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75
00874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하아, 하아….
목청껏 소리 질러서일까. 어느새 호흡은 급격히 거칠어져 있었다. 어찌어찌 숨은 추스를 수 있어도, 속은 전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 터져서인지 머릿속은 묘하게 차가워졌다. 뜨거운데, 차갑다.
들끓는 목으로, 한층 낮게 말했다.
“누가 말이라도 해보라고….”
그러나 여전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한참 후.
“우리와 악마의 입장은 달라.”
앞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와, 흘끗 눈을 들었다.
“악마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그럴 수가 있기 때문이야. 반대로, 우리가 나가지 못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처음 나를 맞이했을 때부터 시종일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글쎄…. 어떨까. 우리 속사정을 밝힌다고 해도, 과연 네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결국에는 말해줄 수도, 알 필요도 없다는 소리였다. 설령 정말 어쩔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더라도, 이 지독한 현실은, 그리고 사용자의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가브리엘은 그 점을 찔러 말하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한 천사와 눈이 마주쳤다. 세라프는 서서히 눈매를 늘어뜨리더니, 이내 일그러진 눈을 감는다. 입을 꼭 깨문 채로.
“흐으으으….”
끓는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식히면서 한참 동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후으으으…. 후우우우….”
“…아무래도 더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네.”
“…….”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우리도 좀 더 정보를 모을 테니까, 그때 다시 호출할게.”
완곡한 축객령. 확실히 더 이야기할 상태가 아니기는 했다.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기실 아무 천사나 붙잡고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에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돌아가기 직전, 일렁이는 포탈을 앞에 두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앞을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네.”
“……?”
“왜 남 대륙이 악마와 손을 잡았는지, 그거 하나는 알겠다.”
“…….”
*
정신없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하나는 날이 아직 어둡다는 것이고, 하나는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이다. 서늘한 바람을 맞자 조금은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머셔너리 캐슬로 돌아갈까 하다가, 북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축제를 즐길 때도 아니었거니와,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나는 해밀 클랜 하우스로 향했다.
사실 상당히 늦은 시간이기는 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방문하자, 해밀 클랜원들은 몹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동생이 형을 만나겠다는데 굳이 막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형이 있다는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응? 누구….”
침대에 누운 채 돌아보는 형이 보였다. 다행히 아직 잠들기 전인 듯싶다.
“어. 수, 수현아?”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헤 웃고 있던 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심지어 입가에는 침방울마저 뚝뚝 떨어지고 있다.
“형.”
단지 불렀을 뿐인데,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스리슬쩍 손을 숨긴다. 흘끗 시선을 던지자, 손가락 틈으로 푸른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다. 저건 아마 수정구 같은데. 기록 수정이라도 보고 있었던 건가? 굳이 숨길 이유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니지, 잘 왔어. 자자, 앉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형이 권하는 대로 순순히 앉았다. 형은 잠시 침대 아래로 몸을 숙이더니, 금세 내 쪽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천연덕스레 눈을 뜬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응?”
“아니. 얼굴빛이 안 좋아 보여서.”
“…그래?”
형은 역시 내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말해봐.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잖아?”
부드러이 달래는 듯한 음성. 그 목소리에 힘입어 나는 가브리엘에게 들었던 사건을 차분히 털어놨다. 사용자들의 반란부터 시작해서, 우리보고 남 대륙으로 가줬으면 한다는 것까지.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는 형을 보니 가슴이 차차 안정된다.
“흠…. 남 대륙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이윽고 이야기를 끝냈을 즈음, 뜻밖에도 형의 반응은 담담했다. 물론 살짝 놀란 빛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처럼 심하지도 않고, 금세 낯빛을 회복했다.
“허 참. 근래 좀 잠잠하다 싶더니, 기어코 남 대륙에….”
“별로 놀라지 않네?”
그러자 형은 기나긴 숨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포기했으면야 좋았겠지만, 어떻게든 수작을 부릴 것 같았거든. …뭐, 설마 남 대륙이 넘어갈 줄은 몰랐지만.”
“마찬가지야. 도대체….”
“그런데, 너는?”
“응? 나?”
“그 얘기 듣고 너는 어떻게 했느냐고. 아까 보니 문을 박차고 나온 것 같기는 한데.”
“…그럼 잘못한 거야?”
설마 몰래 지켜보고 있었나? 속이 뜨끔해 묻자, 형은 손등에 턱을 괴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잘했어.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어찌 보면 가장 형다운 말이었다. 형은 절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지만, 아마 머리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 찾아왔다. 감정에 이끌리기보다는, 이렇게 한숨 돌리는 게 훨씬 낫지.”
한편으로는 저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했다. 일 회차도 이 회차도, 형은 어떤 위기에서도 냉정했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일단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물론 너도 그렇고.”
“…모르겠어.”
“당연한 거야.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서로 생각 좀 정리해보자고. …아, 그리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려무나.”
“자고 가라고?”
“그래 이 녀석아. 너희 클랜 지금 한창 축제 중일 거 아니냐.”
나는 멍하니 형을 바라봤다. 오늘 축제는 형한테 알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꺼림칙한 기분마저 느낄 정도였다. 정말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건가? 무섭다.
“그런데 네가 씩씩거리면서 돌아가면 분명 파투 나겠지. 상황이 상황이다만, 그래도 오늘은 놀게 놔둬. 왜냐면 앞으로는….”
형은 약간 씁쓸해하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듣고 보니 옳은 말 같아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남 대륙이라면 바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리기도 하니. 우선 한숨 잔 후, 냉정을 찾는 게 좋겠다. 대응책을 마련하는 건 그 후에 해야 한다.
“배고프지는 않고?”
“아니. 밥맛도 없네.”
“그래. 그럼 내 방 비워줄 테니까 푹 자.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
“…응.”
형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수현아.”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무언가 잊은 게 있다는 듯 나를 돌아봤다.
“침대 아래는 절대로 보면 안 된다. 알겠지?”
…뭐가 있길래?
*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김유현은 실로 오랜만에 동생 앞에서 제대로 된 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일단 기다려보자는 등의 말로 다독였고, 아침까지 든든히 먹여 보냈다.
그렇게 동생을 보내고 나서, 점심 즈음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외출했다. 주문을 점검하고 두꺼운 코트를 걸친 것이, 흡사 전투라도 치르러 가는 모양새다. 걸음은 신전을 향하고 있었지만.
잠시 후.
“오랜만이야. 뇌제.”
김유현은 소환의 방에서 가브리엘과 맞닥뜨렸다. 담당 도우미는 아니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달라 부탁했다. 물론 천사의 수장이니만큼 요청한다고 무조건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게 두 번째 만남인가?”
“아마도. 수호자 사건 때 처음 만났지.”
그러나 김유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김수현의 형이라는 점에서.
“그러네. 네 덕분에 김수현을 수호자로 세울 수 있었지…. 아무튼,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너는 예상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음~. 귀여운 동생이 홀랑 찾아가 하소연했나?”
“응. 그러더라. 화장실에 도착해서 변기를 열었는데, 누가 똥을 싸놨나 봐. 그것도 아주 질펀하게 말이지.”
가브리엘이 웃는 낯으로 비아냥거리자, 김유현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가브리엘은 혀를 찼다.
“칫. 할 말은 없네.”
“탓하려고 보자고 한 건 아니니까.”
“김수현은? 화 많이 났니?”
“응. 당분간은 호출하지 않는 게 좋을걸.”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김유현은 목적이 있어 보자고 했고, 그걸 알고 있는 가브리엘은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헤에. 그 정도로….”
“좋은 기회라 생각하라고 했다면서? 아마 그 말에 폭발한 것 같던데.”
“아이. 오해야, 오해.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가브리엘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전에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남 대륙은 악마와 손을 잡은 건가? 잠식된 게 아니라?”
“응.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아니. 맞아.”
“그런가…. 그럼 정말로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번 더 긍정하자, 가브리엘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서 대륙처럼 잠식이 아닌, 공존을 선택했다…. 얼마나 시간을 들였는지는 몰라도, 남 대륙 인간들이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서.”
“후후. 다 알고 있네. 그것도 들은 거야?”
“글쎄. 아무튼, 성공했다는 점에서 손뼉 쳐줄 수는 있지만, 경과나 사후 처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즉 꽤 억지로 밀어붙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재밌네. 더 자세하게 말해봐.”
“그냥 역지사지로 생각해봤을 뿐. 나라면 절대로 그렇게 급하게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
“호오.”
“물론 그쪽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뭐, 장고 끝에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심정도 이해는 해.”
“후후. 뇌제, 혹시 그거 알아?”
가브리엘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웃는다.
“수호자 자리가 공석일 때 있잖아. 원래 김수현이 아니라, 네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어. 우리 내부에서 말이야.”
“왜. 나를 통해서 수현이를 조종하려고?”
너스레를 떨자, 고개 젖힌 가브리엘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 찰나의 순간, 김유현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실은, 예전에 수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
“응? 무슨 말?”
“이 홀 플레인이 마음에 든다고. 아직 고민하고는 있지만, 계속 살 생각도 약간은 생긴 것 같더라고.”
“…그래?”
뚝, 웃음이 멎었다. 사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가브리엘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김유현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러나 어느 순간 냉랭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둘 사이로 흐르던 공기 온도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것참 괜찮은 생각.”
“거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가브리엘의 말을 끊고, 김유현이 말을 잇는다.
“여기서 계속 살 거라면, 굳이 제로 코드가 필요할까?”
제로 코드라는 말이 나오자, 가브리엘의 낯이 딱딱히 경직됐다. 김수현에게 들었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반사적인 반응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 물론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 그런데, 어쨌든 나나 수현이나 썩 부족한 상황은 아니라서…. 그게 꼭 필요한 처지는 아니거든?”
“너.”
“그러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이대로 평화롭게 사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
무언가 말하려던 가브리엘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두 눈은 어느새 한껏 가늘어져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그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으며 김유현은 빙긋 미소 지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서슬 퍼런 엄포에도 불구하고, 김유현은 느긋이 팔을 움직였다. 남성치고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턱밑에 살짝 닿는다.
잠시 후.
“남 대륙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 그래. 좋아.”
김유현은 깊이 생각하는 체하며 턱을 어루만지더니,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우리도 악마와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 작품 후기 ============================
어제 내용을 절단으로 생각하셨다면 Song9(?) 합니다.
예전에 절단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독자 분들의 심기를 상하게 했으니 면목이 없네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절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마 제가 생각하는 절단과 독자 분들이 생각하는 절단의 초점이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절단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니, 부디 느긋하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