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2
00861 D-Day, Five. =========================================================================
아침을 알리는 바람이 숲을 시원스레 휩쓸었다. 날은 아직 어스름했지만, 청명한 하늘 아래 맴도는 옅은 안개와 풀잎에 맺힌 이슬은, 이제 새벽녘을 지나 곧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둥글게 트인 구멍을 통해 들어온 상쾌한 바람을 느낀 걸까. 나뭇잎이 소복이 쌓인 침대에 누워 있던 에르윈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이윽고 손가락부터 살며시 꼼지락거릴 무렵, 문득 밖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르윈. 일어나세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요히 감겨 있던 눈이 반짝 떠졌다. 에르윈은 느긋이 기지개를 켜며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문을 응시했다.
“에르윈?”
“네.”
에르윈은 가슴을 한 번 지그시 누른 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모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문을 나서자, 한 성숙한 여인과 귀여운 남아가 꾸벅 인사했다. 두 명 모두 귀가 뾰족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에르윈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편안하네요. 바오도 잘 잤니?”
젖살이 통통한 발그스름한 색의 뺨을 콕 찌르자, 바오라고 불린 아이는 큼직한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호기심 가득한 낯으로 에르윈의 종아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여인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에르윈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에르윈이 사뿐사뿐 걸어 탁자에 앉은 순간, 바오는 붙잡고 있던 종아리를 앙증맞은 손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에르윈 님, 에르윈 님.”
“왜 그러니? 바오?”
“있잖아요. 곧 그날이죠?”
“…….”
찰나의 순간, 에르윈의 얼굴에 경직이 스쳤다.
“바오!”
그러나 주방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오자,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렇지. 왜? 궁금한 거라도 있니?”
“에, 에르윈.”
“괜찮아요. 이미 공공연한 일일 텐데요.”
“하지만….”
한껏 높아졌던 목소리가 조심스레 흐려졌다. 바오는 한층 안심한 얼굴로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이제 정말 새 여왕님이 생기는 거예요?”
“후후. 글쎄.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으응. 하지만 이미 결정이 났다고….”
“바오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바로 여왕님이 선출되는 건 아니야. 아직 최종회의도 남았고, 하이들이 주관하는 여러 엄격한 심사도 거쳐야 하고, 위그드라실 앞에서 의식도 치러야 하는걸? 이 모든 걸 근시일 안에 할 수 있을까?”
에르윈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고, 바오는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낯에 서린 궁금함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정말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이.
“왜요?”
“응?”
질문을 던진 바오는 돌연 창밖을 응시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는 창문 너머 우거진 푸르스름한 나무를 가로질러, 멀리서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에 꽂혔다. 과장 조금 보태서 숲 어디서 봐도 보일 것 같은 거대한 고목은, 가지마다 꽃이 화려하게 만개해 아름답고 수려한 자태를 뽐냈다.
“꽃이 피었잖아요.”
조금은 시무룩해진 음성. 에르윈은 반사적으로 입을 꼭 맞댔다.
“위그드라실의 꽃이 피었다는 건.”
“가시나무 관이 인정하는, 진정한 여왕님이 탄생했을 때뿐이지. 그러고 보니 바오는 요정 신화를 좋아하지? 잠자기 전마다 꼬박꼬박 읽을 정도로. 요즘도 그러니?”
에르윈이 묻자, 바오의 낯에 화색이 돌며 방긋 웃는다.
“네. 세상을 구한 마르가르타 님의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외울 수도 있어요. 아, 나쁜 인간 마법사한테 잡혀가는 내용은 빼고요. 그 부분은 읽기 싫으니까요.”
“맞아. 그 부분은 정말 안타까웠어. 아무튼, 오늘 새 여왕님 선출이 결정될지도 모르는데, 바오는 그게 싫은 거야?”
바오는 다시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뾰족이 솟은 귀도 축 늘어졌다. 즉각 반응하는 풍부한 표정 변화가 웃긴지 에르윈은 쿡쿡 웃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어요. 어떤 이유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여왕님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요. 실제로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돌았으니까요.”
그러나 한동안 입만 달싹거리던 바오가 말을 꺼낸 순간, 조용히 웃음을 멈추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아요.”
“뭐가 아닌데?”
바오가 흘깃흘깃 눈치를 살피자 에르윈은 괜찮다는 듯 상냥히 반문했다.
“니뮤에 님은 분명 좋은 분이 맞지만, 그래도 엄밀히 말하면 여왕님은 아니잖아요. 그분이 훨씬 전에 있을 때는 꽃도 피지 않았고, 가시나무 관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응.”
“그냥 여태껏 기다려온 만큼,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진짜 여왕님이 여왕 자리에 앉았으면 좋겠어요.”
“…….”
아직 어려서 그런지 표현은 어수룩했지만 어쨌든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다. 어찌 보면 불경한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에르윈은 꾸짖지 않았다. 외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특하다는 눈길로 바오를 응시했다.
“그렇구나. 그럼 바오가 생각하는 진짜 여왕님은, 어떤 여왕님이야?”
그러자 바오는 다시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신화에서 본 대로요!”
“그렇구나. 예를 들면?”
“으응~. 그러니까 우선 모든 정령의 우러름을 받고, 지금은 소멸한 빛과 어둠의 정령도 다스리는!”
“아니. 그건 안 돼.”
그때 주방에서 나온 요정 여인이 그릇을 탁자에 놓으며 말을 끊었다.
“오 대 정령들의 우러름이야 날 때부터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빛과 어둠의 정령은 불가능해.”
“에?”
“바보. 뭘 혼동하는 거야? 빛과 어둠의 정령은 초대 여왕님 이후로 등장한 적이 있었니?”
“…아!”
바오는 이제 깨달았다는 듯 뒤늦게 탄성을 질렀다.
“마, 맞아요. 그러고 보니 위험성을 인지한 초대 여왕님이 스스로 혼돈의 결정(結晶)에 봉인하셨다고….”
“정확히는 감당하지 못하셨던 거겠지. 가시나무 관을 오염시키는 걸 넘어, 여왕님조차 침식당할 정도셨다니까. 뭐, 그만큼 강력한 정령들이었다고는 하지만.”
“하지만 진짜 새 여왕님은 다루실 수 있을지도….”
“역대 여왕님 중 가장 강력하셨던 분이 초대 여왕이었던 알체스테 님인데, 아마 힘들지 않을까?”
자꾸만 부정적인 말을 해서 그런지 바오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요정 여인은 피식 웃었다.
“글쎄. 여왕님을 뛰어넘는 존재가 나온다면 또 모르겠네.”
바오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이자,
“예를 들면 날개가 열두 쌍이 아니라거나?”
어깨를 으쓱거리며 농담처럼 말한 후, 탁자의 그릇을 톡톡 두드렸다. 에르윈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바오를 번쩍 안아 들고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달래듯이 말했다.
“자, 질문은 여기까지. 아침을 맛있게 먹으면 다시 받아줄지도?”
“네!”
바오는 힘차게 외치며 고소한 냄새를 흘리는 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한편, 같은 시각.
“우와아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오오.”
북 대륙, 머셔너리 캐슬에서는 때아닌 탄성이 곳곳에서 터지는 중이었다. 아니. 탄성이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정원에 펼쳐진, 바다 빛과 용암 빛이 대치하는 대조적인 광경 때문이었다.
“정말 엄청나군요.”
김수현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미소 지었다.
“설마 정령 군단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그렇게 말하는 김수현의 주변에는, 인어 형상을 한 정령 기백 마리가 부드럽게 굽이쳐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진한 물빛을 띤 것이, 흡사 잔잔히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는 듯하다.
“아직 부족해요. 정령 왕 소환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걸요.”
옆에 서 있던 정하연이 겸손히 대답했다.
“부족하긴요.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이나 성장했는데요.”
“후후. 사라 씨가 들으면 섭섭하겠어요. 같이 열심히 노력했는데.”
정하연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끊자, 김수현은 흘끗 옆을 응시했다. 하지만 곧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사라가 소환한 독수리를 닮은 불의 정령 군단도 거의 장관에 가까웠다. 그러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끼요오오!
“오 마이 갓! 갑자기 왜!”
끼요오오!
“그, 그만! 그만 좀 하라는 말입니다!”
몹시, 발광하고 있다. 꼭 폭발하는 화산처럼 자꾸만 날개를 움직이며 날아오르는 중이었고, 사라는 통제를 벗어나려는 정령들을 진정시키려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백에 이르는 시선이 하나같이 김수현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화정으로 친화력 상승에 도움을 준 과정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김수현은 헛기침과 함께 눈을 돌렸다.
“아무튼, 정말로 대단합니다. 정말 수고했어요.”
“아, 아이 참. 칭찬은 그 정도만 하세요. 별것도 아닌데….”
그래도 내심 기쁜지 정하연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흥. 맞아. 정령 군단이래 봤자 마수 군단에 패배했는데 뭐. 정말 별것도 아니지.”
그때였다. 김수현의 칭찬이 거슬렸는지, 누군가 한쪽에서 배배 꼬인 음성으로 빈정거렸다. 그 순간 정하연은 웃는 낯 그대로 휙 고개 돌렸고, 짝 다리 짚고 서 있던 비비앙은 흠칫 놀라며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먼 산을 응시했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흠. 날 높이 평가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백한결.”
“…네?”
비비앙의 옆에서 조용히 감탄하고 있던 백한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내가 이제껏 여러 군단을 소환하면서 한 번도 김수현의 칭찬을 들은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일개 인간이 차원을 넘어 소환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자, 그러니 어서 사과하도록 해.”
“네, 네? 아, 아니에요! 제가 말한 게…!”
별꼴이라는 듯 쏘아붙이는 비비앙과, 억울함에 겨워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백한결.
“뭐라고? 그럼 사과 못 하겠다는 거야? 너 정말 못된 아이구나? 안 그래? 김수현?”
“으음. 비비앙?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거기 가만히 있어봐.”
김수현은 담담히 끄덕이더니 머리를 좌우로 꺾으며 위협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비앙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한참 동안 한심하다는 눈빛을 빛내던 김수현은, 이내 깊은 한숨을 흘리며 물의 정령들을 응시했다.
잠시 후.
“흠….”
낯에 근심하는 기색이 확연히 드러나자, 정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수현? 왜 갑자기…. 아.”
그러나 김수현이 보는 곳을 같이 쳐다본 정하연은, 곧 짧은 탄식을 흘렸다.
두 남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마르가 유니콘, 아기 페가수스와 함께 방방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고요히 서 있던 물의 정령들은 그런 마르의 주변으로 겹겹이 모여 모시듯이 이동하고 있다. 위협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전원 호감, 아니 거의 경외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정령이 소환자의 통제를 벗어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정하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짚이는 바는 있었다.
“마르는 아직 딱히 변화가 없습니까?”
가만히 응시하던 김수현이 문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네. 수현이 빙하의 설원으로 나가 있는 동안, 체내에 결정을 결합했다고는 들었어요. 하지만….”
정하연은 조심스레 말했으나 그 이상은 모르겠다는 듯 말을 마쳤다.
“저런 반응을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혹시 그때 금기의 영향 때문일까요?”
그 순간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김수현이 뇌리를 스쳤고, 동시에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현재로써는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원래 실재할 수 없는 존재이나, 본인의 의지와 기이한 현상이 합쳐 이루어진 기적의 현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전대 요정 여왕의 힘과 지식은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아직 완전히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정들이 공통으로 겪는 각성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때는 정의 가능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김수현은 곧 거주민 정보 창을 닫았지만, 시선은 한동안 마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마르의 등에 달린 아름다운 열세 쌍의 날개에 꽂혀 있었다.
요정에게 허락된 최대한도의 날개 숫자는 열두 쌍. 역사상 모든 요정 여왕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열두 쌍의 날개를 가졌다고 한다. 초대 여왕인 알체스테도 그렇고, 최후의 여왕인 마르가리타도 똑같다.
하지만.
‘그럼 마르는…. 대체 어떤 존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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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재가 늦어진 점 사과 드립니다.
오늘부터 다시 일일 연재로 복귀하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