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4
00883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느지막한 오후.
“이제 좀 조용해졌나.”
나는 테라스에서 도시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해는 이미 넘어갔고, 황혼빛 하늘은 검은 물감에 젖어 차차 섞여 퍼지고 있다.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며 어둠이 드리운 도시를 밝힌다.
잠자리에 들기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인데 먼빛의 도시는 번잡하기는커녕 한산하다. 간혹 들리는 소음은 잔잔히 물결치는 파문처럼 금세 사라진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시끄러웠건만, 조금은 진정됐다고 봐야 하나. 천사가 그만큼 설득을 잘해냈다는 방증이겠지.
하지만 단지 가라앉았을 뿐, 평온한 분위기라고 볼 수는 없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서서히 희미해지던 소음이 뚝 멎을 때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사방의 적막함이 한없이 스산하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흡사 공기마저 숨을 죽이고 있는 기분. 하지만 낯설지 않다. 몇 번이고 겪어본 만큼 오히려 익숙한 기운이다. 그래, 도시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돌이켜보면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출발 일자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나마 저녁 식사 때 간소한 축제를 한 게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천사 덕분에 빠르게 준비할 수는 있었으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내부 인선을 발표할 때 사소한 문제가 생기기는 했다. 제갈 해솔과 차희영은 참가 조건을 불만족하지만, 선도 클랜 권한으로 편성시킬 수 있었다. 일종의 융통성이라고 해야 하나.
정작 걸린 건 마르였다. 거주민은 따로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실력은 둘째치고서 라도, 전쟁은커녕 원정 경험도 없는 애를 데리고 가는 건 어폐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본인이 워낙 강하게 참가 의사를 밝혔고, 니뮤에도 따라가겠다고 나선 탓에 결국에는 허락해주고 말았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으나 마르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사실 내심 기대하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고. 실제로 어떨지 모르지만, 두 요정의 참가는 뜻밖의 수확이었으니까.
아무튼, 완벽한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준비한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내일 모여 출발하는 것뿐.
클랜원들은 뭘 하고 있으려나. 생각이 있다면 일찍 휴식에 들어갔거나, 싱숭생숭하면 장비를 손질하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가슴은 묘하게 고요하다. 막상 최후의 전쟁을 앞두니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다. 그토록 기다려왔을 텐데 어째서일까.
아직 자기에는 이른 시간. 이렇게 멍하니 서 있는 것도 그러니 형을 찾아갈까, 세라프를 찾아갈까, 일 층으로 내려가 볼까, 아니면 방어전 준비는 잘 돼 가느냐고 이효을한테 연락해볼까.
여러 생각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친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털고 연초를 한 대 꺼냈다.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괜히 방해할 필요는 없잖은가.
그러니 오늘만큼은 혼자서 전운을 즐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리라.
*
조용한 새벽이 지나고 마침내 진군의 날이 밝았다.
흰 구름이 넘실넘실 흐르는 맑고 청명한 아침이었다. 그러나 성은 출발 준비로 몹시 소란스러웠다. 어젯밤 손질한 장비를 걸치고 내려오니 클랜원들은 이미 전원 정원에 모여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정하연이 서너 명을 앞에 세워두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너희 멋대로 하면 어떡하니?”
야단맞는 서너 명은 안현, 안솔, 진수현, 이유정이었다. 또 뭔 사고를 쳤는지 하나같이 고개 숙인 채 우물거리고 있다.
“무슨 일입니까?”
“어머. 수현?”
정하연이 깜짝 놀라 나를 돌아봤다. 좀 전까지 뾰족하던 음성이 단번에 가라앉는다.
“후유.”
정하연은 네 명을 찌릿 흘기며 한숨을 내쉬었고,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이거 때문이에요.”
손에는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는 작고 예쁜 가방이 들려 있다. 아기 카오스 미믹이다.
“수현도 알다시피 카오스 미믹의 저장 공간은 굉장히 방대하잖아요?”
“예. 그런데요?”
“그래서 야영 장비를 깔끔하게 정리해 넣어놨는데 자기들 멋대로 빼고 뭘 집어넣었다네요.”
“그럼 야영 장비는요?”
“다른 배낭에 넣은 건 확인했어요. 그런데 왜 짐을 늘리느냐 이거죠. 이거 하나면 될 걸 세 개나 더 메고 가야 하잖아요.”
“…정말이야?”
눈을 돌리니 넷도 동시에 눈을 돌렸다. 사실이군. 내려오는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 일렀는데 이것 때문에 지지부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집결 상황은 어떻습니까?”
“방금 연락 왔어요~. 이스탄텔 로우는 이미 다나에 도착했다고 하고, 해밀은 잠시 헤일로에 들렀다 오겠다네요. 나머지도 워프 게이트로 가는 중인 것 같고요.”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어디선가 고연주의 나른한 음성이 회답해온다.
일 차 집결 지역은 구 북 대륙 소 도시 다나. 동남 방향에 자리 잡은 도시니 동 대륙으로 가는데 최적의 출발 지점이다.
여하튼 한소영의 신속함에 혀를 내둘렀으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까딱 잘못해 늦으면 그게 뭔 망신인가. 짐 정리는 나중에 시간 날 때 할 수 있으니 일단 바로 가는 게 좋겠다.
“너희 넷.”
조용히 입을 열자 넷은 흠칫 몸을 떨었다. 공포에 질린 네 쌍의 눈동자가 마지못해 나를 쳐다본다. 정하연을 팔짱을 끼기는 했으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너희 멋대로 한 거니까 배낭도 너희가 들어야겠지?”
그 순간 네 명은 안색이 확 밝아졌다.
“네!”
“당연하죠!”
이어서 터지는 우렁찬 외침. 이 정도로 하는 게 낫겠지. 이미 한 차례 크게 혼나기도 했거니와 출발도 안 했는데 괜히 사기 꺾을 필요도 없으니.
턱을 까닥 젖히니 넷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하나씩 배낭을 잡는다. 문제의 아기 카오스 미믹은 안솔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헤헤. 어서 적이랑 만났으면 좋겠다.”
혼잣말이기는 했으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는 안솔이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솔은 이미 몸을 돌려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결국에는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뭘 준비했길래 저러는 걸까.
…뭐, 가면서 물어보자. 우선 늦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정문으로 모이세요. 바로 가야 할 것 같네요.”
기실 이번에는 공략이나 원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임무 메시지가 떴다고는 하나 어쨌든 전쟁하러 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건 클랜원들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원정을 떠나는 것처럼 하나같이 밝은 얼굴로 준비하며 움직인다. 일부러인지는 몰라도 왜인지 고마운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행동했다.
언제 나와 같이.
이윽고 출발하기 직전 누군가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사용자 조승우?”
“클랜 로드.”
조승우는 약간 어눌하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눈동자는 조용히 떨리고, 입은 달싹거리기를 반복한다. 편성 인원은 아니지만, 애초 비전투 사용자로 가입했으니 별로 어색해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물끄러미 응시하자, 돌연 숨을 힘껏 들이켜더니 멋쩍게 웃는다.
“클랜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예.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아, 그리고!”
“……?”
몸을 돌리려는 찰나 황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는다.
“이번에는 안심하고 다시 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번에는?”
“저번에는 한 번 사망하신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이번 임무는 깔끔하게 돌아오시라는 말입니다. 하하.”
“아, 예. 그러죠.”
뭔 말을 하려는가 궁금했는데 그냥 싱겁게 웃으며 끄덕였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인사는 어제 축제 때 나눈 걸로 충분하니까.
나는 활짝 개방된 정문을 보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남는 클랜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바로 정문을 통과했다. 거의 강행군과 비슷한 속도로 걸어서인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웅성웅성.
남 도시 워프 게이트에는 이미 여러 사용자가 모여 구름 같은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만 빼곡히 차 있을 뿐, 정작 워프 게이트로 가는 길은 탁 트여 있다. 서 대륙 방어전으로 바쁠 텐데 잠깐 짬을 내 구경하러 온 듯싶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물론, 응원도 간간이 들렸으나 나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가로질렀다. 거침없이 회색 계단을 올라 푸른빛 포탈을 앞두고 멈춰 섰다. 그때였다.
“!”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 곧바로 몸을 돌렸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불현듯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클랜원들만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
“분명….”
이상하다. 왜 갑자기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걸까? 무언가 중요한 걸 하나 잊은 것 같은 기분이….
“수현? 왜 그래요?”
바로 뒤에 있던 고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수현?”
나는 한 번 더 사방을 꼼꼼히 확인한 후 턱을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걱정스레 말한 고연주는 문득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왜인지 눈에 밟힌다. 자세히 보니 몇 달 전이었나? 밤의 거리에 갔을 때 내가 선물한 목걸이였다.
그런데 왜 가져 온 거지? 굳이 거추장스러운 걸 달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고, 전투와 관련된 효능은 아예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잠시 요요한 빛을 반사하는 블랙 다이아몬드를 보다가, 도로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빛이 물결치는 포탈로 천천히 몸을 묻었다.
잠시 후, 시야는 흰빛으로 한가득히 칠해졌다.
============================ 작품 후기 ============================
어제 코멘트 읽다가 간만에 빵 터졌네요.
저번 회 이유정의 행동은 애인이 자신의 카드를 멋대로 긁은 것과 다름없다.
개인적으로 멋진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
그런데 왠지 몇몇 분은 경험담 같은 느낌이 나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는…. ;ㅅ;
PS. 그분에게. 하루 늦어서 죄송합니다. 생일 진심으로 축하 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