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7
00856 Be Infected, Six. =========================================================================
남 대륙이 돌아가는 체계는, 언뜻 북 대륙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몇 부분에서는 차이점을 보인다.
가령 아틀란타의 경우, 가장 큰 내(內) 도시는 여러 클랜에서 공정히 차출한 사용자들로 구성된 중앙 관리 기구가 관리하고 있으며, 수장은 전 수호자 신분인 이효을이 맡고 있다. 그러나 라그나로크에서는, 하나의 클랜인 오딘이 중앙 관리 기구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오딘의 중심인 원탁의 기사단이 남 대륙의 주요한 흐름을 선도하며, 보통 영주 클랜(한 도시를 관리 하는 사용자들의 모임. 북 대륙의 ‘대표 클랜’과 같은 개념이다.)과 대형, 중견, 소형 클랜, 그리고 이하 사용자들이 그들의 결정을 따라가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가 가능한 근거는 약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공인처럼 관심받는 엘도라와 선지자로서 평판 높은 멜리너스가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오딘 클랜이 창설된 이래 항상 공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 세 번째는 다른 영주 클랜은 물론, 필요하면 여러 일반 클랜의 의견도 수용하는 등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가장 큰 이유인 네 번째로, 남 대륙 최대 무력 단체인 원탁의 기사단을 갖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원탁의 기사단이 열세 명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을 지닌 개개인을 편의상 일컫는 것에 불과하다. 원래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로라하는 사용자인 만큼 각자 일가(一家)를 이룰만한 능력이 충분하며, 이안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개인보다는 단체로 영입된 경우가 훨씬 많다.
말인즉 원탁의 기사단은, 여러 명성 있는 집단이 모여 탄생한 사상 초유의 강력한 기사단인 것이다.
정리해보면 무력, 명분, 민심.
이렇게 삼박자를 고루 갖춘 오딘 클랜이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클랜이 전혀 없지는 않다.
아니. 정확히는 비협조적이라고 해야 하나. 올리비아가 이끄는 엘핀처럼 우호적인 영주 클랜도 있지만, 반대로 오딘이 이끌어가는 방식에 불만을 품은 이도 없지는 않을 테니까.
“아틀란타처럼, 라그나로크의 외 도시도 네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동서남북 순으로 엘핀, 팍스, 카르페디엠, 녹스. 이렇게 네 영주 클랜이 관리하고 있죠.”
탁, 탁. 손으로 하나씩 짚으며 설명하던 이안이 눈을 들어 건너편 의자를 바라봤다. 맞은편에는 검은 머리칼의 여인이 탁상에 깔린 지도에 조용히 집중하고 있다.
“우선 가장 협조적인 엘핀 클랜의 로드는 아시다시피 사브나크가….”
“팍스, 카르페디엠, 녹스는 어떻지?”
여인은 그건 됐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을 끊었다. 이안은 금색 뿔테 안경을 손등으로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 영주 클랜 모두 예상대로입니다. 특히 카르페디엠과 녹스는 확실히 오딘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현 정권의 전복(顚覆)을 꿈꾸는 만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즉 서로 어긋나 있다는 게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나 할까요.”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좋은 말로 하면 호전성이 강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욕망에 충실한 자들입니다. 오크 성 공략 때 서로 불협화음 없이 협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가진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지만, 그걸 제한하는 오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군.”
여인이 맞느냐는 듯이 눈을 들자 이안은 바로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아마 사탄의….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의도대로 오딘의 노선이 변경된다면, 카르페디엠과 녹스는 이후의 계획을 지지해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세력입니다. 서 대륙에서 그랬듯이 적당히 구슬리고, 적당한 명분만 쥐여주면 그만이니까요.”
“서 대륙이라. 그러고 보니 남 대륙에 새로 전입해온 서 대륙 사용자들이 있지 않나? 대부분 북 대륙보다는 남 대륙으로 전입한 것 같은데.”
“예. 천사 쪽이 말을 잘했는지 위화감이 심하지는 않고,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왜 서 대륙을 버리고 왔는지 궁금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쌍하니까 받아준다는 식의 인식이 강하지요.”
“자부심이 높다는 건가…. 뭐, 조금이라도 비벼볼 구석은 있겠지. 아무튼, 그 두 세력의 수장과는 만나봤나?”
여인의 질문에 돌연 이안이 슬쩍 웃었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몇 번 보기는 했습니다. 완전 미친놈이더군요.”
“미친놈이라고?”
“카르페디엠 로드 말입니다. 얼마 전 복마전의 성인이라는 각성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다고 자랑하던데…. 그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소돔과 고모라 같은 타락한 도시를 구현하는 게 꿈이라고요.”
“재밌는 놈이군. 녹스의 수장은?”
여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이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녹스의 수장은…. 으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직접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클랜 성향이야 구성원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글쎄요. 그놈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까요.”
“그런가.”
잠시 여인의 눈동자에 흥미의 빛이 떠올랐지만, 곧 사라졌다. 조금 흥미가 동하기는 했으나 우선하여 실행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무엇보다 오딘 클랜 내부의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아차, 팍스의 수장은 어떻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 놈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표방하기는 하지만, 그냥 기회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이안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둘은 갑자기 동시에 고개를 젖혔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 계단 위로, 급하게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대 도서관을 울리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닌, 여러 기척이었다.
“이제 오는 모양이군요.”
이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으로 손을 뻗었다. 얼른 책상을 치운 다음, 고대 존재에 흥미가 동해 가장 먼저 도착한 학자를 연기해야 하니까. 그러한 찰나, “후” 한숨을 뱉은 여인이 문득 기지개를 켰다.
“…어색하군.”
지도를 접어 품속으로 집어넣던 이안이 흘끗 눈을 들었다.
“무엇이…. 아, 혹시 몸 때문에 그러시는?”
“아니.”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그리고 점점이 모습을 드러내는 사용자들을 슬쩍 흘기며 쓰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쫓기듯이 움직이는 상황이 어색하다는 거야.”
*
여인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원탁의 기사 전원에게 퍼졌다. 멜리너스의 소식을 받은 이들은 각자 호기심을 품고 모였지만, 그중 가장 급한 건 바로 엘도라였다.
엘도라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급하게 달려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동안 왜 불안해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요라는 감정이었다.
여태껏 대부분 멜리너스의 의견에 따랐다고는 하나, 엘도라는 공익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였다. 어떤 일을 할 때는 항상 그래야 하는 당위성이 있었고, 남 대륙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언제나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원정은 조금 다르다. 단순히 칼집을 찾으려 했던 것이, 어느 순간 도를 넘어 정체 모를 존재를 해방하고 말았다. 즉 공공의 목적이 아닌 개인의 욕망을 위해 움직인 것이다.
물론 그 행동의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면, 그냥 잊고 넘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대충대충 합리화하고 넘어가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벽화를 보며 이안이 했던 말이나 에르윈이 극렬히 거부했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한편으로는 원정 이후 조금 혼란스러워진 클랜 분위기도 묘하게 신경 쓰였고.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자책감. 혹시 그 존재가 남 대륙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 결국에는 엘도라가 느끼는 혼란은, 합리적이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서 기인한 일종의 공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그 여인이 별것 아닌, 정확히는 남 대륙에 해악을 끼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감당 못 할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면 조마조마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으니까.
기실 어린이처럼 느껴질 법한 생각이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면 엘도라는 홀 플레인에 소환됐을 때부터 그런 사용자로 키워져 왔고, 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만약 원정 이후 느꼈던 불안감이 적중한다면….
‘그때는….’
엘도라는 천으로 감싼 칼을 바스러지듯이 쥐며 빠르게 계단을 밟았다. 그러자 곧 앞서 도착한 모인 예닐곱 명의 기사와, 큰 책상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계단을 모두 내려간 엘도라는, 곧장 책상 근처까지 다가가 여인을 뚫어지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등허리까지 가지런히 늘어트린 여인은, 어른 여성이라기보다는, 소녀라는 용모가 어울리는 십 대 중후반쯤의 나이로 보였다.
하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 모습은 어딘가 공허해 보인다.
나탈리나 이안이 스리슬쩍 말을 걸어도 일절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냥 표홀히 떠다니는 공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인간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는 생기를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쿵!
그 순간, 돌연히 커다란 소음이 대 도서관의 정적을 깨트렸다. 한 발 앞서 모인 기사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책상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엘도라가 엑스칼리버를 꺼내놓은 채 여인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반응했는지, 심지어 여인조차도 탁상과 부딪친 대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으로 묻겠다.”
상대를 경계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100포인트에 다다른 행운 능력치가 앞으로 불어올 폭풍을 감지하고 모종의 신호를 보내서일까. 엘도라는 쏘아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적의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지? 어떤 존재지?”
그 순간이었다.
물끄러미 엑스칼리버를 쳐다보던 한 쌍의 칠흑빛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한다. 시선은 엘도라의 복부에서부터 가슴을 훑고 올라와, 이내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렇게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 얽히고설킨 순간, 여인의 작은 입술이 비로소 살며시 벌어진다.
“…그건.”
그와 동시에.
마침내 사탄의 두 번째 계획인, ‘사용자 빼앗기’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후기는 조크라고 코멘트에 남겼는데…. 하하.
코멘트를 읽어보니 의외로 재밌어들 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물론 저렇게 가면야 완결까지 가는 여정이 상당히 편해질 것 같습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해버리면…. ^^;
아마 굉장히 급격한 완결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무엇보다 머리를 쥐어짜내서 간신히 에피소드 8개로 구상을 마쳤는데, 전면 수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ㅜ.ㅠ
오늘 새벽 한 시쯤에가 갑자기 복통이 찾아왔습니다. 저녁에 매운걸 먹어서 그런가 봐요. 거진 한 시간 동안 뒹구니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아직 쌀쌀하고 아릿한 감이 있습니다.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독자 분들도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