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0
00889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잠깐 웃음이 터지기는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클랜원들도 여인의 손에 쥐어진 메모리아 스톤을 확인한 듯싶다.
정보가 제한된 만큼 나는 형상이 움직이는 걸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여인은 메모리아 스톤을 꼭 안은 채 황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가끔 흠칫 몸을 웅크리거나, 사방을 면밀히 살피며 덜덜거리는 모습은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도시에 문제가 터졌다.
아니. 터졌을 것이다. 현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문제가 무슨 일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여인의 정신 없던 달음박질이 돌연 뚝 멎는다. 목적지에 도착한 걸까.
– なに?
“나니? 뭐야? 라는 뜻이에요. 아마 뭘 본 것 같은데.”
어느새 진수현은 스리슬쩍 물러나 있었고, 그 대신 제갈 해솔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될 거면 진작 나섰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확실히 제갈 해솔의 말대로였다. 여인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털썩 힘없이 주저앉는다. 이어서 공포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なぜ…. どうして….
“나제…. 도우시테…. 왜…. 어째서….”
겹친 두 음성이 공간을 고요히 울렸다. 흡사 믿을 수 없는 걸 본 듯한 반응.
“뭘 봤길래 저러는 거지?”
그때였다. 누군가 중얼거린 순간, 망연히 앉아 있던 여인이 화들짝 고개 돌렸다. 곧장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흡사 무언가에 쫓기듯 도망치는 것처럼.
잠시 후, 여인은 지친 듯이 비틀거리더니 석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리고 좌우를 한 번 둘러보고 메모리아 스톤을 꺼냈다. 그럼 아까 여인이 주저앉았던 곳이 신전 앞 광장이라는 건데. 설마 흔적을 일부러 지웠다는 건가?
생각이 끝나기도 전 애달픈 기합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신전 바닥을 향해 서너 번 주먹질을 했고, 메모리아 스톤을 꺼내 묻는 듯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두드렸다. 그렇게 계속해서 손을 놀리더니, 문득 형상이 투명해지면서 격렬하게 물결치기 시작한다.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빛이 사그라진 후 나는 홀린 기분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혔다. 여인이 최후에 있었던 자리에는 여전히 일여덟 개의 돌덩이가 놓여 있다. 단지 이제는 바닥에 금이 가 있는 것이 눈에 밟혔다.
꽤 급해 보였건만 참 정성스럽게도 붙여놨다. 워낙 낡은 건물이다 보니 지나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살며시 힘을 주니 바닥은 쉽게 갈라졌다. 손을 집어넣자 푹 파인 구덩이로 빨려 들어갔고, 몇 번 휘젓기도 전 딱딱한 돌덩이 같은 것이 걸렸다. 나는 그것을 꽉 쥐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찾았다. 메모리아 스톤.
“이게 끝이에요?”
안현이 뒤늦게 중얼거렸다. 허탈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좀 알겠네. 이 초혼 표식이라는 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였군요.”
머리 회전이 빠른 클랜원 몇 명은 이미 감을 잡은 것 같다. 말 그대로 이 여인이 남긴 메시지는 현 상황에서 천금의 값어치를 하는 정보였다.
이 메시지 덕분에 두 가지 정보를 추가로 얻었다. 우선 설마 설마 했지만, 남 대륙과 악마는 일부나마 워프 게이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리고 동 대륙은 우리가 이 도시로 구원하러 온다는 걸 알고 모종의 행동을 취했다.
“허 참. 믿기 지가 않는데.”
허준영은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긁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어지간한 개 병신 새끼들이 아니고서야 워프 게이트를 점령당할 리가….”
“그만큼 경험이 부족하거나 상대가 압도적이었다는 거겠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래도 똑똑한 사용자가 있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네.”
그렇게 말한 고연주는 입맛을 다시며 나를 쳐다봤다.
“수현.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요.”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고연주는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아직 아리송해 하는 이들이 보였다.
말인즉 처음 침략당한 도시의 워프 게이트가 점거당했다면, 지금쯤 동 대륙 대부분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는 내가 조심스레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 대륙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고연주 말마따나,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사용자가 발 빠르게 후속 조치를 취했다.
도시가 한두 개도 아니고 열세 곳이나 되는 만큼, 가까스로 지킨 최후의 보루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진성 바보가 아닌 이상, 현재 워프 게이트 연결 고리는 모조리 끊어놨을 터. 그럼 우리는 그 도시를 찾으면 된다.
아니.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이 도시의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면 그쪽에서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상대가 연결을 살리는 순간 바로 넘어간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하지만 그쪽에서 어떻게 알 수 있을지….”
“바~보. 워프 게이트가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이라는 사실도 몰라?”
이유정이 핀잔 조로 말하자, 차희영은 그제야 아차 탄성을 질렀다. 이유정이 이해했다면 거의 알아들었다고 봐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새로 상황 전파하겠습니다. 현 시간부로 전 병력 조사를 중지하고 워프 게이트 앞으로 집결합니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이 이 두 마디면 충분했다. 마법사들은 얼른 통신 수정을 꺼내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내 곳곳에서 흐르는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워프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장은 코앞에 있다.
*
김수현의 예상대로, 현재 동 대륙은 대부분 남 대륙과 악마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동 대륙에 다다른 시기는 약 삼 주 전. 북 대륙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하기는 했지만, 연합군은 최대한 빠르게 동 대륙을 점령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첫 공격 때부터 타나토스의 막강한 힘을 앞세워 있는 대로 화력을 퍼부었고, 상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성 내부로 노도와 같이 침략했다.
물론 동 대륙이 네 대륙 중 가장 수준이 떨어지고 경험도 적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동 대륙 지휘관 중 한 명인 아키노는 첫 공격이 깨졌을 때부터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 믿을 수 있는 부하를 시켜 북 대륙이 올 곳으로 예상되는 도시의 워프 게이트를 확보하라 일렀다. 동시에 자신은 워프 게이트로 달려가 사용자들을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초 전부 피신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합군이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물밀 듯 달려오는 통에, 아키노는 간발의 차이로 포탈에 몸을 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 도시로 이동하자마자 바로 연결을 끊어버렸다.
혹자는 잔인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상대가 우르르 밀고 들어왔을 테니까.
연합군은 가장 방어력이 높은 대 도시와의 연결이 끊긴 걸 아쉬워했지만,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악마는 연결된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 무차별적으로 사용자를 잡아들였고, 남 대륙은 일반 도시로 이동, 소 도시를 점령한 날 바로 대 도시로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신속에 가까운 진군이었다.
그런 만큼, 동 대륙 최후의 보루인 대 도시는 현재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아비규환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 온다! 또 온다아아!”
누군가의 절규와 동시에 사방을 환히 밝히는 수천 개의 마법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성벽에 서 있던 마법사와 사제가 악을 쓰며 주문을 외워 방어 마법을 펼쳤으나 무용(無用)한 일이었다.
잠시 후, 하늘을 가득 채워 뒤덮은 수백 수천의 공격 마법이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한꺼번에 하강을 시도한다. 눈 깜짝할 새 성큼 다가오더니, 흰 장막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해일처럼 들이닥쳤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동 대륙 사용자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서로 어울려 난무하는 오색찬란한 빛무리였다.
번쩍!
흡사 핵탄두가 떨어지면 이럴까. 일거에 폭발한 여파는 사용자 개인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귀도 먹었다. 그저 희미하게 들려오는,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굉음에 반사적으로 웅크려 고개를 처박을 뿐.
이윽고 한 가득 머물렀던 빛이 사라졌을 즈음.
“…….”
겨우 몸을 일으킨 아키노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좀 전까지 버텨주던 굳건한 성벽 일부가, 한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루로 흩날리고 있다.
“끄륵, 끄르르륵!”
“흐어어어! 흐아아아!”
그러나 어이없어할 틈도 없었다. 왜냐면 도처에서 끔찍한 비명이 우후죽순으로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폭 범위에 있던 아군 중 간신히 살아남은 일부가 지르는 소리였다. 그나마도 팔다리가 찢어졌거나 몸이 터져나간 이가 대다수라 곧 사망할 것 같았지만.
와아아아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두두!
이어서 들려오는 함성, 그리고 땅이 울리는 소음.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혼란스러웠던 성의 분위기는 차츰차츰 절망과 체념으로 변했다. 성벽이 무너진 이상 침입해 올 것은 명약관화였다.
아키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몹시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으나 아직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여 입가에 묻은 그을음을 닦으며 힘차게 외쳤다.
“사제는 어서 부상병을 치료하세요! 그리고 남은…?”
그러나.
“분들은….”
주변을 돌아보던 아키노는,
“…….”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흐리고 말았다.
아니.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급박한 상황 속 서둘러 성벽을 보수하고 사수해야 했지만….
‘없어….’
남은 사용자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고는 부상에 신음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동료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아키노의 두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우욱….”
입에서 서글픈 침음이 터져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은 전력을 모조리 끌어모으며 죽으라 방어했건만, 개전한 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아 성벽이 깨졌으니.
‘방어할 수 있는 인원이…. 더 없어….’
그러는 동안에도 함성은 빠르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결국에는 아키노도 포기했는지 풀썩 엉덩방아를 찧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복잡하게 휘몰아친다. 그럴수록 지혜롭게 빛나던 두 눈동자는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천천히 흐릿해졌다. 그때였다.
“아키노!”
멀리서 달려온 누군가가, 주저앉은 아키노의 어깨를 잡고 뒤흔들었다.
“왔어, 왔다고! 스페스 도시, 흡!”
무에 그리 급한 걸까?
사내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스페스와의 연결이 활성화됐다고!”
단숨에 토해내며 고함 질렀다.
“스페스…?”
그 순간이었다.
“그래! 북 대륙 원군이 도착했다는 말이다!”
까맣게 죽었던 아키노의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스쳤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시가 함락되기 직전.
마침내 북 대륙이 도착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02시 00분 안에 세이프! 후후.
사실 어제 팥고물이나 진한개는 넣을까 말까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설마 아는 분이 많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아는 분이 꽤 계시더라고요. 하하.
아, 물론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그나저나 내일은 석가탄신일이네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저를 로유미로 놀리는 독자 분은 내일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기거나, 학교에서 정상 수업을 하게 해주시고, 저를 로유진이라 생각해주시는 분은 편히 쉴 수 있는 휴일이 될 수 있도록…. 응?
아, 아닙니다.(ㅌ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