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2
00851 Meanwhile, Same Time : Seven =========================================================================
오딘이 남 대륙을 주도하는 최고의 클랜으로 발돋움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대부분이 오딘의 수장인 엘도라와 선지자(先知者)라 불리며 존경받는 멜리너스의 만남을 중심으로 말하기는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것만이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가령 북 대륙이 특별한 사용자 열 명을 일컬어 십 강이라고 부르듯이 남 대륙에도 그와 비슷한 집단이 있다.
엘도라가 처음 홀 플레인에 소환됐을 때는 약 육 년 전으로,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아무리 높은 잠재성을 가진 사용자라 해도, 고작 열네 살의 아이가 이 척박한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구원자로 등장한 게 바로 남 대륙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멜리너스였다. 공교롭게도 예비 사용자를 돌보는 역할을 하고 있던 멜리너스는 갓 들어온 엘도라를 목격, 단박에 잠재성을 알아보고 보호자를 자처했다. 즉 직접 데려다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엘도라는 선지자의 비호 아래 자신의 잠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실 엘도라가 하는 일은 하나. 멜리너스가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렇다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건 아니었다. 엘도라가 그런 느낌을 받지 않도록 멜리너스가 항상 조심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할 때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설명을 충분히 곁들였다.
영특한 엘도라는 그 뜻을 알아채고 충실히 기대에 부응했다. 오히려 잘되면 잘됐지, 멜리너스의 말은 따라도 하등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엘도라는 어느새 남 대륙의 폭풍의 눈에 서 있었다. 사용자들 사이로 서서히 금발 소녀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엘도라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이 늘어났다.
물론 이 또한 멜리너스가 의도한 바였다. 멜리너스는 자칫 잘못하면 질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사용자들의 관심을,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현명하게 대처했다.
첫 번째는 사익을 좇는 게 아닌, 철저하게 공익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소사부터 대사까지, 남 대륙이 곤란에 처했을 때는 언제나 엘도라가 앞장서서 해결했다. 가령 폐쇄적인 요정과 동맹을 맺고 요정의 숲을 개방한 일이나, 가깝게는 오크 성을 공략하고 발견한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터.
그러자 남 대륙 사용자들도 엘도라의 행보에 조금씩 열광하기 시작했다. 사실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이득은 둘째치고서 라도, 가냘프고 어여쁜 소녀가 늙은 현자와 만나 낭만적인 모험을 하고, 하나의 세력을 일구는 과정에서 일종의 환상 문학과도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엘도라는 어느새 공인과 비슷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독불장군식으로만 활동하는 게 아닌, 명망 높은 사용자를 동료로 모았다. 여느 대륙이 그렇듯 남 대륙도 유명한 사용자가 여럿 있었고, 멜리너스는 면식이 있는 이를 부르거나, 혹은 직접 찾아가서 설득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심지어 엘도라와 결투를 치르고 동료로 들어온 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어쨌든 개인이던 세력이든, 한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 하나로 모이자 그것 또한 커다란 관심거리가 되었다. 엘도라는 그들을 부하가 아닌, 동등한 동료로 대우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원탁에 둘러앉아 상하 구별 없이 논의했으며, 언제나 옳은 결정으로 대사를 이끌었다.
남 대륙의 사용자들은 그 집단을 가리켜 Knights Of The Round Table, 즉 원탁의 기사단이라고 부른다.
*
올리비아가 말한 장소는 라그나로크에서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원정대의 행군은 나름 순조롭다고 할 수 있었다. 안정화 지역은 진즉 벗어났고, 준 안정화 지역에 들어서도 딱히 위협 거리는 찾을 수 없었다. 하기야 안내자인 올리비아를 제외하더라도, 엘도라를 포함한 열세 명의 기사와 멜리너스까지 대부분 시크릿 클래스로 구성돼 있으니 어지간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눈 한 번 깜짝할 턱도 없다.
게다가 엘도라가 얼른 칼집을 찾고 싶다는 열망 아래 계속 강행군을 하는 바람에 원정대는 예정보다 이른 날짜에 목적지 인근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연이어 휴식을 호소하는 이안의 부탁을 무시하지는 못하겠는지, 엘도라는 산 중턱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실 근접 계열들이야 큰 상관은 없었지만, 이안은 원탁의 기사 중 유일하게 비전투 사용자라 어느 정도의 배려는 필요했다.
아키로프는 비교적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큰 바위에 기대앉아 쉬는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갔다.
“엘핀 로드. 아까 거의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네, 저곳만 넘으면 돼요.”
숨을 꿀꺽 삼킨 올리비아는 쳐다보지도 않고 산의 정상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예리한 칼로 비스듬히 쳐낸 듯한 가파른 산길과, 허연 구름이 걸린 산등성이 풍경이 완곡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키로프는 두어 번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마중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용자는 왜 안 보이는 거지?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마중? 누가요?”
“누구긴. 엘핀 클랜원들이지.”
“다 철수시켰는데요?”
“뭐라고? 왜? 그럼 안내자는?”
“초입에서 피해를 심하게 입었거든요. 그래서 돌아가라고 했죠. 안내는 제가 하면 되고요.”
그러자 아키로프는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
“왜요?”
“아니. 발견한 공은 인정하지만, 너무 날로 먹는 느낌이 들어서.”
“어머. 맹화의 기사치고는 상당히 인색한 말씀이네요.”
아키로프가 날 선 어조로 쏘아붙였으나 올리비아도 구변 좋게 받아쳤다. 그러자 발끈한 아키로프가 더 강도 높은 말을 쏟아내려는 찰나, 갑작스레 눈을 돌렸다. 이내 누군가가 조용히 수풀을 헤치며 등장했다.
흡사 산속 풍경과 동화된 듯 나뭇잎을 두른 몸과, 한 주먹 가득 쥐어도 살이 빠져나올 듯한 그득한 젖가슴. 그리고 머리카락 틈새로 삐죽 돋아난 귀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인은, 바로 요정 에르윈이었다.
“쯧.”
아키로프는 곧장 눈을 찌푸렸다. 대놓고 훼방꾼을 보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에르윈이 계속 걸어오자 혀를 차더니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내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자, 올리비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에르윈이 미안해하는 낯빛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걱정 마요. 저 인간이 저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뭐, 사실 틀린 말도 아니고.”
“아뇨.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엘도라도 올리비아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죠. 후후. 그나저나 정말 나이스 타이밍이었어요.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쾌활히 말을 잇던 올리비아는 우물쭈물하는 에르윈을 보며 놀란 빛을 보였다.
“혹시 저한테 볼 일이…?”
정답이었는지 에르윈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분히 주변을 살피고는 한층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
“최근에 멜리너스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
올리비아는 약 삼 초 동안 에르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임으로써 무언의 감정을 표현했다.
“글쎄요. 딱히?”
“그렇군요….”
“왜요?”
“아니 그냥…. 근래 초조해 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고,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에, 멜리너스가요?”
“네. 또 가끔 이상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들었어요.”
올리비아는 그건 예전부터 그래온 버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에르윈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이 사라지지 않자, 머쓱해 하며 볼을 긁적였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정 마음에 걸리면, 저보다 엘도라한테 물어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가까이 있는 시선보다는 먼빛의 시선이 더 나을 때도 있으니까요.”
올리비아는 어렴풋이 에르윈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요. 사실 저는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에르윈이 그렇다면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볼게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았는지 에르윈은 꾸벅 고개 숙이고는 부드러이 몸을 돌렸다. 마침 곧 출발하겠다는 엘도라의 외침이 들려와, 올리비아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바로 이동하지 않았다. 잠깐 가만히 멈춰 서서, 사뿐사뿐 걸어가는 에르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행군 재개 후, 가뿐히 정상에 오른 원정대는 옹기종기 모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이었는데, 곳곳에 고대 건축물이라 추정되는 건물들이 부서진 채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온전한 건축물이라고는 중앙에 홀로 우뚝 솟은 거대한 탑뿐.
하지만 탑조차도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했는지 세월이 흐른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간간이 모래바람이 스치는 것이 사실상 폐허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생각보다 초라한데.”
에드워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올리비아는 검지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얕보면 큰일 날 걸요? 저래 봬도 상당히 위험하거든요. 설마 탑으로 가는 길에 함정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럼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장서도 되죠?”
나탈리가 반색하며 냉큼 뛰어 내려가려고 하자 올리비아가 황급히 제지했다.
“잠깐. 그냥 여기도 내가 안내할게. 우리 클랜원들이 뚫은 길로 가면 되니까. 괜히 다른 길로 갔다가 또….”
나탈리는 입을 삐쭉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엘도라가 빤히 쳐다보자 곧 납득한 얼굴로 물러났다. 하기야 이미 길을 뚫었다는데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진형을 정돈한 원정대는 올리비아를 선두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에 도착하니 분지는 위에서 쳐다봤을 때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 반파된 건물의 잔해가 도처의 길을 가로막아 꼭 미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경험자인 올리비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건물 사이를 헤치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탑을 60미터쯤 남겨둔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방에는 탑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2미터 높이의 벽이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바로 앞까지 걸어간 올리비아는 벽을 몇 번 쓰다듬더니 툭툭, 손등으로 두드리며 원정대를 돌아보았다.
“이게 바로 제가 말한 벽화….”
그 순간,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안이 앞으로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누군가 “또 발동 걸렸군.” 이라는 말을 중얼거렸으나 따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비 전투 사용자인 이안이 원탁의 기사 중 하나로 선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대 홀 플레인에 관련된 지식을 그 누구보다 방대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나도 한 번 좀 볼까?”
이윽고 원정대도 느긋한 걸음으로 벽화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벽에는 흡사 갑골 문자를 연상케 하는 형이상학적인 글자나,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이상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대부분이 보자마자 머리를 흔들며 포기했지만, 역시나 이안은 달랐다. 처음에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벽을 스치는가 싶었는데, 가면 갈수록 점차 느려지더니 거의 끝에 다다라서는 살짝 놀란 기색을 비쳤다.
“어라. 이건…?”
잠시 후, 이안이 심각한 낯빛으로 말을 흐렸다.
“왜? 뭔가 좀 알아낸 거라도 있니?”
흰색 십자 방패를 든, 백치미가 느껴지는 성숙한 여인이 스리슬쩍 다가와 물었다.
“아니, 뭐….”
이안은 얼버무리려고 하다가, 원정대가 슬금슬금 모여드는 것을 보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저는 고명한 이안 학자님의 해석이 궁금한데요?”
올리비아가 호기심 묻은 목소리로 묻자, 이안이 쓰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아뇨. 엘핀 로드의 해석도 정확합니다. 아니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와 거의 일치해요. 이 벽화는 신의 봉인을 다룬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성물이 그려진 것도 확인했고요.”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이안은 찜찜한 눈길로 구석을 바라봤다. 쳐다보는 곳은 벽화의 끝 부분으로, 그곳에는 어떤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아아. 저기는 여백인 것 같아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올리비아의 말에 이안은 차분히 머리를 흔들었다.
“고대 벽화는 어느 곳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굳이 이곳만 여백으로 남겨뒀다면, 이 자체에 모종의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래요. 어디까지나 해석하기 나름이기는 합니다만. 공백…. 아무것도 없는 공간…. 허공…. 공허…. 허무….”
약간은 불안한 눈으로 이안을 응시하던 에르윈은, 무언가에 홀린 듯 흘러나오는 단어를 듣고 고요히 입을 열었다.
“꼭 죽음을 말하는 것 같은 단어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 순간, 짝! 강한 손뼉 소리가 울렸다. 멍하니 듣고만 있던 사용자들은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죠. 만약 이 여백이 죽음을 표현한 거라면…?”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읽은 기억이 있어. 굉장히 오래된 사료였는데….”
연달아 혼잣말한 이안은 문득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니까 저와 에르윈 양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 여백은 죽음의 의인화, 아니 아니. 죽음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안이 몸을 돌렸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금빛이 스친 안경을 살며시 추어올리며 말을 잇는다.
“이곳 용어로, 타나토스(Thanatos)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