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8
00887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도시가 있습니다!”
단, 두 마디에 불과한 외침이었다.
“예?”
“에에에엑?”
그러나 선유운이 가져온 소식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마 긴 휴식 시간을 이용해 정찰 겸 먼 곳까지 돌아본 것 같은데….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하기는 했으나, 왜인지 황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그냥 운이 좋은 거라고 봐야 하나?
잠깐만. 도시가 근방에 있는데 왜 동 대륙 사용자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거지?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으나 애써 털어냈다. 도시 안에 꽁꽁 틀어박혀 있을 수도 있으니. 우선 서둘러 가보는 게 좋겠다.
생각을 마쳤을 때, 클랜원, 아니 전 병력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어서는 중이었다. 이미 상황을 전달한 걸까. 한 명 한 명이 베테랑이라 그런지 확실히 상황 파악이 빠르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더니 다 죽어가던 눈빛이 예리하게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나는 행군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출발을 알렸다. 그리고 선유운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적당한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약 이십 분 동안은 하늘과 마른 땅의 끝이 맞닿는 경계선만이 보일 뿐이었다. 뭉툭한 돌덩이들만이 간간이 밟힐 뿐, 이 거대한 황야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좀 더 걸어가자, 불현듯 먼빛으로 한 줌 티끌만 한 것이 조금씩 시야에 걸리기 시작했다. 꾸준히 걸을수록 점차 크기가 커지는 그것은 선유운의 말대로 도시였다. 이 버려둔 거친 들판에 정말로 도시가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눈앞 전경이 한층 선명하게 잡혔다. 도시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다. 성벽은 보수 공사도 안 한 듯 몹시 낡았고, 곳곳에 모래바람이 묻어 흘러내리고 있다. 색깔도 누리끼리한 것이 과장 조금 보태 모래성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이야, 이건 뮬보다 심하잖아.”
안현은 한탄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김한별은 가볍게 기침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콜록, 콜록. 아마 갓 개척한 도시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긴장이라는 놈은 서서히 고개를 치키건만, 저 도시는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 걸까. 맞이하러 나오는 사용자는커녕, 오히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오죽하면 이 넓은 황야서 저곳만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클랜 로드. 하늘입니다.”
이윽고 일백 미터 안쪽까지 좁혔을 즈음, 선유운의 음성이 나를 일깨웠다. 살며시 턱을 젖히자,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정체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형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영물, 쪼롱이였다.
쪼롱이는 내가 보자마자 날갯짓을 멈췄다가, 서서히 기동을 재개했다. 첫 번째는 왼쪽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비행하더니, 두 번째는 오른쪽으로 올라가 왼쪽 아래로 엇갈리듯이 내려왔다. 그러자 흘러나온 금빛 잔상이 하늘에 X자를 수놓고 있었다.
“엑스?”
“도시에 아무도 없다, 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보입니다.”
차소림이 담담히 말했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확인한 이상 더 거리낄 건 없다. 우리는 도시를 향해 신속히 걸음을 놀렸고, 거침없이 성문으로 들어섰다. 가루가 툭툭 떨어지는 터널과도 같은 입구를 지나자, 비로소 도시 내부의 풍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아….”
마침내 도시로 들어가는 와중 누군가 조심스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솔의 목소리였다. 때에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는다. 왜냐면 도시에는 정말로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도시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성벽은 몹시 낡았지만, 타격 입은 흔적 같은 건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내부도 마찬가지. 생쥐 한 마리 돌아다니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으나, 당장 눈에 보이는 구조물 중 반파된 것조차 찾기 힘들다.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온전히 서 있다.
“누구 없습니까!”
있는 힘껏 소리 질렀으나 왕왕 메아리만 칠뿐, 회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자 설마 했던 예상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잠시 후.
“수현. 리버스 클랜이 통신을 요청했어요.”
“클랜 로드. 마법의 탑 클랜에서….”
비단 나만 이상함을 느낀 게 아닌지 여러 클랜에서 통신이 쇄도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졌다.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
오천오백 명, 총 열 클랜으로 이루어진 구원군은 선봉, 중군, 후군 이렇게 세 개 군(軍)으로 구성돼 있다.
도시로 입성한 후, 나는 간단히 상황 설명을 끝내고 새로운 오더를 내렸다. 혹시 모르니 후군은 외부를 경계하고, 선봉과 중군은 도시 내부를 조사하라 지시한 것이다.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워프 게이트를 찾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찾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나마 알아낼 수 있었던 건 고작 두 가지. 우선 워프 게이트 자체는 건재하다. 그러나 발동에 반드시 필요한 메모리아 스톤이 사라졌다. 아무리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시도해본 건 북 대륙과의 통신이었다. 천사와 연결된다면 상황을 알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연결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근거리에 있는 클랜과는 영상이 정상으로 송출됐다. 그런데 북 대륙과 연결하려고 할 시 잡신호가 굉장히 심하게 일었다. 무언가에 방해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쯤 되자 머릿속이 몹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워프 게이트 하나만 믿고 몇 날 며칠을 달렸는데, 기껏 도착해보니 도시는 텅 비었고 워프 게이트는 작동하지 않는다. 도시 조사에 일말의 기대는 걸고 있지만, 고연주조차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후우우우.”
아니, 생각 좀 차분히 정리해보자. 우선 현재 정확한 사실은 우리가 도착한 곳이 동 대륙 기준으로 북서 방향에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 대륙과 악마의 행방. 역시 동 대륙 기준으로, 나는 가장 가까운 남서 도시를 첫 타깃으로 삼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딱 하나, 상정할 수 있는 그나마 가능성 높은 상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건 가장 생각하기 싫은 경우의 수였다.
바로 동 대륙이 이미 점령당했다는 것.
물론 북서와 남서 도시의 거리는 멀지만, 사실상 대륙 내 도시 간의 거리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고? 워프 게이트가 있으니까.
전쟁 속에서 워프 게이트는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다. 예전 서 대륙 부랑자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만 봐도 알 수 있다. 북 대륙은 최우선으로 워프 게이트를 확보한 후, 아예 끊어버리지 않았는가.
설마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만에 하나 동 대륙이 워프 게이트를 통제하지 못했다면….
“수현.”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었을 즈음 문득 고연주의 음성이 들렸다. 이내 손을 내리고 바라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연주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 있다. 무언가 알아낸 게 있다면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 텐데.
“어떻습니까?”
“…미안해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나. 탓할 생각은 없다. 고연주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자책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끝없는 늪지대로 침잠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억지로 표정을 가라앉혔다. 총지휘관의 자리에 있는 만큼 흔들리는 모습은 금물이다.
기실 이것 말고도 사방이 이해가 안 가는 일 투성이였다. 사용자는 보이지 않고, 흔적도 없으며, 장거리 통신이 방해받고, 메모리아 스톤이 사라졌다.
일련의 사정이 얽히고설켜 있지만, 분명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사정이.
그래, 일단은 조사를 끝내자. 나오는 정보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중간중간 북 대륙과 통신을 시도하며 최대한 빠르게 다른 도시로 떠나는 수밖에.
“그림자 여왕님도…. 흠. 그럼 이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건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돌연 낮은 음성이 귀를 찔렀다. 흘끗 눈을 돌리니 허준영이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고 있다.
“응. 그러네.”
그러자 인근에 있던 이유정도 심각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방법? 뭐지?
살금살금 걷던 이유정이 멈춘 곳에는 다름 아닌 안솔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뒤돌아선 채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유정은 안솔의 뒤에 서서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안솔. 잘 들어.”
“……?”
“이제 믿을 건 너밖에 없어. 그러니 네가 뭐라도 좀 해봐.”
“…….”
“자, 한 번 보여주는 거야! 가라, 안솔츄!”
“…하아.”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는가 기대했는데, 참 놀고 있다. 이제는 숫제 어이없는 걸 넘어서 화까지 날 지경이었다.
“너희는 지금.”
그때였다. ‘이 상황에서 장난할 생각이 드는 거냐?’ 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닫고 말았다. 왜냐면 이유정의 말이 끝나는 걸 기점으로,
“안솔안솔….”
안솔이 정말로 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 응?”
심지어 이유정도 정말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엉거주춤 팔을 뻗는다.
“안, 읍!”
“닥쳐.”
그러한 찰나, 허준영은 번개처럼 달려와 이유정의 입을 틀어막는다.
“읍, 으읍!”
“조용히 하라고. 진짜로 작두 탄 거 같으니까.”
허준영은 조용히 속삭이며 턱짓하자, 흘끗 눈을 흘긴 이유정은 발광을 멈추고 서서히 얌전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안솔은 아까부터 한 곳만을 바라보며 홀연히 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한데,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김수현.”
허준영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나를 돌아봤다. 나도 바로 머리를 끄덕여 화답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내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게다가 행운 능력치 105포인트의 감이라면 한 번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방이 조사로 분주한 가운데, 우리는 총총히 멀어지는 안솔의 뒤를 쫓았다.
============================ 작품 후기 ============================
후, 세이프으으으! 진짜 간신히 세이프했네요. 11시 58분에 집필을 마쳤습니다.
오늘 집필 내내 진심으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후회를 수십 번도 넘게 한 것 같아요. 내가 왜 그런 코멘트를 남겼을까, 내가 왜 코멘트에 그런 약속을 했을까 등등.
독자 분들은 오늘 제가 어떤 심정으로 글을 적었는지 정말 모르실 겁니다. 진짜 시계만 한 일백 번은 넘게 본 것 같아요 ㅋㅋㅋㅋ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그러는데, 아후. 다시는 못할 짓 같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자정에 업데이트하니 기분은 정말 좋네요. 😀 자, 칭찬해주시고 싶으시면 오랜만에 머리나 한 번 쓰담쓰담해주시지요.(거만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