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76
00875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악마와 마족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가장 쉽게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나오자마자’ 혹은 ‘소환되자마자’ 처리하는 것이다.
중간 세상에서는 ‘인과율’이라는 법칙에 의해 이(異) 차원의 힘이 상당 부분 제한된다.
그리고 갓 소환된 당시에는, 놈들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놈들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회고록 中』
*
눈을 뜨니 따사로운 햇살이 나른한 몸을 두드렸다. 해는 벌써 중천에 올라 방 안 곳곳에 햇빛이 스며 있다. 형의 말대로, 일단 젖혀두고 잘 먹고 잘 자는 데 주력해서 그런가. 이틀이 지나니 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기분이다. 어쨌든 오늘 늦잠을 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침대에서 걸어 나와 찌뿌듯한 몸을 풀었다.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자 머리가 한결 상쾌해진다. 그래. 확실히 괜찮아진 듯싶다. 이 정도면 다시 천사와 대면해도 저번처럼 날뛰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우선 세안을 마치고 가볍게 식사부터 해볼까?
쿵쿵쿵쿵, 쿵쿵쿵쿵!
라고 생각하자마자 문밖 복도가 시끄러워졌다. 아침 댓바람…. 은 아니어도 또 누가, 어떤 문제를 일으킨 걸까. 이제는 아예 걱정부터 앞선다. 들어보니 한 명도 아닌 것 같은데.
쾅!
잠시 후, 문이 뻥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예상대로 침입한 동물은 두 명. 씩씩대는 암컷 하나, 그리고 분노에 몸을 떠는 수컷 하나. 이유정과 진수현이다.
“오빠!”
“형님!”
귀가 따가워지려는 찰나, 황급히 검지로 둘을 가리켰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바로 합! 동시에 입을 닫는다. “쉿.” 신호를 보내고 나서 가까이 오라 까닥까닥 손짓했다. 둘은 서로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끄덕끄덕. 이어서 조용조용 걸어오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이제….
“오빠아아!”
“형니이임!”
…아무래도 좀 얕본 듯싶다. 학습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오빠 이 새끼 존나 욕심쟁이야! 이거 내가 받은 건데…!”
“뭐가 욕심쟁이냐? 나도 같이 임무 수행했잖아! 그리고 일은 내가 훨씬…!”
“어쩌라고? 어쨌든 내가 받은 건데? 나한테 준건데?”
“와. B급 주제에 개기는 것 좀 보소. 나 A급으로 오른 거 모르나 봐?”
그러고 보니 둘은 각자 손으로 옷같이 생긴 걸 움키고 있었다. 아마 저 장비를 두고 싸움이 난 듯싶다. 우선 이마까지 맞대며 으르렁대는 둘을 떼어놓은 후, 문제가 되는 물건을 압수했다. 언뜻 보니 가죽으로 된 상당히 멋들어진 경장 갑옷이다.
“흠….”
아닌 게 아니라, 한눈에 봐도 성능이 좋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표면에 은은히 흐르는 붉은빛은, 추가 효과가 하나 이상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역시 내 생각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썩 괜찮은데?”
물리 방어력이나 마법 저항력도 상당한 수준이고, 마법으로 유연성을 높여 활동성도 한층 높였다. 그리고 외양이 괜찮은 것도 한 몫 했을 터.
“이것 때문에 싸우는 거야?”
“응! 그러니까 오빠가 정해줘. 이거 내가 가져야 하지? 맞지?”
“에이~. 아니죠. 형님. 저죠? 그렇죠?”
“글쎄…. 그나저나 이거 어디서 얻었어? 최근 원정 보고는 받은 적 없고, 임무 수행 보상은 웬만하면 대금으로 받기로 돼 있잖아?”
그때였다.
“어….”
“에….”
좀 전까지만 해도 침까지 튀기며 말하더니, 갑자기 방 안이 적막해졌다. 어느새 합죽이가 된 둘은 꺼림칙한 표정을 짓더니 서로 눈치만 살핀다.
잠시만. 설마….
“너희.”
“아, 아니야! 오빠! 우리 로비 같은 거 안 받았어!”
이유정이 펄쩍 뛰었다.
“그럼 왜.”
“타, 탐낸 건 맞아요. 그쪽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겠죠.”
“야 인마.”
“하, 하지만 그뿐이에요! 실제로 우리 아니었으면 원정도 성공 못 했을 거고, 대금도 따로 받지 않았으니까요. 즉 추가 보상 개념이라고요.”
“정말로? 다은이한테 확인해봐도 돼?”
“에이, 형님! 설마 우리가 와이로를 받았겠습니까? 억울합니다!”
진수현은 가슴을 탕탕 치며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만일 문제 생기면 알아서 해.”
결국에는 엄포를 놓은 후, 입맛을 다시며 물건을 집어 들었다. 둘은 후유 숨을 내쉬더니 이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부담스럽다. 사실 두 명 중 누가 입어도 어울리는 물건이기는 하다.
“이건….”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이내 결정할 수 있었다.
“유정이가 입으면 좋겠다.”
그 순간 나는 아주 극명하게 갈리는 두 개의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이유정은 굉장히 사랑스러운 소녀와도 같은 표정을 지었고, 진수현은….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꼭 살면서 쓴맛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드는 듯한….
“꺄하하하! 꺄하하하!”
그리도 좋은 걸까. 이유정은 방방 뛰며 기뻐했다.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오빠 사랑해.” 라고 속삭인다. 이윽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더니 콧대를 척 세우며 여유롭게 걸어나갔다. 누구 들으라는 듯한 코웃음은 덤이려나.
“흑….”
진수현은 가관도 아니었다. 시무룩한 걸 넘어 숫제 울먹거리기까지 하고 있다. 입이 삐죽하니 솟은 게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모양새였다.
“형님은 맨날 여자만 편애하고….”
나 참. 애도 아니고.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서랍을 열었다. 안 그래도 계속 처박아두기 그랬는데 진수현한테 주면 딱 맞겠다.
“옜다. 받아라.”
펄럭!
손을 던지자, 펄럭이며 날아간 도복과 허리띠가 정확히 바로 앞에 떨어졌다. 진수현은 힘없이 머리를 떨궜다가, 돌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준 게 뭔지 바로 알아본 듯싶다.
“혀, 형님….”
“왜.”
“이건…. 형님이 소식적에….”
“소싯적은 무슨. 나 아직 젊다. 아무튼, 가져가. 나는 더 좋은 게 있고, 어차피 너 줄까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진수현이 갑자기 넙죽 엎드렸다.
“형님! 방금 제 실언을 용서해주십시오! 이 우둔한 놈이 형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평소 감정적인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슬슬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곧 긴히 쓰일 일이 있을 테니….”
“예?”
“아니, 아니야. 이만 나가도 좋아. 그리고 너무 자랑하지는….”
“야아아아! 이유정! 봤어? 봤지! 으하하하!”
우당탕탕, 쿵쾅!
진수현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
어스름한 오후.
나는 테라스에 서서 먼빛의 도시를 내려다봤다. 서서히 땅거미가 깔려서 그런지 곳곳에 불빛이 흐르고 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소란스럽더니 밤이 다가오자 겨우 잠잠해지고 있다.
한참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 나도 모르는 사이 도시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문득 느꼈다.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천사의 호출은 아직이다. 사실 처음 불렸을 때는 상의 차 만나려 했던 감도 없잖아 있었다. 물론 남 대륙으로 갈 수는 있겠지만, 형의 말대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악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좀 더 정보를 모아본다고 했으니 기다려보면 알 수 있을 터.
악마가 남 대륙으로 타깃을 변경했고, 계획은 성공했다. 확실히 예상외의 일이기는 하다. 천사가 잘 막아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아직도 남아 있다. 입맛이 쓰지 않으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이제 와서 탓하고 후회해봤자 뭐하나.
한편으로는 ‘아, 완전히 망했어.’ 고 울상을 지을 필요도 없다. 분명 사탄의 수완은 놀랍지만, 하나씩 따져보면 왜 이 시기에, 왜 이런 초강수를 뒀는지 생각하게 된다. 아니.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고?
급하니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자기들도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까.
우리 북부는 구 대륙부터 신 대륙까지 착실하게 힘을 쌓았다. 내전은커녕 춘추 전국 시대를 뛰어넘었고, 비밀 도서관을 개방해 성과 흡수를 앞당기기까지 했다.
이와 반대로, 악마는 계속해서 세력이 깎여오지 않았는가. 악마 14 군주는 물론, 바알마저 목숨 하나를 잃었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흐름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말인즉, 이것만 막아내면 악마는 완전히 끝난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내전으로 점철된 일 회차 때도, 끝내 이긴 건 인간이었다. 거기다 현재 이 회차는, 일 회차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상황이다.
물론 이렇다고 100% 이길 거라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과거 인간이 벼랑 끝에서 역전을 이뤄냈던 만큼,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다. 악마의 발악은 분명히 무서울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최후의 몸부림마저도 가뿐히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연주.”
“네.”
방 안에는, 어둠 속에서 다소곳이 무릎 꿇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검은 그늘’을 사용하고 있는지 형체가 그늘에 가려 희미하다.
“대표 클랜을 위주로 소문을 흘려주십시오.”
“소문이요?”
“네. 곧 남 대륙을 상대로 전쟁할지도 모른다는….”
“……!”
불현듯 고연주의 모습이 선명해졌다가, 노이즈를 보이며 어렴풋해졌다. 그림자가 심히 진동하는 게, 아마 상당히 동요한 듯싶다.
“확실하나요?”
“확실합니다.”
“아, 설마 축제 때 갔던 게….”
“예. 한데 아직 정보가 부족합니다. 천사 쪽에서 노력하고 있다지만, 함부로 노출할 상황은 아니에요. 그러니 제 신분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만 전하되….”
나는 적당히 말을 흐렸다.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테니까.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고.
고연주는 이해했다는 듯 주억이더니 스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도로 앞을 바라봤다.
“…….”
그런데, 고연주의 기척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이번 일과 관련된 건 아니지만요.”
흡사 말해도 돼요?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어조에 머리를 끄덕였다.
“뭡니까?”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결단?”
“네. 상대는 몹~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죠.”
말이 너무 포괄적이다.
다시 몸을 돌렸으나 방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웅덩이처럼 괸 그림자만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뿐.
잠시 후.
“이대로 계속 외면하신다면…. 그래서 결국 늦어버리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른한 음성이 울린다.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후훗, 웃는 소리를 끝으로 기척은 귀신같이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으아, 부끄러워 죽겠네요.
아니 독자님들. 제가 오늘 글을 적다가 갑자기 몸이 좀 뻐근했거든요. 그래서 두 팔 쭉 올리고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는데, 진짜 엄청 시원했지요. 거의 쾌감이 느껴질 정도?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켜는 도중에 좀 이상한 소리를 냈습니다. 아니 그리 이상한 소리도 아니에요. 그냥 비명에 가까운 신음?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형이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 가관입니다.
밤중에 웬 야생의 곰 새끼가 포효하는 줄 알았다네요. 그리고 조용히 좀 하래요. 옆집 보기 창피하다고.
괜히 쪽팔려서 등짝이라도 때리려고 쫓아갔는데, 지그시 쳐다보길래 무서워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아니 내 방에서 기지개도 못 켭니까.
좀 서러운 밤이네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