있었다. 천장으로 뻗은 두 손은, 곧 정수리 쪽으로 둥글게 휘어지며 하트 모양을 그렸다.
“사랑해! 정말 정말 고마워!”
비비앙이 활짝 웃는다.
그러나 나는, 한 번 선웃음 짓는 걸로 화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서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도망치듯이 걸어서인지는 몰라도, 무의식적으로 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중간중간 나를 부르는 여러 음성을 들었으나 그냥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통로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일 층으로, 일 층에서 입구로, 입구에서 정원으로….
…그럼, 이제는 어디로?
어디론가 가고 싶은데, 갈 곳을 모르겠다.
우스운 방황이라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정문을 벗어나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염없이 걷던 와중, 갑작스레 툭 걸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자, 발끝이 길고 네모나게 다듬어진 단단한 벽돌과 맞닿아 있었다. 그 벽돌이 올라가는 계단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멍하니 눈을 들었다.
그곳에는.
“…….”
새하얀 신전이 우두커니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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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설마 그렇게 싫어하실지는 몰랐어요….
앞으로는 절단 안 할게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