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4
00843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
형의 말은 ‘사용자’라는 존재가 바라는 것을 정확히 짚어냈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여기서 한술 더 떠, 형은 말만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해밀은 어디까지나 머셔너리의 대리라는 점을 내세우며, 준비만 제대로 갖췄다면 지금 바로 클랜 하우스로 찾아와도 좋다는 말을 끝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해밀 클랜의 공식 발표는 엄청난 환호 속에서 성황리에 마쳐졌다.
그리하여 흥분한 군중을 뚫고 간신히 성으로 돌아온 후.
“그래서.”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제 계획을 속 시원하게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이렇게나 장단에 맞춰줬는데.”
쭉 기지개를 켜던 형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미소 지었다. 한 차례 시원스레 웃더니 천천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이건 계획이라고 볼 수도 없어. 그냥…. 일종의 쇼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일부에 불과해.”
그렇게 말한 형은 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쇼’라고, 아직 일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나는 지그시 형을 응시했다.
강철 산맥 때도 한 번 느꼈지만, 형의 장점은 느리다는 것에 있다. 한소영이 과단성 있는 판단과 과감한 행동으로 신속하게 진행하는 스타일이라면, 형은 세세한 안배로 미리 판을 짜놓고, 하나씩 주워담으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게 특징이다. 말인즉 이제 막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려나.
“우선은 이것부터.”
잠시 후, 형이 책상으로 두툼한 봉투 두 개를 올려놓았다. 하나 살짝 열어보니 빼곡히 들어찬 낡은 기록 더미가 보였다.
“그때 비밀 도서관에 서재가 총 세 개 있었잖아?”
“응.”
“네가 남기라고 한 중앙 서재에서 가져온 거야. 맹세코 기록은 읽어보지도 않았고, 모조리 꺼내서 섞은 다음 삼등분한 거다.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더라.”
“갖고 싶은 거 가져도 상관없는데.”
피식피식 웃으며 봉투 두 개를 간수했다. 해밀은 이미 자기 몫을 챙겼을 테고, 여기서 하나는 우리가 갖고 남은 하나는 이스탄텔 로우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이거.”
형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아까보다 커다란 봉투를 추가로 올려놓았다. 쿵 소리가 울리는 것이 척 봐도 방금 봉투보다 갑절은 두꺼워 보였다.
“이건 뭔데?”
“서재 하나를 통째로 가져왔지.”
“그런 것 같은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느냐고.”
“이건 네가 나눠줘야 하니까.”
형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혼자서 나눠주는 건 힘드니 너도 같이하라는 말은 아닐 테고.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로 턱짓하자 형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혹시 스무고개 좋아해?”
“굉장히 싫어해.”
“하하, 그래도 이것만 말해봐. 내일부터 우리 해밀은 굉장히 바빠질 거야. 아마 기록을 받으러 온 사용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겠지?”
“당연하지.”
“일단 찾아온 이들을 크게 묶어 사용자라는 집합으로 보고. 그럼 이 집단을 단위로 구분해본다면?”
“단위? 단위래 봤자 대형 클랜, 중견 클랜, 소형 클랜, 캐러밴, 개인…. 이 정도?”
“좋아.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중견 클랜 이상은 그렇다 치고, 소형 클랜이나 그 이하는 과연 기록을 받을만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해?”
“…….”
그 순간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방금 형의 질문에는 뼈가 있었다. 사실 아까 공식 발표를 들으며 유일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형은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나누겠다.’ 라는 슬로건으로 커다란 환호를 받았다. 확실히 겉보기에는 좋으나, 잘 생각해보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다. 가령 우리 머셔너리조차도 간신히 공략한 ‘야만 왕의 무덤’ 같은 원정을, 과연 소형 클랜 이하의 원정대가 감당할 여력이나 있을까?
“흠. 확실히 어려운 경우도 발생할 것 같기는 한데….”
“그렇지. 물론 이 기록 하나하나가 갖는 가치는 알고 있어. 그래서 지금도 우리 클랜원이 열심히 필사하는 중이고, 또 거리가 가까우면서 쉬워 보이는 것들로 구성하기도 했고. 여하튼 그냥 버리는 짓은 최대한 지양할 생각이다.”
“필사라. 그것참 힘든…. 뭐라고? 손을 댔다는 거야?”
“나눠줄 것들은.”
깜짝 놀라 물어보자 형은 담백이 긍정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차라리 중견 클랜 이상을 타깃으로 잡았다면 적어도 왜 그랬는지 이해라도 했을 터. 그러나 거리가 가깝고 최대한 쉬워 보이는 기록들을 끼워 넣었다는 건….
“형?”
“맞아. 중견 클랜 이상이 아닌, 소형 클랜 이하의 집단에 주로 나눠줄 생각이야.”
젠장. 나름 각오하기는 했다만, 형은 상상 이상으로 일을 복잡하게 계획한 듯하다. 일단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왜 그랬는데?”
“생각해봐. 기록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져서 나누면, 결국에는 기득권으로 볼 수 있는 세력이 다 가져갈 수밖에 없잖아. 모르긴 몰라도,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을걸? 딱 나눠주고도 욕먹는 꼴이지.”
“그럼 애초에 그렇게 발표하지 말던가. 그리고 형 말대로 한다고 해도, 중견 클랜 이상의 반발은 어떡할 건데?”
“그걸 달래는 게 바로 네 역할이야.”
반문한 순간, 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며 아까 꺼낸 두툼한 봉투에 손을 얹었다.
“물론 나도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적당히 완곡하게 말하면서 머셔너리 클랜을 슬쩍 들먹이는 거지.”
“그래서 이걸 나한테 넘긴 거야? 찾아오면 나보고 주라고?”
“그래도 되고, 아니면 네가 직접 찾아가는 방법도 있고.”
“형. 미안하지만 이해가 안 돼. 왜 일을 까다롭게 만드는 거야? 그냥 나눠주면 끝나는 일이잖아.”
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더니 담담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저것 생각 않고 그냥 아무렇게나 뿌리면 편하기는 해. 그런데 말이다. 나라고 좋아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 건 아니다.”
“그,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수현아. 나는 이번 일을 하면서 최대한 너를 들먹일 생각이다.”
“……?”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이건 머셔너리 클랜이 여러분에게 베푸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마워하세요. …이런 단순하고 멍청한 뜻이 아니야. 어떻게든,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머셔너리와 연관 지을 거라고.”
그렇게 말한 형은 살며시 몸을 돌렸다. 테라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걸으며 말을 잇는다.
“나는 왕이 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 첫 번째는 무력, 두 번째는 명분, 그리고 세 번째는 민심.”
“왕?”
왕이라. 굉장히 뜬금없는 말이다. 그러나 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마. 물론 좋아하는 사용자도 있겠지만, 어쨌든 머셔너리 클랜을 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은 거, 너도 인정하지?”
그렇기는 하다. 강철 산맥의 활약으로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북 대륙 시절부터 뿌려진 뿌리 깊은 선입견은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이지.
“하지만 내가 네 이름을 걸고 소형 클랜 이하의 집단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면? 머셔너리 클랜의 인식을 바꾸는 데 상당히 도움되지 않을까?”
“그래. 좋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럼 다른 건?”
“들어봐. 서 대륙과의 전쟁이나 강철 산맥 공략 등등…. 이제껏 홀 플레인에서 일어난 대사(大事)는, 최소 중견 클랜 이상의 참가와 대형 클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잖아?”
“그런데?”
“그런데? 가 아니지. 앞으로 악마와 싸울 때 그 집단의 힘은 필수 불가분해. 너 혼자 싸울 게 아니라면,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게 좋을 텐데?”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그 집단과 직접 만나면서 친분 관계를 쌓으라는 거야?”
“그렇지. 사용자라면 응당 이익을 좇기 마련이니까. 현재 홀 플레인의 특성상 장악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필요할 때 너를 지지해줄 수는 있을 거야.”
“하.”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형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은 민심을 얻을 테니, 나보고는 명분을 만들어놓으라는 소리였다.
하기야 사용자가 이익을 좇는다는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형이 잘못 생각했다.
“글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응?”
아까 공식 발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해도 계속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는가.
대형 클랜은 특히 더욱 그렇다. 손익 계산에 굉장히 민감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딱히 아쉬울 게 없는 이들이다. 고작 기록 몇 개 던져준다고 과연 ‘아이고, 이렇게 챙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머셔너리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반응할까?
아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이건 단언할 수 있다.
생각한 바를 얘기하자 형은 씩 웃었다. 나름 맹점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태연한 반응이었다. 마치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다는 듯이.
“방법이 있다면?”
“뭐?”
“내가 말한 방법으로, 확실하게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떡할래? 머셔너리 로드.”
“가, 갑자기 뭔….”
머셔너리 로드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걸까. 형은 더 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입구에 걸치듯이 서서는 잔잔한 눈으로 테라스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왜인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느낌이었다.
“수현아.”
그렇게 한동안 밖을 응시하더니 문득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지금…. 북 대륙에 수호자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번에 맹아라가 부랑자에게 살해당한 이후, 현재 북 대륙은…?
잠깐, 잠깐만. 왜 느닷없이 이 얘기를 하는 거지?
“설마….”
“그래.”
형은 천천히 머리를 주억였다.
“네가, 북 대륙의 수호자가 되면 된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너무나 담담하게 뱉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핑 돌았다.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든 형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으나 자꾸만 멍한 기분이 엄습한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현재 중앙 관리 기구 수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알고 있는 사용자에 한해서, ‘수호자’는 기본적으로 대접받는 존재이다. 홀 플레인의 주요한 흐름이 대부분 전대 수호자의 손을 거쳤고, ‘북 대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 라는 목적도 있으니 명분에도 부합한다. 실제로 이효을의 덕을 본 클랜도 적잖고.
그래. 이보다 훌륭한 대안은 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다.
“나보고…. 북 대륙의 수호자가 되라고…?”
“으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심이다마다.”
돌연히 바람이 불었다. 방 안까지 침투한 바람은 구석구석을 시원스레 휩쓸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속에서, 차분한 빛을 띤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침내 나를 돌아봤다.
“왜?”
순간 멍청하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왜냐고….”
문득 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정말로 미안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이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건너뛴 의미가 없어져 버릴 것 같으니까.”
============================ 작품 후기 ============================
아, 드디어 이번 에피소드도 거의 끝나가네요. 사실 워낙 심도 있게 다룰 부분이 많아서 굉장히 고민이 많았는데, 어찌어찌 여기까지 온 게 참 기특해요.(쓰담쓰담)
아무튼, 아마 다음 회, 혹은 다 다음 회를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Eight’이 끝나며, 동시에 북 대륙 이야기도 잠시 막이 내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Seven’부터 에피소드 ‘Five’까지는 악마 + 남 대륙 이야기가 주로 진행될 예정이고요.
사실 에피소드 7에서 5까지는 주인공이 출현 빈도가 극도로 떨어지는 부분이라 걱정이 많습니다만, 우선 중요한 사건 위주로 빠르게 전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일단 에피소드 8 먼저 마무리 짓고, 에피소드 7에 돌입하면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독자 분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