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4
00853 Meanwhile, Same Time : Seven =========================================================================
원정대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중앙에 쌓인 잔해를 전부 걷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놀라운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돌로 만들어진 적당한 크기의 둥근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광장 바닥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이 그어져 있고, 가장자리마다 둥그스름한 돌멩이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꼭 피자를 보는 것 같군.”
“에드워드,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마.”
흰 방패를 든 여인이 눈을 흘기니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후, 자연스레 이안이 앞으로 나섰다. 탁자를 이모저모 살피는가 싶더니 멜리너스를 불러 한참을 서로 속삭였다. 이내 둘은 동시에 끄덕이고는, 이안이 가장 가까운 돌에 손을 얹고 탁자 중앙으로 조심스레 끌어왔다. 그때였다.
크스스스스스스스!
불현듯 맷돌을 가는 듯한 소리가 고요한 장내를 울렸다. 멍하니 옆을 돌아본 나탈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왼쪽에 있던 부채꼴 모양의 기둥 중 하나가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둥은 바닥에 그어진 줄을 따라 서서히 가까워져 오더니 중앙 지점에 이르러서야 우뚝 멈춰 섰다.
“멜리너스. 혹시 그 돌멩이가 이 기둥과 연동되는 겁니까?”
화르르륵!
누군가의 질문은, 느닷없이 어둠을 밝히는 환한 불빛에 묻혔다. 반사적으로 허공을 올려다본 원정대의 사이로 가벼운 신음이 흘렀다. 중앙으로 이동한 기둥의 꼭대기에 진한 초록색 불빛이 성화(聖火)처럼 타오르고 있었으니.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이안은 곧 두 번째 돌을 향해 멍하니 손을 움직였다.
크스스스스스스스!
크스스스스스스스!
소슬한 소음이 광장을 조금씩 떨게 하였다. 이안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둘레에 서 있던 기둥들이 차례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허공을 밝히는 녹색 횃불은 어느새 일곱 개로 늘어나 있었다. 중앙으로 모여든 기둥들은, 원래 하나였다는 것처럼 서로 딱딱 맞물려 거대한 원형 기둥으로의 재탄생을 앞둔 상황. 이제 남은 기둥은 단 하나에 불과하다.
이윽고 버릇처럼 안경을 고쳐 쓴 이안이 최후의 돌멩이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잠시만요.”
고운 목소리가 그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그만두면…. 안 될까요?”
원정대의 시선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한 명한테 쏠렸다. 나뭇잎으로 짠 옷을 걸친 고결한 요정이 기둥을 보며 한없이 불안한 빛을 띠고 있다.
“에르윈?”
“엘도라, 그러니까…. 미, 미안해요.”
에르윈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러더니 황급히 나탈리를 응시한다.
“나탈리. 아까 정말 아무런 흔적도 보지 못했나요?”
“응? 어, 어.”
“정말로요? 아무것도요?”
“모, 못 봤다니까? 갑자기 왜 그래. 무섭잖아….”
나탈리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에르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털썩 주저앉더니 이번에는 아키로프를 바라봤다.
“아키로프! 아까 차려진 밥상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그렇게 느꼈죠?”
“그,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그건 그냥…. 농담이었다고.”
갑자기 지목당한 아키로프는 떨떠름히 대꾸했다.
“하지만 이상해…. 너무 이상해…. 꼭 누군가가….”
그러자 연신 입을 달싹거리며 곤란해 하는 것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계속 혼란스러워하는 에르윈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멜리너스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에르윈. 일단 진정하는 게 좋겠소.”
“저는 그냥…. 아, 아…!”
“에르윈? 에르윈!”
“…아니. 저, 저는 괜찮아요. 죄송해요. 그냥,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간신히 진정한 에르윈은 짜낸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고는 입을 질끈 깨물었다. 엘도라는 ‘어떻게 하지?’ 라는 눈초리로 주변을 돌아봤지만, 전원 비슷한 반응이었다. 모두 엘도라처럼 어색한 얼굴만 하고 있다. 한껏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심지어 아키로프마저도 조용히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사실 현재 에르윈을 제외한 이들의 속마음은 거의 비슷했다. 이제 원정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인데, 누가 여기서 관두고 돌아가고 싶겠는가.
또 굳이 성과 때문이 아니더라도, 원정을 그만두고 돌아가려면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광휘의 사제’ 안솔의 말이라면 모를까. 단순히 감이 이상하다는 까닭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쉽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럼에도 원정대가 갈등하는 것은, 평소 에르윈이 보여온 행실과 종족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만, 에르윈이 행동에는 항상 이유가 있으며, 요정은 언제나 이치에 맞게 행동한다. 사리(事理)에 거스르는 일을 할 때는 본능적으로 굉장히 불편해한다.
물론 이렇다고 맹신할 정도로 믿고 따르는 건 아니나, 그래도 한 번쯤은 고민해볼 법한 일이었다.
…그래, 엘도라가 칼집에 눈이 멀어 있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분명 탑 밖으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을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작동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엘도라…!”
“어차피 고려하고 온 일이고, 철저히 준비해 왔습니다. 이상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취소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처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엘도라가 조리 있게 말하자 다수가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애초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 있는 사용자들이었고, 라그나로크를 발견한 이후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안이 말한 북 대륙의 사례도 있으니 아주 불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에르윈은 잠시 애타는 눈빛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봤으나 곧 체념한 듯 눈을 감는다. 그러나 이안은 바로 일을 진행하지 않고 멜리너스의 눈치를 살폈다. 원탁의 기사 중 절대다수가 암암리에 속행에 손들었지만, 항상 앞장서 일을 주도해온 멜리너스의 확답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으음….”
멜리너스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엘도라는 선택을 맡기겠다는 듯 한 발 물러나는 자세를 취했지만, 두 눈동자에는 은근한 불빛이 스며 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엘도라와 에르윈을 번갈아 보던 멜리너스는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은 마치 썩 내키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멜리너스마저도 동의하자 이안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크스스스스스스스!
마지막 남은 하나가 중앙으로 이동하자, 비로소 여덟 개가 모두 결합해 하나의 거대한 원형 기둥 형상이 만들어졌다. 화르르륵, 초록 불빛이 켜지며 기둥 인근이 한층 밝아졌다.
웅웅웅웅웅웅웅웅!
그 순간, 기둥이 눈 부신 빛을 비췄다. 웅혼한 진동음과 함께 표면에 유형의 기운이 물결처럼 흐르더니, 광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우우우웅!
이어서 기둥 위 불빛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것은 진정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로, 여덟 개의 불꽃이 하나로 모여 천장을 뚫을 듯 치솟는 광경은 진정 장관에 가까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더욱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 Quid Enim….
– Do Recludere….
– Revertere, Si Non Est Per Se Paratum….
– Unum Tantum Quatuor Reges Ac….
사방에서 조금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공간을 어지럽게 겹쳐 울리는 동시에,
화아아아아아아악!
녹색 불빛이 비치는 천장에서 원진(圓陣)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시야가 멀어버릴 정도의 빛을 분사하는 터라, 누구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 그저 둥근 고리 같은 형태가 기둥 중앙을 미끄러지듯이 통과하더니, 이내 빛무리가 선연히 발광하며 불빛의 한가운데로 무언가가 서서히 떠오른다. 마치 내부서부터 억지로 밀려나오는 것처럼.
이 모든 현상이, 어떻게 하기도 전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번쩍!
갑작스레 시야가 황금빛으로 점멸했다.
눈을 빠르게 감았다가 뜬 엘도라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시야는 여전히 빛으로 물들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신경을 흐트러트리던 여러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주문을 노래하는 것 같은 소리도, 고막을 긁던 불쾌한 소음도, 모두 한순간 사라졌다. 엘도라는 흡사 꿈을 꾸는 기분을 느끼며 눈에 온 힘을 집중했다.
잠시 후.
장내를 가득 메우던 빛이 홀연히 가라앉았을 즈음, 돌연히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아주 미세한 소음이 이어졌다. 그때는 원정대도 어느 정도 시야를 회복한 상태였다. 이윽고 기둥을 쳐다본 엘도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기둥 표면이 그그그긍, 소리와 함께 좌우로 천천히 열리고 있다. 마침내 활짝 개방된 기둥의 내부에는, 마치 관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내장돼 있었다. 정확히는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석문이었다.
“오….”
“잠깐! 기다리게!”
이안은 몹시 황홀해 하며 그곳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멜리너스가 벼락같은 음성으로 제지했다.
“메, 멜리너스?”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마 이 단계가 최종 단계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멜리너스는 엘도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는, 잠시 상황을 조사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은 일리 있다고 여긴 걸까. 엘도라가 고개를 주억이는걸 보며 에르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찰나,
쿵!
문득, 무거운 것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크게 기함한 원정대는 순간적으로 무기를 겨냥하며 기둥을 쳐다봤다. 막 몸을 일으키려던 에르윈이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
아무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 석문은 어느새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둥 안에서는 흐릿한 연기가 뭉클뭉클 뿜어져 나오는 중이다.
“어어, 저, 저는 아무것도….”
이안은 물밀 듯 덮쳐오는 연기를 피해 황급히 물러나다가, 다리가 꼬였는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러나 연기는 이안을 스치듯 지나쳐 어느 한 명에게 스리슬쩍 집중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현상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왜냐면 흘러나오는 연기보다는, 무언가 짙은 형체가 떨어져 나오는 게 시야에 잡혔기 때문이다.
마치 춤추듯 너울너울 가까워지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원정대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졌다. 엘도라는 점차 요동치는 심장을 추스르며 양손에 든 엑스칼리버를 바스러질 만큼 세게 움켰다.
그때.
“……?”
매우 작고 앳된 음성이 문득 귀를 간질였다.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엘도라의 아미가 의아히 찌푸려졌다.
그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작고 하얀 발이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드러난 것과,
“고마워.”
앳된 음성과 함께 누군가 엘도라의 어깨에 톡 부딪쳐 쓰러진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1. 에피소드 7 끝났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에피소드 6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_(__)_
2. 동원 훈련은 무난하게 잘 받고 왔습니다.(어느 분이 물어보셨는데, 저는 52사단 211연대 강남 서초 예비군 훈련장에서 받았습니다.) 확실히 훈련 강도는 작년보다 높아진 것 같지만, 충분히 받을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오히려 예비군 분들이 교관, 조교 분들의 통제에 잘 따라주니 훈련이 전체적으로 수월하게 진행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이번 훈련은 정말 잘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밤 자고 올해 훈련을 깔끔하게 끝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신체 리듬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점호, 아침 식사, 오전 훈련, 점심 식사, 오후 훈련, 저녁 식사, 야간 정신 교육, 취침. 이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강제적으로 맞춰졌네요. 하하.
3. 저 여군 아닙니다. ㅡㅡ; 남자 맞아요. 여자 아닙니다. 이와는 별개로, 여성 예비군이 있기는 합니다. 제가 퇴소하는 날이 예비군의 날이라 부대 내 행사가 있었는데, 그중에 여성 예비군 분들도 많이 보였거든요.(미리 말씀 드리는데, 제가 여성 예비군이라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제발 이상한 소문 만들지 말아주세요. 저는 그냥 독자 분들이 재밌어서 놀리는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제가 여성인 줄 아는 독자 분이 계신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로유진은 남성입니다.
4.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부로 연재 재개하겠으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완결을 향해 꾸준히 달리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