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5
00884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고 어둑한 밤이 내려앉았다. 차츰차츰 깔리는 땅거미나 조금씩 차가워지는 공기는, 이제 곧 새벽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두두두, 우두두두!
땅이 흔들린다. 흡사 지축이 울부짖고 있는, 지진의 진원을 달리는 것 같은 기분. 그러나 가슴은 묘하게 고요하다. 지면을 흔드는 수천의 진동음도, 곳곳에 튀기듯 흐르는 흙 연기도, 이상하리만치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감각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듯한 이상 현상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뺨을 스치는 찬바람. 그리고 빠른 되감기를 누른 듯이 시야를 지나치는 주변 풍경뿐.
그래, 그저 드넓은 초원을 달릴 뿐이다. 온종일 달린 탓에 심신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발이 땅을 박찰 때마다 몸은 깃털처럼 날아오르는 것 같다. 이대로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주파해버리고 싶을 만큼 가벼운 느낌이다.
이에 응하기라도 하듯이, 등 뒤로 뜨거운 공기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섞여 전해진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얼마나 나를 필사적으로 쫓아오는지 알 수 있다. 간혹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나는 일절 무시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렇게 몇 날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린 결과, 성과는 꽤 혁혁히 거뒀다고 볼 수 있겠다.
원래 두 대륙을 횡단하려면 두 달, 즉 팔 주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 이 주라는 시간 동안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행군했고, 현재 사 주는 족히 걸려야 도착할 지점을 돌파했다. 결과적으로 시간을 절반이나 줄인 셈이다.
아니, 어쩌면 중간 지점도 이미 넘었을지 모르겠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은 남았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망연한 와중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자, 반짝이는 별 무리가 시야를 가득히 수놓는다. 밤하늘에 홀로 떠오른 반달은 은은한 월광을 드리우기 시작하고, 차디찬 바람이 또 한 번 귓가를 스쳤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바람 소리에 무심코 의식이 멀어질 것 같다가, 황급히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느려지는 속도를 인지한 건 추가로 사오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후였다. 기실 오늘 새벽 내내 달려 초원을 벗어나고 싶었으나,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바로 뒤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어느 사이 상당히 떨어졌다. 그것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먼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자, 곧 헐떡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용자는 정하연을 안은 채 얼굴이 퍼렇게 질린 고연주였다. 이윽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클랜원들도 속속히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갈 해솔을 안은 차소림은 언제나처럼 근엄한 표정이었지만, 얼굴빛은 핏기가 싹 가신 상태였다.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문 자국도 눈에 밟혔다.
비척비척 걸어온 안현은 업고 있던 안솔을 내팽개치듯 떨어트렸고, 동시에 자신도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혀, 형….”
“응?”
“왜, 마지막에, 전력, 질주를….”
“아, 나도 모르게…. 미안.”
안현은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대로 머리를 떨궜다. 비단 안현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허리를 꺾은 채 기침하거나 숫제 발라당 드러눕는 이까지 있었다.
마법사와 사제의 상태는 그나마 나았다. 애초 신체 능력치가 낮은 클래스니 강행군을 따라오지 못할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업고 오던지 안고 오던지, 낙오할 것 같으면 신체 능력이 좋은 사용자가 도우라고 일러뒀다. 아마 그만큼 근접 계열의 부담은 가중됐겠지.
흘끗 먼빛을 바라보자, 이미 대열 자체가 흐트러지다 못해 몹시 어지러워져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준 후, 혀를 쭉 내민 채 침을 뚝뚝 흘리는 하승윤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하승우에게 다가갔다.
“하승우.”
“응? 아아, 불사신인가.”
“?”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잖아. 얘가 달리는 내내 얼마나 네 욕을 하던, 커헉!”
하승우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헐떡이던 하승윤이 돌연 주먹을 꽉 쥐더니 하승우의 명치를 정확히 때렸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풀밭을 뒹구는 하승우에게서 몸을 돌린 후, 나는 미안한 눈으로 안현을 바라보고 있는 안솔을 불렀다.
“안솔.”
“네? 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 거야. 그리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행군할 거고. 준비해.”
“아, 알겠어요.”
행군 종료를 알리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터진다. 안솔은 떨떠름히 끄덕였다. 그래도 일단 쉰다는 사실에 안심한 듯 눈을 반짝이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곳곳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근접 계열은 여전히 드러누워 있고, 그 외의 클래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궁수는 최소한의 방비를 위한 울타리를 만들고, 마법사는 모닥불을 지피거나 천막을 친다. 사제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회복 주문을 외우고 저녁을 준비한다.
그렇게 진지가 완성돼가는 걸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즈음.
“저, 수현아.”
문득 상냥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옆을 돌아본 순간, 웬 커다란 무덤 두 개가 물결치며 다가와 나도 모르게 기함…. 아, 임한나였구나. 나는 살짝 휘늘어진 거유를 보며 인사했다.
“오, 안녕.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어, 어디 보고 말하는 거야.”
임한나는 팔짱 끼듯 가슴을 가리더니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러나 곧 표정을 고치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 내일도 이 속도로 행군할 거니?”
“…아마도?”
“오늘 달리면서 보니까 대부분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것 같아. 이러다 남 대륙보다 먼저 도착하겠다는 우스갯소리도 꽤 나오고 있고….”
“…….”
임한나는 조심스레 말을 흐렸으나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나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불만을 가질 법도 했다. 천사를 제외하고, 이번 일의 전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건 나뿐이다. 그러니 출정식 등을 모조리 생략하고 무조건 행군하고 행군하는, 주야장천 죽어라 달리기만 하는 나를 이해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그러나 사탄 덕분에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면, 중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나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때는 항상 그랬으니까.
일 회차 시절 ‘에이~. 설마 그러겠어?’ 라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일을 진행하면, 사탄은 어김없이 그 허점을 파고들어 왔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당해보니 저절로 몸에 체득되더라.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최악의 상황을 전제했다. ‘남 대륙은 우리보다 먼저 동 대륙에 도착한다.’ 는 가정을. 조금이라도 안일에 빠지는 즉시 사탄은 그만큼의 기회를 얻게 된다. 홀 플레인으로 직접 나오는 강수까지 뒀는데 뭘 못하겠나.
애초 구원군을 최고 정예로, 그리고 오천 명 내외로 편성한 것도 행군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잘 따라오고 있잖은가. 비록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서도.
아무튼, 당장 힘들다고 속도를 줄여버리면 왜인지 사탄이 이 허점을 찔러올 것만 같았다. 이게 바로 내가 도 넘은 강행군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뭘 원하는지 알겠는데, 아직은 더 달려야 해.”
“그럼 도착하기도 전에 지칠지도….”
“물론 체력 안배는 염두에 둘 거야. 단, 도착 직전에.”
“…그래?”
“그래. 그나저나 북 대륙 상황은 좀 어때?”
“…….”
갑작스레 화제를 돌린 이유는 더는 토 달지 말라는 의미였다. 뜻을 알아들었는지 임한나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연락 왔더라. 여전히 똑같아.”
“똑같다고?”
“응.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다가가면 후퇴하고, 가만히 있으면 살금살금 전진해오고. 이 상황의 반복이라는데?”
“전진, 후퇴….”
역시 그랬나. 임한나는 어깨를 으쓱 들먹였으나 나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서 대륙은 현재 미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원래는 저번처럼 기습으로 뮬을 점령하고 수성하려 했겠지만, 천사가 미리 알아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그 대신,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주의를 끌려는 거겠지.
부디 구원군이 이미 출발한 지 한참 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때 마침 식사가 준비됐다는 소리가 들려와, 나와 임한나는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사제들은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근접 계열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뜨거운 스튜를 듬뿍 덜어주었다.
잠시 후, 배부르게 먹은 근접 계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원 천막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떤 지옥 행군이 펼쳐질까 토론하다가, 소리 죽여 흐느끼며 잠들었다.
마법사와 사제는 뒷정리를 끝내고 곳곳에서 사 교대로 불침번을 선다. 행군 때 근접 계열 사용자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는 만큼, 누구도 궂은일을 도맡는 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근접 계열에 속하지만, 다나에서 출발한 이후 불침번만큼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이는 나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괴물 무리의 야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주변에 적당히 앉은 후, 연초와 지도를 동시에 꺼냈다. 사실 동 대륙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아는 건 아니다. 가끔 방향을 가늠할 때 꺼내보기는 하지만, 사실 이 지도도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못하다. 워낙 교류가 없었으니 정확할 턱이 있나.
뭐, 그래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점과 점 사이의 최단거리가 직선임을 생각해보면, 어쨌든 방향만 잘 잡으면 되니까. 적어도 여기까지는 제대로 온 것 같으니, 다음에 나올 지역을 알아둘 필요는 있겠다.
“어디 보자.”
일단 이 장소를 동 대륙과 북 대륙 사이 걸친 교집합 지점이라 치고. 그럼 초원을 벗어나는 즉시 동 대륙 지역으로 접어들게 된다는….
사박사박. 사박사박.
그때였다. 한창 지도를 짚으며 길을 잡고 있는 동안, 불현듯 기척 하나가 천천히 가까워져 오는 걸 느꼈다. 또 행군 속도 좀 줄이자고 말하러 오는 거라면 별로 달갑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눈을 돌려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그 순간 마른 검불을 밟는 소리가 뚝 멎었다. 바라보는 방향서 흐릿한 그림자가 주춤거린다.
그러나 곧 조심조심 걸어오더니 모닥불이 밝혀주는 공간으로 성큼 들어섰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건강히 살 오른 허벅지를 터질 듯이 감싼 반투명한 검정 밴드 스타킹이었다.
꿀꺽. 어디까지나 생리적인 현상으로 고인 침을 삼키며 점점 시선을 올린다.
이윽고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온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어.”
나는 예상이 철저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어제 공지(코멘트) 없이 휴재한 불초 로유진입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_(__)_
다름이 아니고 개인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가정사와 관련된 사정인데, 몸이 아픈 건 아니고, 경조사도 아닙니다.
에…. 사실 말씀드리기 좀 창피한데….
사실 집에서 쫓겨날 뻔했습니다. ㅋㅋㅋㅋ;
실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가족 약속이 있었거든요. 말 자체는 토요일에 나왔고, 저는 그때 참석하겠다고 했고요.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이나 전부 직장을 다니시다 보니 평소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는데, 간만에 서로 시간이 맞아 아버지께서 기대를 좀 하신 것 같아요.
한데 그날 제가 밤샘 집필을 끝내고 너무 졸려서 아침에 잠들었거든요. 한 9시쯤? 그러니 11시에는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했지요. 아버지께서 저를 억지로 깨우시기는 했는데, 저도 모르게 좀 심하게 짜증을 부렸네요. 못 갈 거 같으니 나 빼고 가시라고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무섭게 폭발하셔서….
다행히 어머니와 형이 감싸줘서 살아남았지만(?), 사실 그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심하게 말씀하시는지.
그 따위로 살 거면 글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워라.
네 멋대로 하려면 나가 살아라.
이 두 마디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네요.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다가 저도 순간 울컥해서 네, 나가 살게요 라고 한 마디 대꾸했는데 컴퓨터 부서질 뻔…. ;;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어보니 평소 제 생활을 상당히 탐탁지 않아하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몇 번 지나가는 말로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참고 참으시다가 이번에 터지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라고 늦게까지 쓰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왜 이해를 못해주시는지. 쩝. 오늘 퇴근하실 때 인사는커녕 아는 척도 안 했는데 그게 또 마음에 걸리네요.
좀 슬프기는 한데, 뭐,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휴휴휴휴.
아. 그리고 이것과는 별개로 평소 제 태도에 관해 독자 분들의 비판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저를 감싸주실 필요는 없어요.
단, 그래도 적정선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모니터, 폰 액정 뒤에 사람 있잖아요. 서로 얼굴 맞대고 이 새끼야, 이 쓰레기야 이렇게 말하면 듣는 상대가 얼마나 상처 입겠나요. 그러니 말씀은 하시되 비꼼, 욕설, 인신공격 등을 포함한 비난은 지양해주세요.
이번에는 저도 잘못한 게 있고, 가끔 보고 정신 차릴 용도로 코멘트는 남겨두겠습니다. 그러나 차후 도를 넘은 코멘트가 보일 경우, 삭제 + 블랙리스트로 등록하겠으니, 코멘트 작성시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기를 바라요.
벌써 오전 5시 26분이네요.
독자 분들 모두 활기찬 화요일 맞이하시길.
로유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