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9
00888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말이 있다. 이 라틴어는 ‘신의 기계적 출현’을 뜻하는데,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건을 신의 힘을 빌려 기적적으로 해결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거듭 인지하지만 안솔의 행운 능력치는 105포인트다. 어느 능력치든 101포인트만 찍어도 인간을 초월했다고 볼 수 있는데, 105포인트는 어느 정도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런 만큼 이번에도 마음속으로 막연히 기대하는 게 없잖아 있었다. 통과의례서부터 보여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지 않을까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꼬이다 못해 비틀린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장소로 안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안솔의 걸음이 처음 멈춘 곳은 장소가 아닌 사람이었다. 느릿하게 집게손가락을 뻗더니 느닷없이 상대의 옆구리를 꼬옥 찔렀다.
“으, 응?”
그러자 한창 조사에 열중하고 있던 차희영이 깜짝 놀라며 돌아본다.
“왜?”
당연한 질문이었으나 안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채로 물끄럼말끄럼 쳐다보기만 할 뿐. 눈을 깜빡깜빡하던 차희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얘 갑자기 왜 이래요?
순간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언제 따라왔는지, 제갈 해솔이 “쉿.” 신호를 보내더니 돌연 조용히 캉캉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 춤이 뭘 의미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차희영은 사정없이 아미를 찡그렸지만, 어쨌든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안솔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우리도 침묵하며 뒤를 쫓았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장소라 부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계단 너머에는 잿빛으로 된 돔형 구조물 하나가 서 있었다.
곳곳에 금이 가 있는 게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나름대로 규모는 있는 것이 아마 신전인 듯싶다.
신전도 주요 건물 중 하나인 만큼, 계단을 올라가자 한창 조사 중인 사용자가 여럿 보였다. 그중 한 명이 우리를 돌아보더니 아는 체를 해왔다.
“아, 수?”
그 순간 형은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안솔이 막 손을 들던 형의 앞을 그대로 지나쳤기 때문이다.
형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안솔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갑자기 은근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무언가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역시 눈치가 빠르다.
조용히 눈짓하니 형이 스리슬쩍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우리는 앞서 들어간 안솔을 황급히 쫓아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풍경은 딱히 별다른 것 없이 평범했다. 단지 빛이 드는 곳이 적고, 라이트 스톤도 작동하지 않아 조금 어두운 편이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밖에서 봤을 때보다 안이 꽤 깊었는데, 불현듯 멀리서 커다란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석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안솔은 그 주변에 멈춰서 있었다.
석상의 높이는 약 오륙 미터는 넘을 만큼 큼직했다. 근육이 두드러지는 몸과 날렵해 보이는 네 개의 다리, 그리고 갈기까지 있는 것이 한 눈에 봐도 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아무튼, 석상은 석상이고. 바로 제 3의 눈으로 석상을 바라봤으나 딱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그냥 보통 장식물이라는 건데, 안솔은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혹시 장치가 있는 건 아닐까? 가령 발톱을 누르면 무언가 나타난다든지.”
“어쩌면 비밀 통로와 이어져 있을 수도 있겠네요.”
클랜원들은 각자 의견을 내놓으면 석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금 확인했다시피 장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 차희영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괜히 데려왔을 리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안솔을 쳐다보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만히 보니 안솔은 석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음에도 미동도 보이지 않은 채 석상 왼쪽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심원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스산한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응?”
마침 주변을 돌아보던 차희영이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안솔이 바라보는 곳을 굽어보더니 숫제 무릎까지 꿇으며 가까이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석상서 떨어진 것 같은 아주 작은 깨진 돌덩이가 일여덟 개 흐트러져 있었다.
그때 차희영이 갑자기 “후우우우!” 힘차게 입바람을 불었고,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하나 신기한 건, 돌덩이들이 세찬 입바람에도 일 밀리미터도 쓸려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시 표식이었네.”
“표식?”
“네? 아, 네. 이거는 무녀가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고유 언어라고 보시면 돼요. 한 마디로 무언가 나타내거나 알려주는 일종의 방식…? 아무튼 그런데, 저도 무희다 보니 무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공부했거든요. 그래서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뜻인데?”
바로 물었으나, 차희영은 우물쭈물하더니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에, 표식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런데?”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이 표식이 뭘 뜻하는지 알아야 뭐라도 좀 할 수 있는데,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아! 아마 한나 언니라면 아실지도 몰라요.”
“임한나가?”
그러고 보니 임한나도 고대 무녀의 진전을 이어받은 클래스였던가?
임한나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신전에 도착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허준영이 신속히 찾아 데려온 것이다.
차희영의 말대로, 임한나는 표식을 보자마자 대번에 알아차렸다.
“어머. 이건 초혼 표식이잖아.”
“초혼 표식?”
“응. 내가 이용하는 힘 중에 강신이라는 게 있거든?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좋아.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니?”
“아~. 초혼이었구나.”
조용히 듣고 있던 차희영이 혼잣말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풍성한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푸른빛이 흐르는 부채를 꺼내 들었다.
임한나는 상냥히 웃으며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한 번 봐봐. 초혼은 일종의 주술이라 볼 수 있어서…. 아마 신을 기원하는 나보다 희영이가 더 나을 거야.”
사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냥 끄덕이고 말았다. 어쨌든 중요한 일은 따로 있으니까.
“────. ────.”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 주문을 빠른 속도로 웅얼거리던 차희영이 문득 쫘르륵! 소리 날 정도로 부채를 세게 펼쳤다. 부채 든 손은 그림 그리듯 우아한 동선을 그리다가, 돌연 표식을 가리키며 뚝 멈췄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돌 조각 하나하나가 멀건 빛을 뿜기 시작하더니, 곧 시퍼런 빛을 띤 아지랑이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인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연기는 허공으로 올라오며 뭉쳤고, 점차 하나의 형체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 형상이 인간 같다고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 危ない逃げて!
갑자기 웅혼한 외침이 귀를 찔렀다. 순간 놀라 쳐다보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반투명한 빛을 띠고 있어 약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선이나 가냘픈 몸의 윤곽으로 여인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나 이상한 점은 형체가 온몸을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이다. 흡사 공포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 일본어 좀 하는 사용자 있습니까?”
형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품속에서 구슬 두 개를 꺼냈다.
“꼭 마법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 구슬에 마력을 주입하면 자동으로 번역돼서 들을 수 있거든요.”
그러자 잠시 웅성웅성하더니 진수현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엄청나게 잘 아는 건 아닌데…. 그냥 혼자서 독학한 수준이라서…. 조금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어요.”
“한 명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형은 흔쾌히 끄덕이며 두 개의 구슬을 건넸다. 굉장하네. 마력만 넣으면 자동으로 번역해준다니.
“언제 저런 거 만들었어?”
“내가 발명한 거 아니야.”
형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있어. 사용자 양기덕이라고. 예전 강철 산맥 때 덕을 좀 봤는데, 공략 이후 한 번 더 찾아온 적이 있거든. 그때보다 더 업그레이드했으니 한 번 시험 좀 해달라고 샘플 몇 개 주더라고.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형의 말은 끊임없이 무어라 외치는 여인의 고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진수현이 손으로 넘어간 구슬이 번쩍 빛을 뿜었고, 때마침 여인의 외침과 겹쳐서 울렸다.
– 도망쳐! 민나아아!
“푸!”
찰나의 순간,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바로 조용해졌다. 흘끗 눈을 흘기니 제갈 해솔이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나저나 민나는 무슨 말이지? 아마 번역이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여하튼 진수현도 엄청나게 잘 아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 일단 계속 보기로 했다. 애초 번역 마법은 본인이 아는 만큼 전달 수준이 달라지니 감수하고 보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팥고물!
응? 팥고물?
“킥!”
여인은 또 이상한 말을 뱉는 동시, 폭발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허공을 날아 바닥에 쓰러졌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제갈 해솔은 숫제 허리까지 꺾는 중이었다.
“어이. 너 일본어 알고 있는 거 맞아?”
나만 이상한 게 아닌지 허준영도 핀잔 조로 말했다.
“조, 조금밖에 모른다고 했잖아요….”
진수현은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시뻘게진 얼굴로 조용히 우물거렸다.
그러는 동안 야구공처럼 통통 바운드하던 여인이 간신히 고개 들어 중얼거렸다.
– 진한개…. 진한개 응 있고….
“꺄하하하하하하하!”
이번에도 이상한 말이 들리자, 제갈 해솔이 갑자기 주변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한참을 정신없이 웃더니 시선이 쏠린 걸 알았는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후에, 후에에에…. 이, 이게 번역이 잘못된 건 맞는데요.”
“…….”
“팥고물의 일본말이 앙꼬인데…. 그러니까 이게 아앙이라는 말을 오역하면 앙꼬로, 그래서 우리말인 팥고물로….”
“…….”
조금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팥고물이 아니라 아앙, 즉 신음이라는 건가? 폭발의 여파에 휩쓸렸던 것 같은 상황과 연관 지으면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당최 어떻게 공부했길래 팥고물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
“그럼 진한개는?”
“그것도 오역이에요. 정상으로 번역하면 이 녀석이라는 뜻이죠. 평소 일본어를 어떻게 독학했는지 알 것 같네요. 아, 존나 웃기네.”
제갈 해솔은 한 번 더 까르르 웃더니 살며시 윙크했다. 진수현은 푹 머리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도로 앞에 집중했다. 여인의 형상은 한동안 쓰러진 채로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절망한 표정만 짓고 있다가,
– 아, 안 돼!
느닷없이 외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땅을 박차 어딘가로 뛰어가는가 싶더니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계속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초혼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주변 풍경도 같이 나오면 좋으련만. 여인 혼자서 말하며 움직이니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어딘가로 내뻗은 듯한 팔이 돌아온 찰나,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왜냐면 여인의 손아귀에 좀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조막만 한 것이 잡혀 있었으니까.
메모리아 스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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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업데이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제는 진짜…. 하….
덜덜 떨면서 적다 보니 트라우마가…. ㅜ.ㅠ
계속 정진해서 시간을 앞당겨보겠습니다.
노력하면 자정 연재도, 일일 연재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적어도 에피소드 1 전에는 꼭 처음 연재하던 때처럼 돌아가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