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7
00846 Meanwhile, Same Time : Seven =========================================================================
아침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함을 뽐내던 하늘은, 시간이 흐를수록 붉어져 짙은 황혼을 드리웠다.
노을빛으로 물든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아래서 나는 소리에 이끌리듯이 시선을 내렸다.
석양이 조금씩 저물어가는 무렵인데도 성의 정원은 어수선한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이 시간대면 응당 한가로워야 정상이건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번잡함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나흘 전부터라고 해야 하나.
문득 테라스 아래서 남다은이 한 사내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 보였다. 정확히는 남다은이 쌀쌀맞게 입을 열 때마다 사내가 무척 황공해 하는 얼굴로 꾸벅꾸벅 허리를 굽히고 있다. 청력을 조금 높여볼까.
“시간.”
“예, 예. 집결 시간은 새벽쯤에….”
“장소.”
“예, 예. 집결 장소는 서 도시 정문에서….”
아마 해밀에서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받고 우리 쪽으로 용병을 요청하러 온 사용자 같은데. 남다은의 태도가 건방지기는 하나 개인의 성격이나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다.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사내도 그런 모습을 보며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하기야 무려 검후니까.
개인이 느끼는 풍모(風貌)는 차치하고서라도, 반투명한 색의 관능적인 얼음 갑옷을 걸친 남다은에 비해 사내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좋게 봐도 하루 먹고 사는 캐러밴의 리더쯤 되려나? 여하튼 머셔너리 근접 클래스의 수장이자 S등급 클랜원을 용병으로 구매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말인즉 이제는 가능하다. 내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힌트는 이유정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이유정은 단기간에 엄청난 의뢰를 수행함으로써 초고속 등급 상승을 이뤘다. 그렇게 많은 의뢰를 맡을 수 있었던 원인은, 원래 B등급 정도 되는 사용자가 F등급으로 내려가니 가격 대 성능비를 중시하는 사용자들이 몰린 것에 있을 터.
그 점에 착안해 나는 전 클랜원의 등급을 최소 F등급, 최대 C등급으로 맞추라 지시했다. 물론 실제로 등급이 내려간 건 아니고, 용병 대금에 한해서였다.
형은 이번 일의 초점을 무조건 머셔너리에 맞추겠다고 했으며, 실제로 나흘 동안 무수한 사용자가 찾아왔다. 그러나 대금 가격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더 확실하게 끌어당기기 위하여 특별히 조처한 것이다.
클랜원들도 큰 불만은 없었다. 원래 받아야 할 가격에서 받지 못한 금액은 클랜 재정에서 메워주겠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요금 인하 정책의 효과는 확실했다. 당장 지금만 봐도 성 구석구석 바쁜 기색이 느껴졌다. 비단 남다은뿐이 아니라, 의뢰인을 정중히 배웅하는 차소림이나 묵묵히 설명을 듣고 있는 우정민,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을 탕탕 치는 하승우 하승윤 남매 등 클랜원들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나로서도 최고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의뢰를 많이 맡을수록 성공 시 떨어지는 보상도 기대할 수 있는데, 그중에는 장비 품목도 포함돼 있을 터. 즉 북 대륙의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머셔너리 클랜도 한층 강화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니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누가 듣지도 않건만 혼잣말하며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이 현상에 관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찌 보면 지금 밟아가는 단계는 일종의 당겨쓰기라고 볼 수 있겠다.
원래는 몇 년 후 밝혀질 비밀 도서관을 미리 발견하고 공개해, 아틀란타의 유적을 빠르게 공략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틀란타가 구 북 대륙처럼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때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뉘엿뉘엿 넘어가던 해는 어느새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환하게 불타올라 온 세상을 자줏빛으로 물들였다. 설마 밤까지 있고 싶지는 않은 모양인지, 조금 전 수선하던 정원이 조금씩 잦아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성내가 완전히 잠잠해지기 전까지, 점차 어둑한 땅거미가 깔리는 정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
Meanwhile, Same Time : Seven
한편, 같은 시간.
“그래서….”
루시퍼는 자신의 앞에 부복한 덩치 큰 마족을 응시하며 심드렁히 입을 열었다.
“성공했다는 건가?”
대 악마의 물음. 어떤 질문이든 간에 바로 아랫급의 악마 14 군주도 아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면 마족이라면 즉각 입을 열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마족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잠깐 머리를 들기는 했으나 갈등이 역력한 낯빛으로 우물쭈물하는 중이다.
루시퍼는 갑갑하다는 기색을 비쳤지만 이런 일로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대 악마로서는 드물게 말이다.
“성공했으니까 모이라는 거겠지?”
“그, 그게….”
마족이 살짝 눈을 치떴다가 곧바로 내리뜨며 말을 잇는다.
“아시다시피 워낙 봉인이 심한 터라….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고…. 그냥 겉으로만 확인하기에….”
“정보가 차단됐다는 소리군. 그럼 실패 아닌가?”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패 시 발생하는 특유의 현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벨리알 님과 같이 굉장히 안정된 상황입니다.”
“…….”
이도 저도 아닌, 뭐 하나 확실하지 않은 말이다. 루시퍼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니 마족은 금세 머리를 수그렸다.
기실 루시퍼도 이 소식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의 기다림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없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마치 안 될걸, 실패할 걸 알면서도 복권을 들고 당첨을 기다리는 그런 기분.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결국 루시퍼는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모였다고.”
“예, 예! 루시퍼 님을 제외한 다섯 분 모두가….”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혹여 마음이 바뀔세라 마족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이윽고 조심스레 선도하는 마족을 따라가며 루시퍼는 긴 한숨을 흘렸다. 가는 동안, 어둠이 그늘진 눈을 지그시 감아 서서히 상념에 잠겨 들었다.
‘그때 회동이 끝나고….’
*
“사탄! 사탄!”
악마 14 군주, 혹은 이하의 마족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법한 광경이 벌어졌다. 언제나 차분하고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걸로 유명한 루시퍼가,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으니까. 아마 직속 휘하의 마족들이 목격했다면 정말 조물주가 맞는지 감히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양, 루시퍼는 그저 계단을 내려가는 데만 집중했다. 흡사 막 이별을 통보한 연인을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후, 루시퍼는 간신히 계단 끄트머리에서 사탄을 붙잡을 수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사탄도 기척을 느꼈는지 잠시 걸음이 느려졌다.
“사타아안!”
루시퍼가 벼락같이 소리 지르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흠. 주인이 있는 공간에서는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게 네 원칙 아니었나. 루시퍼?”
사탄이 차분히 말을 걸었으나 루시퍼의 기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외려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며 속을 추스른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결국에는 가장 함축적인 질문을 하나 정하고 말을 잇는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으음?”
“방금 회동 말입니다. 어째서 속행 결정을 내렸느냐는 말입니다!”
“……?”
끝에 가서 다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사탄은 진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루시퍼가 더는 말을 않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우리는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해 회동을 개최했고, 투표 결과 이 대 오로 속행하자는 쪽의 의견이 많았지. 철수는 루시퍼 그대와 나밖에 없었어.”
“사탄도 속행해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결정권은 사탄한테 있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럼 내 결정에 불만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루시퍼가 파르스름한 안광을 뿜었다. 말투도 상당히 도전적인 투였다. 그러나 사탄은 재밌다는 듯이 씩 미소 지었다.
“나쁠 것 없지. 타락 천사의 도전이라면 분명 즐거울 것 같으니.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세력 다툼은 조금 참아줬으면 하는데.”
소름 끼칠 만큼 평온한 대답에 루시퍼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사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농담이다.”
“사탄. 오, 제발….”
루시퍼는 입을 달싹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색함을 느꼈다. 항상 어둡고 은밀하던 사탄에게서 갑자기 까닭 모를 활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유심히 관찰한 루시퍼는 이내 몸을 흠칫 떨었다.
어디까지나 짐작에 불과하지만….
비슷하다고 느꼈다.
대계의 예언이 내려온 이후, 루시퍼는 딱히 신경 쓰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정확히는 중립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상황이 차차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스스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냉철한 이성은 무조건 속행보다는 좀 더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판단을 요구했다. 그래서 악마 14 군주라는 귀한 자원을 낭비하면서까지 사건을 만들었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여러 정보를 얻고 철수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기는 했지만, 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의 소멸이 어마어마한 타격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단, 루시퍼는 그때의 일을 일종의 투자로 생각했으며, 안배하는 과정 자체서는 즐겁다는 감정을 느꼈다.
한데 그때의 자신과 지금 사탄이 모습이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그래, 사탄은 분명 즐거워하고 있다.
그렇게 느낀 순간 루시퍼의 뇌리에 ‘막아야 한다.’ 는 생각이 스쳤다. 한 번 작정한 사탄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들은 현 상황을 손톱만큼도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사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같이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화정과 겁화가 붙었습니다. 하나만 붙어도 기겁할 판에, 둘이나 붙었다는 말입니다. 그 강력한 바알도 끽소리도 못하고 귀중한 목숨 하나를 헌납했다고요.”
“맞아.”
“이뿐만이 아닙니다. 추측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확신하고 있어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나, 김수현 그놈은 분명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제 왜 대계가 패배할 거라고 예언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만심에 젖어 여유를 부리는 동안, 놈은 착실하게 우리의 안배를 제거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마계라면 모를까, 홀 플레인에서는 이제 우리도 장담할 수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탁 까놓고 말해서 우리 편이 없습니다. 심지어 시간조차도 놈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막말로 아틀란타에서 충분한 힘을 비축하고 테라로 진군한다면, 그때는 어쩌실 작정입니까?”
“후후.”
장황히 말을 잇던 루시퍼는 당황한 얼굴로 사탄을 응시했다. 조목조목 설명함에도 반문은커녕, 모조리 인정하고 있다. 그 당당한 태도는 들끓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루시퍼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옥 대공 소환 이후, 저를 제외한 모든 대 악마가 북 대륙을 포기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남 대륙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요.”
“주시가 아니라, 이미 손을 댔지.”
사탄은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채 스리슬쩍 말을 정정했다.
“아무튼, 좋습니다. 그럼 무언가 수라도 있는 겁니까?”
“수?”
“수든 생각이든, 뭐든 좋습니다. 사탄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그러니까 이길 자신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음….”
사탄은 침음을 흘리며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실례인 건 알지만 듣고 싶습니다. 아니, 꼭 들어야겠습니다.”
루시퍼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굳은 얼굴로 상대를 응시했다.
이윽고 사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숨을 깊숙이 들이켜며 천천히 머리를 젖힌다.
“아니.”
루시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예?”
“글쎄…. 나도 영 생각이 나지 않아서.”
“사탄.”
“설령 남 대륙을 손아귀에 넣는다고 해도…. 사실 별로 승산이 보이는 건 아니야. 동 대륙보다야 훨씬 낫지만, 역시나 차이가 있어. 혹시 북 대륙 놈들이 우리처럼 성공에 자만해 아틀란타에 몇 년간 안주 해주지 않으려나…. 이런 생각밖에는 안 들더군.”
“지금 무슨…?”
“뭐, 어쨌든 대계의 예언이 맞았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말한 사탄은 돌연 단숨에 머리 숙여 상대를 직시했다.
“그래…. 루시퍼.”
갑작스러운 시선에 루시퍼가 흠칫한 찰나, 사탄의 시뻘건 동공이 쭉 찢어지며 요요한 빛을 발했다.
“우리는 이미 패배했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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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시작.
에피소드 7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