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9
00848 Meanwhile, Same Time : Seven =========================================================================
가슴은 날카로운 손톱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서너 개의 줄이 고랑처럼 길게 패여 있다. 상흔은 상당히 깊어 희멀건 한 뼈까지 언뜻 비쳤다. 게다가 사슬이 상처 안쪽까지 들어가 헤집었는지, 철쇄 고리는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채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쪽 팔은 죄어드는 사슬을 견디지 못한 듯 아예 몸에서 분리된 상태였다. 사지가 그렇게 갈가리 뜯긴 채 찢겨 늘어난 근육으로 간신히 이어진 형상은 몹시 끔찍했다. 바닥에 얼룩지다 못해 질척거리는 검붉은 웅덩이는 당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이래서야 아까 마족이 우물쭈물하던 걸 탓할 수도 없다. 사슬의 움직임이 멈췄다는 건 씨앗의 발아가 성공했다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사탄의 모습은 보이는 그대로 걸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저히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목숨 하나, 아니 두 개 모두 잃었을지도 모른다.
불안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 루시퍼의 얼굴에 급격히 어둠이 그늘졌다. 이제껏 줄곧 걱정해왔으나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과 마주하자 갑작스레 가슴이 무거워졌다. 왜인지 뜻 모를 부담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루시퍼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리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살아 있는 걸까?”
“살아는 있지.”
퉤, 우물거리던 연초를 뱉어낸 아스타로트가 묵묵히 대답했다. 어찌 보면 예사로운 대화는 아니었다. 서로만 보면 불꽃을 튀기던 두 악마가 선선히 말을 나누는 건 확실히 놀라운 광경이다. 다만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놀라움에 묻혀 있을 뿐.
천천히 입맛을 다시던 아스타로트는 흘끗 옆을 흘겼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지?”
사실상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 다섯 쌍의 눈초리가 한곳으로 쏠렸다. 그러나 루시퍼는 미동도 않은 채 계속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루시퍼?”
“…….”
“루시퍼!”
“…….”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다. 마침내 아스타로트의 눈동자에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올올이 곤두서더니 인중을 우직 일그러뜨린다.
“꼴이 참 우습지도 않군. 그렇지 않나?”
문득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홀 플레인에 내려올 때만 해도 유리하던 상황은 어느 순간 뒤집혔고, 지금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모습이 우습지도 않느냐는 말이야. 응? 그리고 사탄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된 거지? 뭘 기대하고?”
“아스타로트.”
바알이 입을 열었다.
“나는 최소한 루시퍼가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한 번 열린 말문은 터진 물꼬처럼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런데 저 반응은 뭐지? 왜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따지듯이 말하는 아스타로트를 보고 있자니 리리스도 서서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 너도 처음 봤을 때 놀랐잖아? 그리고 사탄은 분명 나한테, 우리한테 말했어. 앞으로….”
“내가 들은 건 루시퍼의 말을 따르라는 것밖에 없었다고!”
아스타로트가 벌컥 고함을 질렀다. 어두운 공간이 분노에 찬 음성으로 떠르르 울렸다.
“웃기지도 않아? 그래, 사탄은 그렇다고 쳐. 한데 속행을 반대한 루시퍼가 후임을 맡는다고? 젠장, 그래 놓고서 왜 저따위로 서 있는 거냐고!”
“아스타로트!”
바알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이번에는 아스타로트도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휙 머리 돌려 검게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봤다. 바알도 지지 않고 서슬 퍼런 안광을 뿜으며 맞대응하자 순식간에 긴장감이 치솟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커먼 불똥이 튀기는 동시에 아스타로트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탄은 그랬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갑자기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바알도, 아스타로트도. 또 한 번 다섯 쌍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시선이 몰린 곳에는 루시퍼가 한결 침착해진 얼굴로 두 악마를 돌아보고 있었다.
“알고 있는 이상, 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그 순간 솟구친 긴장감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아스타로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으나 살그머니 손을 내렸다. 루시퍼의 음성은 어딘가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 굉장히 침착했다.
다시 고요를 되찾은 공간에서 루시퍼가 나직이 말을 잇는다.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이상, 기회를 만들 수 있고.”
“우리는 물론, 동, 서, 남 대륙.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야 한다고.”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기회는 만들 수 없다고.”
“지옥 대공의 소환 계획은 실패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말한 루시퍼는 돌연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히려 거기서 가능성을 봤다고.”
말이 끝남과 동시, 천천히 이동하던 시선도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멎었다.
“아스타로트.”
이름이 불린 순간 아스타로트가 움찔했다.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하겠습니까?”
“뭐?”
“사탄의 생각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계획도 전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맡는 게 불안하다면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
무척이나 태연하고 평온한 목소리다.
실제로 루시퍼는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터럭만치의 비꼼 없이 진심으로 물어보고 있었다. 왜냐면 아스타로트를 이해하니까. 모든 악마의 왕이라는 사탄이 저 꼴이 됐으니 초조하고 불안한 것도 이해가 간다. 아무리 대 악마라도 말이다. 무엇보다 회동 직후의 자신도 딱 저 모습이었다.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낀 걸까. 한동안 루시퍼를 응시하던 아스타로트는 살그머니 눈을 돌렸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리리스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래서. 어떻게.”
차분히 숨을 돌린 바알도 물었다. 사탄 다음가는 이인자가 인정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었다.
“사탄이 그랬습니다.”
또 한 번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남은 기회는 한 번이며, 자신이 그 기회를 만들어주겠다…. 아니, 만들어보겠다고요.”
만들어주겠다, 만들어보겠다.
언뜻 들으면 비슷한 어감이나 두 말은 확실한 차이를 갖고 있다.
“발아에 실패했을 때는 두 번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철수하라고 했지만….”
씁쓸히 허공을 응시하던 루시퍼는 문득 눈빛을 번쩍였다.
“…속행, 하겠습니다.”
이 한순간, 루시퍼의 기세가 일변했다. 낯빛 자체는 담담해 보이지만 두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형형한 빛으로 물들었다. 흡사 광인의 그것처럼.
“기회를 만드는 게 사탄의 역할이라면, 기회를 잡는 건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오기까지,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습니다.”
루시퍼는 역할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항상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악마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저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사탄의 안배를 위해 행동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번 계획은 우리 일곱 세력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면 무조건 실패할 거라는 겁니다. 지금부터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지 않습니다. 정교히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모든 것이 사탄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여기서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장황히 이어지던 말이 끝났다. 길기는 했으나 루시퍼가 말한 의미는 간단하다. 믿고 따라올 수 없다면 이만 끝내자는 소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속행에 찬성한 다섯 악마는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한참을 기다린 루시퍼는 이내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날.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마계의 역사상, 처음으로 대 악마들이 손을 잡았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
신화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황혼’이라는 뜻으로, 아득한 신화 시절 신들에 의해 벌어졌던 최후의 전투를 일컫는다.
그러나 지리학적 관점에서 말해보면 남 대륙에서 북진하면 등장하는, 정확히는 험난한 여러 산봉우리와 그곳에 자리 잡은 ‘오크 성’을 넘었을 때 나오는 일종의 신 대륙이라 볼 수 있다.
오크 성에서 약 일주일 정도 북진하면 드넓은 초원이 나오는데, 그 초원의 남쪽에 치우친 거대한 도시를 바로 신 대륙의 이름과 똑같은 라그나로크라고 부른다.
세워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도시의 외관은 긴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군데군데 새 단장을 했는지 낡았다기보다는 고풍스러운 기색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비록 아직 완전한 위용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도시의 거리는 곳곳이 떠들썩한 활기로 넘쳐났고, 무수한 사람이 오가는 풍경이 매우 번성한 듯했다.
이 도시에도 명물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를 꼽을 것이다. 바로 중앙 도시에 있는 ‘푸른 궁전’이라는 건물을.
실제로 푸른 궁전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며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는, 도시 내에서 가장 커다란 건물이었다. 누구든 그 앞을 한 번이라도 지나간다면 자연스레 시선을 빼앗기고, 보기만 해도 괜스레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실은 지면에 설치된 거대한 마법 진의 효과였지만, 겉보기에는 보기 좋은 푸른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것이 특수한 돌로 만들었구나, 라는 정도로만 생각할 뿐.
이러한 궁전의 높은 층에 있는 발코니에는, 한 여인이 나와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원래 뒤에 내용이 더 있는데, 제가 오늘 아침 일찍, 06시에는 나가봐야 합니다.
빨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끊었습니다.
이 점 양해를 부탁 드리며, 오늘 못 쓴 부분만큼 다음 회에 벌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