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8
00847 Meanwhile, Same Time : Seven =========================================================================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탄은 현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또 인정하기도 했다. 심지어 패배했다는 대계의 예언까지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속행을 하겠다? 왜? 루시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그런 겁니까?”
“그런 거?”
“졌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아쉬우니까,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래서 몸부림이라도 쳐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흐흐흐흐.”
그러자 사탄의 동공이 가늘어지며 소슬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루시퍼는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아직 사탄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생각입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긍정 비슷한 대답이 나오면, 결사적으로 저지할 것이다. 그래도 속행한다면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철수할 생각이었다.
소리는 곧 멎었으나 사탄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시퍼. 상당히 재밌는 말도 할 줄 아는군. 설마 내가 그럴 거라 생각한 건가?”
“애매한 대답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퍼는 사탄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원하는 건 하나. 사탄이 어떤 의도로 속행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단순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주먹구구식으로 이끌려가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후후. 뭐 떠나기 전 발악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때 사탄이 앞을 돌아보며 느긋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하려던 루시퍼는 반쯤 열린 입을 닫았다. 이대로 떠나려는 게 아닌, 걸으면서 얘기하자는 무언의 신호를 느꼈다.
잠시 후.
“가능성….”
말문이 다시 열린 건, 계단을 완전히 내려갔을 즈음이었다.
“아직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가능성…. 이요?”
루시퍼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떤 점에서?”
“흠. 혹시 인간의 속담 중 역지사지라는 말을 아나?”
“알고 있습니다.”
“생각을 한 번 해봤거든. 네 추측이 맞는다고 가정하고, 내가 김수현이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말이야.”
“…….”
“아마 나라면 지금처럼은 하지는 않았을 것 같더군.”
사탄이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철저히 의도를 숨기고, 어지간하면 원래대로 흘러가게 놔두었을 것 같아. 물론 비밀리에 나름의 준비는 해야겠지.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때가 왔을 때, 그때 쾅하고 한 번에 터뜨렸을 거야.”
“음….”
“그렇게 됐으면 아마 정말로 답이 없었을걸? 모르는 상태에서 얻어맞는 일격은 꽤 뼈아프니까. …어때, 루시퍼. 이 두 상황의 차이점을 알겠나?”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차이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아리송해 하는 음성에 사탄은 씩 미소 지었다.
“요지는 이거야. 늦기는 했지만, 우리가 지금이나마 알아차렸다는 거.”
루시퍼는 계속 입을 닫은 채 말을 경청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어두웠지만, 사탄의 말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알아차린 이상,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대책을 실행할 수만 있다면,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간단한 일 아닌가.”
“말로는 간단하지요. 그래서, 그 대책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글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어.”
“…예?”
“지옥 대공 소환 이후, 약속한 대로 북 대륙은 포기했잖아?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남 대륙만으로는 부족하고.”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렇지. 어쨌든 우리가 아쉬운 처지이니만큼 상황을 하나로 국한할 수가 없어.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물론, 동 대륙, 서 대륙, 남 대륙…. 전부를 말이지.”
“으음, 동남 대륙은 잘 모르지만…. 서 대륙은 이미 저희 손에 떨어지기는 했습니다만, 이미 효용 가치가 다하지 않았습니까.”
루시퍼가 갸웃하며 묻자 사탄이 설레설레 머리를 젓는다.
“말하지 않았나. 쓸 수만 있다면 모조리 사용한다. 비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서.”
그 말은 루시퍼도 공감하는 바였다. 단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낭비할까 걱정했을 뿐.
“중요한 건, 여기서 하나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거야.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그제야 간신히 만들 수 있다. 예언마저 날려버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사탄의 말이 이어질수록 의문이 시원스레 해결되기는커녕, 외려 의구심이 한층 커져만 간다. 그러나 루시퍼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낮아지는 사탄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부족하다는 생각은 여전해. 동 대륙은 발전 상황이 굉장히 낮고, 서 대륙은 이미 폐쇄됐지. 그나마 남 대륙이 비슷하기는 해도 역시 차이가 있어. 사실 조금 궁금하기도 해. 같은 종족이면서, 왜 유독 북 대륙만 이렇게 독보적인 건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한 사탄은 돌연 킬킬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니까 급기야 이런 생각이 들더군.”
“……?”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 상황을 어찌할 수 없다면…. 결국에는 우리도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고.”
“리스크, 말입니까?”
루시퍼가 순간적으로 반문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 했지만, 도저히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사탄의 말은 간단하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현재의 불리함을 역전할 수 없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만한 새로운 카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카드를 얻기 위해서는….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에 싸인 속행 결정의 진의가 드러난다는 생각에 루시퍼는 뜻 모를 긴장감마저 느꼈다.
사탄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방법 자체는 간단해. 우리로만 예언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예언마저 뒤집을 수 있는 존재를 끌어들이면 돼. 말인즉 외부의 힘을 빌리자는 거야.”
“외부의 힘이요?”
“그래…. 설령, 우리가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우리가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요…?”
“흐흐. 꼭 피조물이나 악마 십사 군주만 씨앗이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안 그런가?”
“!”
그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사탄을 뒤따라가던 걸음이 갑작스레 정지했다. 한껏 가늘어졌던 눈이 순식간에 화등잔만 하게 떠지고, 두 눈동자로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완연히 떠올랐다.
아직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루시퍼는 마지막 말로 인해 사탄의 진의를 조금이나마 알아차린 것이다.
흘끗 눈을 올리며 놀란 숨을 들이켰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사탄의 근거지에 도착한 상태였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한 악마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퍼가 멍하니 손을 뻗는다.
“사…!”
“루시퍼. 이걸 기억해라.”
그러한 찰나, 무거운 음성과 함께 사탄의 걸음 또한 멈춰졌다.
“지옥 대공 소환은 실패가 아니었다는 걸.”
그렇게 말한 사탄은 느릿하게 루시퍼를 돌아봤다.
“…나는, 그 과정에서 가능성을 봤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까닥 앞을 가리키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
“저….”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루시퍼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도착했습니다.”
이미 몇 개월도 더 된 일을 회상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루시퍼의 눈앞으로 어둠에 휩싸인 입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곳에서는 하찮은 마족과는 비할 수조차 없는 짙은 마의 기운이 물씬 흘러나오고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려 다섯 개나.
‘이미 모여 있다고 했던가….’
루시퍼는 걸음을 재촉하며 입구를 통과했다.
안쪽 공간에는 마족에게 들었던 대로 다섯의 존재가 모여 있었다. 하나 특이한 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리리스, 바알, 벨제부브, 아스모데우스, 아스타로트…. 회동만 열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 못해 안달하던 대 악마들이, 오늘따라 웬일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둠이 흐르는 허공을 하나같이 망연한 눈으로 응시하는 중이었다.
기척을 느낀 걸까. 잠시 어수선한 소음과 함께 몇몇 대 악마가 입구 방향을 돌아봤다. 루시퍼는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담담히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루시퍼의 음성은 낮았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모두의 귀를 미세하게 울렸다. 하지만 할 말을 잃은 듯이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다. 오직 리리스만이 어색하게 볼을 긁으며 살짝 자리를 비켜줬다.
루시퍼는 리리스가 내어준 자리로 걸어가며 계속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심히 요동쳤지만, 결국 자리에 서서 가만히 어둠을 응시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여섯이나 되는 개체가 사슬에 얽히고설켜 허공에 매달려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 여섯 존재는 모두 ‘마족’이 아닌 ‘악마’였다.
여담이지만, 사탄은 모든 악마의 왕이라는 칭호답게 악마 14 군주 중 다섯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한데 그 전원이 허공에 걸려 있는 것이다.
한둘이 아닌, 무려 다섯이다. 기실 사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 것과 진배없었다.
루시퍼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려 애쓰며, 왼쪽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프, 사브나크, 아몬, 포르네우스….
그때였다. 다섯 번째로 벨리알까지 확인한 찰나, 루시퍼의 이마가 와짝 찌그러졌다. 악마를 휘감은 사슬은 사지는 물론 전신을 가리고 있었으나, 사이사이 틈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벨리알의 경우, 앞선 악마 14 군주의 상태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네 악마가 씨앗 이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에 반해, 벨리알은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특히 가슴에 일직선으로 그어진 선명한 자상과, 복부에는 아로새겨진 수십의 흉터가 유독 눈에 띄었다. 흘러내린 핏물을 머금은 사슬은 검붉은 빛으로 변색했을 정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듣기로 벨리알은 분명…!”
“저항했다는 거겠지. 선 성향의 힘을 가진 인간이었나 봐.”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누군가 덤덤히 뇌까렸다. 아스타로트가 연초를 입에 문 채 망연히 앞을 바라보고 있다. 루시퍼는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됩니다. 고대 악신을 잠식할 때도….”
“그놈은 잠들어 있었다며. 이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지 않나.”
힘없이 말한 아스타로트는,
“그리고….”
문득 말을 흐리며 스리슬쩍 왼쪽을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는 언제나 뿜어내던 이글거리는 분노가 아닌, 뜻 모를 씁쓸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벨리알은…. 그나마 양호한 거야.”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루시퍼의 머리가 멈칫 떨렸다.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한 것이다.
처음 들어왔을 때 눈대중으로 확인한 사슬에 얽힌 형상은 총 여섯이었다. 그러나 아직 다섯까지밖에 확인하지 못했다.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누군지는 루시퍼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순간 오만 생각이 스쳤다. 루시퍼의 낯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의 빛이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곧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덜덜거리면서도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순간이었다.
빠득!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힘주어 마주 문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흘렀다. 그뿐만 아니라, 꽉 쥔 양 주먹에서도 우두둑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사정없이 떨리던 눈동자는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심하게 흔들리며 강한 불신의 빛을 뿜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스타로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연초를 우물거렸다.
왜냐면, 그곳에는….
“…사탄?”
차마 사탄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웬 걸레와 같은 형상이 걸려 있었으니까.
============================ 작품 후기 ============================
전 회 게헨나에서 지옥 대공으로 수정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독자 분들 말씀이 맞았네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음. 꽁냥꽁냥도 좋지만, 지금은 진도에 집중할 때인 것 같아요. 하하. 이렇게라도 뽑지 않고 계속 북 대륙 이야기만 다루다 보면, 정말로 완결이 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할 때인 것 같아서요. 나중에 중요 사건이 끝나면 또 나올 기회가 있으니, 지금은 너른 양해를 부탁 드릴게요. 🙂
악마 이야기는 다음 회 초 중반에 끝날 계획이고, 이후 바로 남 대륙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피소드 7에서 5로 갈수록 점차 빠르게 진행될 예정이에요. 정확히 에피소드 4부터 주인공의 시점이 돌아옵니다.
물론, 그때는 이미 여러 사건이 벌어져 있겠지요.
PS.
청섬백 / 그래도 최종적 들인데… 앞으로 분발하길.
사탄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