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68
00867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살다 보면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놀라 기절할 뻔했어!’
말인즉 졸도 상태에 이를 만큼 혼비백산했다는 건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웃긴 이야기다. 일순 꽥 소리 지르거나 난리 치는 정도라면 모를까, 단순히 놀라서 정신을 잃는 지경까지 이른다는 게 말이 되나?
뭐, 모르겠다. 겪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던 게 불과 십 초 전인데.
“…….”
외출을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조금이지만 생각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정말 놀라 자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할 말을 잊었다.’ 라는 말이 어떤 기분인지는 충분히 실감했고, 하고 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현재 정적만이 흐르는 방에는 총 세 명이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다.
조금 더 정확히 인지해볼까? 우선 침대에 대(大)자로 누워 코를 묻은 안솔과, 고개를 갸웃하는 마르. 그리고 책상 구석에 놔둔 ‘괴물 소환 상자 4’로 손을 뻗은 채 딱딱히 굳어 있는 제갈 해솔까지.
상당히 보기 드문 조합이기는 한데…. 좋아. 상황은 이해했다. 아마 전에 압수한 상자를 몰래 가져가려다가 딱 걸린 듯싶다. 그래서 저렇게 전원 동작 정지 상태로 있는 거겠지. 이 예측이 맞는다면 남은 건 단죄뿐인가?
그때였다.
“잠깐!”
느긋이 들어선 찰나, 주동자로 추정되는 여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내 상자를 주섬주섬 옷 속으로 집어넣은 제갈 해솔은, 볼록해진 배를 내세우며 나를 돌아본다. 뭐지. 변명이라도 하려는 건가.
“알아요. 이해해요. 멋대로 방을 뒤졌는데 당연히 화나겠죠. 저라도 화났을 거예요.”
“잘 아네요. 그럼 뭡니까. 그 사뭇 의연한 태도는.”
바로 되묻자, 훗 웃는다. 배, 아니 상자를 토닥거리며 여유 부리는 모습이 좀 얄밉다.
“더 들어봐요. 우리는 당신이 곧 도착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
“안솔이 그러더라고요. 곧 오라버니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빠져나가자고.”
“힉.”
그 순간 죽은 듯 누워 있던 안솔의 몸이 움찔했다. 아, 그런 애가 침대에서 저 지랄을 하고 있었군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참고 들어볼까.
“그래서 혹시 몰라 대비책을 세워놨다는 거죠. 후후.”
“그거 정말 기대되는군요.”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우선 저희 쪽 요구 조건을 말하겠어요.”
“예. 유언이라면 얼마든지.”
“이 상자와 함께 우리를 무사히 보내준다면…. 어? 이, 이봐요. 더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걸요? 마법 트랩 뿌려놨는데?”
“호.”
무시하며 걸어가자, 정말 트랩을 설치했는지 바닥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클랜 로드 시해 죄 추가.” 라고 통보한 후, 하나씩 차례대로 꾹꾹 지르밟아줬다. 결과적으로 트랩은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무력하게 부서졌다.
“…미친.”
뭘 그리 놀란 표정을 짓나. 내 마법 저항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간단히 트랩을 통과하자, 제갈 해솔이 흠칫 물러서며 고개를 흔든다. 또 무슨 흉내를 내려고 저러시나.
“오, 오지 마! 싫어, 싫어!”
“…….”
“나더러 어떡하라는 건데!”
“…….”
“어떻게 해야 좋았던 거냐고!”
“아, 저도 그 만화 봤어요. 참 재밌었는데.”
그때 여태껏 자는 척하며 누워 있던 변태가 반응했고, 제갈 해솔은 살며시 입을 짓씹었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가만히나 있으라는 얼굴로 안솔을 노려보더니, 돌연 눈을 앙칼지게 뜨며 나를 매섭게 쏘아본다. 꼭 악당에게 패배하고 위기에 몰린 여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졌네요. 좋아요. 마음대로 해요. 당신이 이겼으니까.”
“뭘 이겨요. 그냥 사과 한 마디면 될 것을.”
“싫어!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 애초 당신이 원하는 것도 그거 아냐? 그 추잡스러운 흉물로 나를 엉망진창으로…!”
“…….”
참는 건 여기까지. 저렇게나 맞고 싶다는데 기대에 부응해주는 게 도리겠지. 나는 주먹을 높이 들어 힘껏 내리찍었다.
잠시 후.
약간의 폭력을 사용한 결과,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했다. 상자도 다시 뺏었고, 두 여인은 나란히 무릎 꿇은 채 허연 김이 나는 정수리를 쓱쓱 문지르는 중이다. 누가 왜 안솔도 쥐어박았느냐 묻는다면, ‘갈 때 가더라도 상자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라고 까불어서라고 하겠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는 마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은 후, 조용히 둘을 돌아봤다.
“연구 때문에 상자를 가져가려고 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제갈 해솔은 평소 안솔의 행운에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 그 비밀을 밝혀낼 목적으로 접근했다고 하는데, 여기까지는 좋다. 화정과 동격의 신마저 소환하는 저 능력을 임의대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그만한 무기도 없을 테니까.
문제는 제갈 해솔이 접근하자, 안솔이 저번 상자 사건(?)을 털어놨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상자를 되찾을 겸, 그리고 안솔의 행운과 상자의 상관관계를 실험할 겸 집무실로 잠입했다는 소리다.
“그럼 미리 양해를 구하던가…. 그나저나 마르는 왜 끼운 겁니까?”
이마를 꾹 누르며 묻자, 제갈 해솔이 휙 고개를 젖혔다.
“일종의 보험이죠.”
“보험?”
“어, 언니! 말하지 마요!”
“네. 걸렸을 때를 대비해 마르를 방패로…. 죄송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그나마 잘못한 건 아는지 빤히 노려보자 금세 고개를 숙인다.
“아빠….”
그때 아까부터 눈치만 보던 마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먹거렸다. 두 언니만 혼나는 게 마음이 아픈 걸까. 평소라면 뾰족했을 귀가 축 늘어져 있다. 시무룩해 하는 게 분명하다. 잘못한 건 맞지만 애가 뭘 알겠어. 저 두 명이 감언이설로 꾀었겠지.
“아니야. 마르는 잘못한 거 없어.”
“죄송해요…. 저요, 상자를 너무 열어보고 싶어서….”
“그래? 이거?”
“네…. 정말 잘못했어요….”
입을 꼭 문 채 목소리가 늘어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듯하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 조금은 가슴이 짠해졌다. 안 그래도 요즘 하루 얼굴 보는 게 힘든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이미 상자를 건네고 있었다.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자.”
“에?”
억지로 쥐여주자 마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두어 번 깜빡이더니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귀엽네.
“아, 아빠?”
“열고 싶으면 열어야지. 열어봐.”
“그래도 돼요?”
“그럼. 하지만 다시는 이러면 안 돼?”
“…으, 응!”
“에에에엑!”
그 순간, 그러니까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마르가 감동한 얼굴로 안기려는 찰나, 누군가 시끄럽게 소리 질렀다. 흘끗 옆을 흘기니 제갈 해솔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안솔은 입을 쩍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서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상자, 안솔 거라고 했나?
“오라버니…. 그거 제건데요….”
“미안. 이번에는 네가 양보 좀 해줘.”
“하지만 백만 GP나 주고 산 건데….”
“보상은 당연히 해주지. 단, 상자는 절대로 안 된다.”
짐짓 엄하게 말하자 입이 삐쭉 내밀어 졌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 애초 저 상자를 압수한 것도 안솔이 내 지시를 어겨서가 아닌가.
“저, 언니.”
그때 상자를 소중히 끌어안은 마르가 안솔을 돌아봤다.
“…왜.”
“그럼요. 이거 저랑 같이 열면 안 돼요?”
“어? 같이 열어? …그, 그럴까?”
“네. 우리 같이 열어요.”
마르가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다가가자 안솔이 혹한 낯으로 나를 바라본다. 꽤 애처로이 쳐다보기는 하지만 안.
– 잠깐, 놔둬 봐.
그때였다. 머리를 가로저으려는 순간 갑자기 화정의 음성이 들렸다.
‘놔두라고?’
–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바로 닫을 준비는 하고.
‘뭐야. 저번에는 아예 열지도 못하게 하라면서.’
– 흠…. 그렇기는 한데….
화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말을 이었다.
– 내가 예전에도 한 번 말한 적 있었지? 요정 여왕이 말이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요정들이 괜히 여왕을 신성시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고 보니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다. 총 세 번이었나? 비아트리스 스텔라를 나한테 먹였을 때 한 번, 강철 산맥 공략 전에 한 번, 그리고 소망의 망치를 얻었을 때 한 번.
‘좀 애매한데. 그리고 마르는 아직 요정 여왕도 아니잖아?’
– 엄밀히 말하면 그렇기는 해. 아무튼, 가만히 보고 있어봐. 밑져야 본전 아니니.
조금 꺼림칙하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결국 허락해주고 말았다. 뭐 여태껏 화정의 말을 들어 손해 본 기억은 없으니 우선 지켜보는 게 낫겠다. 여차하면 닫으면 되겠지.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여는 거야?”
“응!”
상자를 둘러싸고 꺅꺅거리는 두 아이를 보고 있자, 문득 누군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적당히 좀 합시다.”
미리 선수를 치자 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뭘 적당히 해요?”
“몰라서 묻는.”
탁!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제갈 해솔은 왼쪽 다리를 책상에 걸쳐놓는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런 거?”
“안 부끄러워요?”
“당연히 부끄럽죠. 더구나 다리는 제 성감대이자 매력 포인트인데.”
“…제가 우습습니까?”
연초를 한 대 꺼낸 후,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말했다. 앞에 두 명은 상자에 한창 정신이 팔렸으니 들리지 않을 것이다.
“에이, 괜히 무게 잡지 마요. 저도 상처받으니까.”
“그게 아니라, 가끔 행동이 지나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다리를 도로 접어 내린 제갈 해솔은, 스리슬쩍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살거렸다.
“클랜 로드. 혹시 이런 말 들어봤어요?”
“또 헛소리라면 듣고 싶지 않군요.”
“그래도 들어봐요.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알아채지 못하는 멍청한 놈은요. 가끔 딱 짚어서 말해줘야 알아듣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요.”
“……?”
“저보다 못난 놈들한테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지만, 반대로 저보다 잘난 놈한테는 한 번쯤 깔려보고 싶기도 하거든요? 아무렴, 저도 한 명의 여인인데요.”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하나, 둘, 셋!”
“셋!”
우우우웅!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두 외침이 겹쳐서 울리고, 상자는 곧장 눈부신 빛을 토해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아차 하는 동안, 찬란한 빛무리가 화려하게 폭발하며 순식간에 시야를 점령했다. ‘괴물 소환 상자 4’가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아?”
누군가 몹시 당혹해 하는, 그러나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돌연히 시원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머릿속이 개운해질 만큼 싱싱하고 청량한 이 냄새는, 흡사 맑은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했다.
*
한편, 같은 시각.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니뮤에 님은? 니뮤에 님은 어딨어!”
“모, 모르겠어요! 가시나무 관을 쓰시자마자…!”
“흰색 마법 진! 마법 진이 갑자기 나타나서 니뮤에 님을 삼키셨어요!”
항상 고요하고 평화롭던 요정의 숲은, 오늘따라 어마어마한 혼란으로 뒤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왜 사라진 거냐고!”
“가, 가시나무 관도 보이지 않아요!”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요정들을 보던 에르윈은,
“아….”
문득 가슴을 부여잡으며 털썩 꿇어앉았다.
니뮤에의 실종.
무려 팔백 년을 넘게 기다렸던, 요정 여왕 대관식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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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가시나무 관은 김수현의 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