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2
00841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
소환의 방은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사방이 밀폐된 일종의 공동(空洞)이다. 그럼 응당 어두컴컴해야 정상이건만, 특이하게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은 흐르고 있다. 이 휑뎅그렁한 잿빛 일색의 공간을 밝히는 근원을 따라가 보면, 아마 중앙 제단에 홀로 앉은 한 천사를 볼 수 있을 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 고요히 눈을 감은 천사는 신비로우면서 아름답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혹시 이 공간은 시간이 정지한 게 아닐까, 이런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오직 날개만이 처연히 흔들릴 뿐, 가만히 앉아만 있는 모습은 꼭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 여인을 보는 듯하다.
그때였다. 물결처럼 흐른 날개가 빛을 점점이 뿌려낸 순간, 공허한 공간이 어른거리더니 진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한 사내가 빛을 뚫고 나타난 것과 천사의 고요가 깨진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마침내 눈을 뜬 천사가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앞을 응시한다. 잠시 후, 고운 눈매가 순식간에 치떠졌다.
“사용….”
말이 나오려는 찰나, 끊어졌다. 사내, 아니 김수현은 언제나처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딱딱히 굳은 얼굴도, 예전처럼 경멸하는 눈빛도 빛내지 않는다. 오히려 낯빛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하고, 지친 걸음걸이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어지럽기 짝이 없다. 축 처진 어깨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비 맞은 생쥐 꼴처럼 우스우나, 웃을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니까.
결국, 정처 없이 방황하던 걸음이 멈춘 곳은 소환의 방, 언제나 서던 그 자리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김수현은 아무런 말도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세라프의 입도 몇 번이나 달싹였으나 결국에는 다물어졌다.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초점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말없이 쳐다보는 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그러나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 때문이었을까? 길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행동한 건 세라프였다. 제단을 짚고 몸을 일으킨 순간, 등 뒤의 날개가 선연히 일어나 눈 부신 빛을 뿜었다. 그대로 공중으로 올라, 김수현이 있는 곳으로 헤엄치듯이 향한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눈앞에서 멈춘 세라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상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천사였건만, 놀랍게도 김수현은 거부하지 않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펄펄 끓는 볼을 식혀주자, 비로소 긴 한숨을 토해냈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조금이나마 또렷해진 걸 확인한 세라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속삭거리는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그냥 의례적인 인사말이었지만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갈 곳을 찾지 못하던 이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말이었다. 김수현은 안도한 얼굴로 눈을 감고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딸려 들어가듯 사뿐 내려앉은 세라프는, 활짝 펼쳤던 날개를 둥글게 모아 감싸며 김수현을 끌어안았다.
잠시 후, 세라프의 어깨에 기댄 김수현의 얼굴에서 고른 숨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
어른어른 정신을 차렸을 때 김수현은 머릿속이 흐리멍덩하다고 느꼈다. 사실 도망치듯 방을 나간 이후로는 무엇 하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나간 것 자체가 꿈인지도 모른다. 비비앙을 보낸 후 까무룩 잠이 들었고, 누군가 몰래 침대로 옮겨주었을 것이다.
김수현은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침대에 얼굴을 비비며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어나면 상황을 알 수 있겠지만 계속 눈을 감았다. 꿈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을 받쳐주는 침대나 머리까지 덮인 이불의 감촉이 너무나 따스하다. 심지어 혼란스럽던 정신이 편안히 치료되는 기분이었다.
“아니, 안 되지.”
문득 끓는 듯한 쉰 음성이 흘러나왔다. 김수현은 두어 번 머리를 털었다. 막 깨어난 머리는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용케 형의 공식 발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이 마약 같은 감촉에서 깨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선 시간을 확인하고 향후 행동을 정할 셈이었다. 그때였다.
“이제 정신이 드셨습니까?”
잔잔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매우 선명했다. 김수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희디흰 젖무덤과 일자로 그어진 가슴골이었다. 멍하니 눈을 올리니 담담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연록 빛깔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은은히 빛나는 은백색 머리카락과 몸을 두르고 있는 은은한 날개 한 쌍까지 확인한 순간, 김수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
“괜찮습니다.”
세라프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몹시 당황한 김수현을 응시하며 차분한 태도로 말을 잇는다.
“소환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사용자 김수현의 정신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소환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렇습니다. 이유는 모르나 수치상 심신이 극한까지 몰린 상태였고, 바로 수면에 들었습니다.”
“…….”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담당 사용자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 또한 도우미의 의무니까요. 어제보다는 상당히 호전됐지만…. 괜찮으시다면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망연한 두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말을 마친 세라프가 다시 한 번 살그머니 품에 안았기 때문이다. 꿈결에 느꼈던 감촉이 도로 찾아와 전신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내심 당황과 부끄러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감각에 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이내 갈등의 빛이 사라지며 김수현은 아이처럼 품에 묻혔고, 그래서 보지 못했다. 세라프가 기쁘게 미소 짓는 모습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얌전히 안긴 채 차곡차곡 기억을 정리하던 김수현은, 문득 홀연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세라프.”
“말씀하십시오.”
“어디까지나 만약인데.”
“네.”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계속 산다면…. 어떻게 생각해?”
“…….”
김수현은 세라프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볼 수는 있지만,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저 등을 쓸어주던 손길에 살며시 힘이 들어간 것으로 반응을 짐작할 뿐. 사실 속으로는 창피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토록 소망하던 제로 코드를 얻었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겁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진심으로 홀 플레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걸 원하는 겁니까?’
‘그 십 년간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다시 반복하겠다는 겁니까?’
물론 현재의 세라프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쨌든 수차례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빡빡 우겨 돌아온 게 누군가. 그렇게 한 주제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스스로 절감하는 중이었다.
그때 세라프가 입을 열었다.
“개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응?”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홀 플레인에서 계속 살고 싶다. 이 두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동에는, 각각에 걸맞은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그 이유를 서로 비교하고, 더 끌리는 것으로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합리적이라….”
김수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직도 쑥스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세라프를 등지고 허리를 웅크렸다.
“있잖아, 끌리는 게 없으면?”
“네?”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게 아닌, 둘 다 똑같이 오십 대 오십이면? 그럼 어떡해?”
“후후….”
세라프는 가볍게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등 돌린 김수현의 어깨를 살짝 붙잡고 스리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경험에 근거합니다.”
“생각이 변했다면, 그 이유는 경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수현은 이미 이유를 알고 있을 겁니다. 모종의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고, 어떤 차이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선택하기 어렵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앞으로 겪을 경험도 결정에 영향을 미칠 테니, 조금 미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단, 한 생각에 강박 관념처럼 얽매일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겪은 경험입니다.”
“수현이 스스로 느끼기에 그 경험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김수현이 반응을 보인 건,
“변한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라프가 ‘변화’를 언급했을 때였다.
돌연히 상반신을 벌떡 일으킨 김수현의 낯에 한껏 놀란 빛이 스쳤다. 몽롱하던 머리에 비로소 한 줄기 이성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이 변했다, 어떤 차이를 느꼈을 수도 있다, 강박 관념처럼 얽매일 건 없다, 변한다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 네 문장이 이어지는 순간, 한 생각이 뇌리를 강타했다.
김수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세라프를 바라봤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다. 그냥 단순한 추측일 수도 있다. 세라프도 만약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살을 붙여 생각하면 너무 딱 맞아떨어진다.
그래, 꼭….
“세라프, 너 설마….”
“그냥 제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담담히 말한 세라프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물 흐르듯 허공을 날아 제단에 안착한 후,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나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뭐?”
“이미 정오가 지났습니다.”
“…응?”
김수현이 미간을 좁히자 세라프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으로 반투명한 영사막(映寫幕) 같은 것이 생성되더니 커다란 광장의 풍경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내가 단상에서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고 있었으며, 주변은 사용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공식 발표!”
김유현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김수현이 소리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분명…!”
“어제 쓰러진 이후, 정신 안정이 최우선이라 판단, 제 권한으로 강제로 수면시켰습니다. 클랜에 전령을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그럼 내가 여기 하루 넘게 있었다는 소리야?”
“공식 발표는 시작한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에 김수현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가시렵니까?”
그러한 찰나, 세라프의 음성이 소환의 방을 울렸다. 김수현은 포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흘끗 뒤를 돌아봤다.
“가시겠다면 막지는 않겠지만….”
“……?”
“아마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
뜻 모를 말이었다. 김수현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꿀꺽 삼켰다. 사실 차오르는 의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우선.
“…그래. 곧 다시 올 거야.”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포탈로 몸을 묻었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
한편, 같은 시각.
“…말이 길었군요. 여하튼 이 건에 관하여 해밀 로드의 명확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질문을 끝낸 사내가 자리에 앉고, 김유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수십, 수백 수준이 아니었다. 수천, 어쩌면 일만 쌍이 넘을지도 모르는 눈초리가 모조리 쏠려 있다. 이러한 상황치고 낯은 꽤 담담해 보였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김유현은 스리슬쩍 옆을 쳐다봤다. 단상에는 또 하나의 자리가 마련돼 있었으나 앉아 있는 사용자는 없다.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머셔너리 클랜원은 참석했지만, 머셔너리 로드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게 네 선택인가….’
조금이라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뿐, 씁쓸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미 김수현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고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답변하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사실…?”
불현듯 김유현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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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어라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그렇잖아요.
저번 후기에 ‘내가 아직도 로유진으로 보이니?’ 이때처럼….
또 제가 제 무덤을 팔까 봐, 이제 무슨 말을 하는 게 무섭고 두려워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