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78
00877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정원은 조용하다.
아니. 일부러 이른 시간을 골랐으나 서너 명 인기척은 느껴졌다. 아마 아침 일찍 일어났다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구경하는 중인지 확인할 틈은 없다. 왜냐면 눈앞의 마르가 오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까. 상대가 내게 집중해주는 만큼, 나도 상대에게 집중한다.
“…시작할게요.”
문득 들려오는 무겁게 침잠한 음성. 이어서 양팔을 아래로 늘어트리더니 조용히, 그러나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영창 한다.
마르의 태도는 몹시 서글프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여도 귀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소처럼 꼿꼿하게 솟은 게 아닌, 아래로 축 늘어져 있으니.
물론 그 마음은 알고 있다. 어찌 모를 수 있으랴.
마르 입장에서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 못 할 수도 있다. 단지 돕고 싶다 했을 뿐이며,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돕겠다는 말을, 내가 기쁘게 받아주는 모습을 말이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었다.
…한데, 그랬다면 과연 괜찮았을까?
그때였다.
웅웅웅웅!
상념에 잠긴 동안, 시야에 흰빛으로 살며시 비추기 시작한다. 근원지는 마르의 바로 앞. 빛이 둥글게 엉기며 눈 부신 빛 덩이가 만들어지고, 탄생한 구체는 점점 크기를 키워간다.
이윽고 우웅, 작은 소음을 내며 위로 상승함과 동시, 마르의 팔도 같이 올라와 나를 겨냥한다. 구체에 살짝 닿은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길까 말까 고민하는 듯이 떨리고 있다.
십사 년을 통틀어 처음 보는 능력이건만, 사방으로 뿜는 기이한 진동은 섬뜩하리만치 폭발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잠시 후, 서운함을 듬뿍 드러내는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아마 왜 계속 가만히 있느냐는 거겠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그러나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을 보니 그냥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얼른 달려가 괜히 분위기 잡아서 미안하다고, 울지 말라고 쓰다듬어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애초 진심으로 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실력을 확인한다고 마르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로 시험을 친다? 누가 들어도 오버한다고 꼴같잖다며 웃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르는 내 딸이거니와, 거주민 정보는 이미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단지, 증명해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이 증명은 강함의 척도를 가늠하자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힘을 능숙하게 사용하는지를 보자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마르 나름이겠지만, 내가 정말로 확인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였다.
“오지 않을 거냐.”
“!”
말을 건 순간, 마르의 눈이 살짝 치떠졌다. 나는 숫제 팔짱을 끼며 가만히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도발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건만, 발끈한 기색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외려 차분한 체하던 낯에 점차 갈등의 빛이 역력해진다. 그래, 혼란스럽겠지.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직 새벽 한기가 남아 있어서인지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없다. 한데, 숨 막힐 듯한 차가운 공기가 몇 번이나 스쳤음에도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에 잠긴 걸까, 아니면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걸까.
저럴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이대로 끝낼까도 싶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제대로 확인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팔짱을 풀고 무검을 뽑았다. 이어서 있는 힘껏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힘만 잔뜩 줬을 뿐, 제자리에서 세게 휘둘렀을 뿐.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썩둑!
공기가 잘리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마르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와 동시에.
탕!
세찬 총성이 울렸다. 둥둥 떠 있기만 하던 구체가, 눈부신 광채를 폭사하며 순간적으로 짓쳐온다. 갑자기 행동하자 반사적으로 방출한 것이다.
“아!”
뒤늦은 탄식이 터졌으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곧장 양팔을 늘어트렸다. 회피는커녕, 마법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마력을 동결하고, 자세도 온몸에서 힘을 뺀다. 이렇게 일체의 방어를 포기한 채,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구체의 정면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며 마르의 반응을 확인했다.
“아, 아빠!”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그러나 시야는 순식간에 흰 빛무리로 물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안…!”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단 일 초에 불과한 굉장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마르는 분명히 구체를 거두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달려든 만큼, 구체는 이미 가슴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빛살처럼 파고든 구체가 번쩍 폭발하니 시야가 멀 정도의 강렬한 빛이 작렬한다. 안 그래도 무방비 상태였던 터라, 몸은 아주 간단하게 기울어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정원을 데구루루 구르면서도,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아빠아아!”
왜냐면 몸이 멈추자마자, 황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가볍게 상반신을 드니 걱정과 혼란이 반반씩 섞인 얼굴을 한 마르가 달려오고 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빙긋 웃었다.
“합격이다.”
“왜! …네?”
“울면 취소할 거야.”
“히끅!”
그러자 울음을 터뜨리려 폼을 잡던 마르의 얼굴이 돌연 이상하게 이지러졌다. 나는 킥킥 웃으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약간의 충격은 느꼈지만, 뭐 이 정도쯤이야. 내 내구도 얕볼만한 수준은 아니거든. 전력을 담은 일격도 아니었고 말이지.
무엇보다 최후의 순간, 마르가 가까스로 기운을 거둬들였다. 극히 일부이기는 했지만.
말인즉, 내가 심하게 다치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마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힘은 완전히 거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방향은 틀었네. 머리에서 가슴으로.”
“네, 네?”
“나와 구체가 부딪치기 직전에 말이다.”
“그건….”
마르는 눈을 수차례 깜빡이며 우물쭈물하다가, 곧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다.”
굳이 ‘왜?’ 라고 묻지는 않았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아까부터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터라, 약간의 부연 설명은 필요하겠다.
“…….”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원론적이거나 진부한 말은 하기 싫었다. 가령 ‘강한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혹은 ‘진정한 사용자란 말이다.’ 등등.
한편으로는 낯부끄러운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내가 마르에게 원하는 건, 몇 년 전 애들한테 가르쳤던 것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야.”
그러나 이제 와서 웃고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에는 말해주기로 했다.
“내가 살아보니까 말이다.”
“네.”
“이 세상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더구나.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녔더라도 말이지.”
“……?”
흠. 말하고 보니 이 말도 별로 새롭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무튼, 나와 마르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한순간, 그것도 갑작스럽게 강해졌다는 것이다.
이 회차 초반, 나는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내 입맛대로 휘둘렀다. 그때는 스스로 맹목적으로 목적을 추구했고, 또 그게 옳은 줄 알았다.
허나 돌이켜보면, 그건 아마 남용이 아니었을까? 정말 심할 때는 상대를 보자마자 ‘죽여버릴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부인할 생각은 없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될 만한 일을 했고, 후회한 적도 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까지만 해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만큼 비록 내가 처했던 상황과는 다를지라도, 마르만큼은 내 그릇됐던 전철을 밟고 싶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늦었다손 쳐도, 마르는 갓 시작하는 처지이지 않은가.
물론 평소 마르의 행실을 생각하면 기우일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각성 후, 제 3의 눈으로 확인했을 때 몰래 생각을 굳혔다. 왜냐면 마르의 성향 중 하나가, 나와 같은 중용이었기 때문이다.
…뭐, 어쩌면 그것도 내 탓일지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마르는 여전히 복잡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하기야 워낙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찰나.
“응?”
나와 마르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정문이 있는 방향으로. 장내는 고요하기 그지없는데 문밖으로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역시나 정문이 활짝 열리며 서너 명이 뛰어들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저번 축제 때 봤던 신관들임을 알 수 있었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 계십니까!”
…설마, 또 호출인가?
*
소환의 방으로 입장한 순간,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수호자 호출이라길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들어가니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천상으로 향하는 포탈은커녕, 사 대 천사도 보이지 않는다.
“어서 오십시오. 수현.”
오직 세라프만이 언제나처럼 제단에 앉아 있을 뿐.
잠시만. 세라프가 언제부터 내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게 된 거지?
“어떻게 된 거야? 수호자 호출이라고 들었는데.”
“예. 맞습니다.”
“…가브리엘은?”
“일하고 계십니다.”
뭐?
“정정하겠습니다. 현재 가브리엘 님을 포함한 사 대 천사님은 물론, 북 대륙에 소속된 천사 전원이 현 사태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보자, 바로 말을 정정한다.
“그리고 현 시간부로, 저 세라프는 금번에 발생한 사태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수호자를 보조하는 측면에서 사 대 천사와 동등한 권한을 지니며, 차후 수집하는 모든 정보 또한 저한테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세라프는 이 모든 말을 몹시 빠르고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계속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우선 악마의 농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점. 그리고 후속 대처가 미흡했던 점. 이 두 사실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현재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가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연대적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내부 회의를 한 결과,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우리 천사는,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북 대륙을 돕겠습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이라면, 어떤 일이든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입니다. 또한, 의사 결정에는 조언을 초과하는 수준으로는 일체 간섭 및 강제하지 않겠으며, 무조건 수현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
…뭐지?
이러면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이것들 혹시, 히로뽕이라도 한 사발씩 들이킨 건가? 아니면 단체로 그날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세라프. 막 궁금한 게 생겼는데.”
“네. 질문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혹시 천사도…. 그…. 생리 현상 같은 걸 겪나?”
“네?”
“아니. 여성은 유독 그날에 감정 변화가 심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아니요.”
세라프는 약간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털썩 앉았다. 내심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우선은 좋은 현상으로 생각하는 게 낫겠다. 어차피 악마를 섬멸할 때까지는 공동 전선을 유지할 생각이었으니까. 타깃을 돌리는 건, 제로 코드를 얻은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
“아무튼, 나를 불렀다는 건 확실한 정보를 잡았다는 거겠지?”
“Yes. 물론입니다. 일단 이 영상부터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딱!
세라프는 말이 끝나자마자 가볍게 손을 퉁겼고, 이윽고 눈앞으로 반투명한 스크린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확실히 세라프와 있으니 편하기는 하다.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만큼,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스크린이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나는 연초를 꺼내며 영상을 유심히 응시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붙이려는 순간,
“응?”
나도 모르게 손이 움츠러들었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신나는 불금은 즐기셨는지요.
어제 하루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부터 다시 열심히 연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