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2
00891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처음에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갑자기 난입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김수현의 태도가 몹시 기이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폭풍이 몰아치던 전장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최소한 광장에 있던 사용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전원 동작을 멈췄다. 단지 등장만 했을 뿐이건만,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당긴 것이다.
물론 워프 게이트로 넘어온 건 김수현만이 아니었다. 검은 보석 목걸이를 건 폭발적인 몸매의 여인, 그리고 얼음처럼 시린 냉기를 풀풀 풍기는 갑옷을 걸친 여인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다. ‘그림자 여왕’ 고연주와 ‘검후’ 남다은.
그 뒤로는 자신의 키만 한 장검을 어깨 옆으로 느긋하게 빗겨 든 장발의 사내와, 천진난만한 얼굴로 빛나는 구체를 붕붕 휘두르는 여인이 나오고 있다. ‘침묵의 집행자’ 허준영과 ‘키메라 소환 술사’ 비비앙이다.
어디 그뿐일까. 은빛을 뿌리는 창과 근엄한 얼굴을 한 ‘아르쿠스 발키리’ 차소림, 입은 꾹 다물었지만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천궁’ 선유운….
“저.”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던 아키노는 김수현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어깨를 건들려던 손은 순간 멈칫,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대가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얼떨떨해하는 아키노를 뒤로한 채, 김수현은 계속 걷고, 걸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용자는 카르페디엠 로드였다. “핫!” 탄식을 뱉더니 성큼성큼 걸어오는 김수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 뭣들 하는 거냐! 적이다! 적이라고! 딱 보면 몰라?”
웅성웅성.
그제야 광장을 에워싸고 있던 포위망 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흡사 앞동산 소풍이라도 나온 듯, 느긋하기 그지없던 김수현의 걸음이 멈춘 것도 그즈음이었다. 남 대륙 사용자들은 서로 한 번씩 쳐다보더니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무기를 꼬나 쥐고 무차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삽시간에 사방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튀어나왔다. 각자 검이나 창을 치켜들고, 하나같이 김수현을 겨냥하며 돌진한다.
“위험!”
아키노는 기함해 소리 질렀으나, 정작 당사자는 담담했다. 아니. 살짝 한숨 쉬더니 가볍게 손을 떨쳤을 뿐. 그때였다.
휘리리릭, 바람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김수현의 허리서 세 자루 검이 날아올랐다. 스스로 칼집을 풀고 비스듬하게 세워지더니, 흡사 호위라도 하듯 원을 그리며 유영하기 시작한다.
한껏 근접한 이들이 모종의 이상함을 느낀 건, 거의 근접해 한꺼번에 무기를 내지르던 순간이었다.
“어, 어?”
“어어어어!”
카앙!
어어 하는 사이, 거친 철성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튀겼다.
달려든 수십 명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치떠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전후좌우로 빈틈없이 쇄도했을 터. 한데 어느 순간 강제로 쭉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칼끝이 모조리 검 세 자루에 막혀버렸다. 마치 누군가 유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
“크윽! 크으으윽!”
“왜, 왜 이래?”
갑자기 막혔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한데 아무리 힘을 주고 용을 써도, 각자가 내뻗은 무기가 거둬지지 않는다. 칼날에 딱 붙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진정으로 기묘한 현상이었다. 무려 서른을 넘는 사용자가 칼자루나 창대를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광경이라니….
그러는 동안, 김수현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귀에 걸린 귀걸이를 빼 손에 쥐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왜냐면 귀걸이는 곧 순백의 칼날을 뽐내는 아름다운 검으로 변했으니까.
김수현은 지체 않고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고, 제자리에 선 채로 조용히 말했다.
“검 빛.”
차르르릉, 차르르릉!
그 순간, 맑은 공명과 함께 빅토리아의 영광이 새하얀 빛을 토해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빛이 터졌을 뿐. 그러나 실상은 일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분사된 빛무리가 포위망 사이로 휩쓸 듯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피피피핏!
사방팔방 치솟은 핏물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허공을 수놓는다.
목, 복부, 겨드랑이, 허벅지 등 사지 곳곳에서 선혈이 뿜어졌다. 심지어 목이 절반 이상 갈라지는 사용자도 있었다. 시야가 이상하게 기울어지자, 사내는 멍하니 목을 짚었다. 그리고 울컥 터져 흐르는 핏물을 느끼고 그제야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흐, 흐아아아!”
“크아아악!”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무려 서른에 달하는 이가 한꺼번에, 그것도 수수깡처럼 썩둑썩둑 잘려 쓰러진다.
“무, 무슨?”
“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카르페디엠 로드도, 아키노도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흩뿌려졌던 핏물이 땅을 점점이 찍어댈 즈음, 김수현은 이미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하늘에서 왕왕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깜짝 놀라 쳐다보자, 빅토리아의 영광이 하얗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검의 모습을 한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어찌나 기운이 강렬한지 주변 공간까지 불사르며 이지러지게 하자,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듯 남 대륙 사용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지만.
김수현은 차분히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옆쪽을 흘끗 흘겨본 뒤 있는 힘껏 오른팔을 휘두르자, 붉은 잔상이 반원 모양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 남는다. 이윽고 김수현이 살짝 검을 떨치니, 짜르르 떨어 울리며 쏜살처럼 뿜어졌다.
쐐애애액!
그 기운이 뿜어내는 흉포함을 알아챈 걸까? 사용자들은 공포에 질려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애썼으나, 붉은 검기는 단 이 초 만에 가장 선두에 있던 사용자를 폭풍처럼 강타했다. 그리고 복부를 예리하게 찢고 들어가는 순간, 두건을 눌러쓴 여인의 눈동자에 절망이 어린다.
“악!”
꽝!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갈기갈기 찢긴 사지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몸속에 폭탄을 넣고 터뜨린 듯 무시무시한 폭음이 터졌다. 그러고도 열기는 한층 강렬해져 폭발로 퍼진 핏물이 물에 탄 소금처럼 녹아 내일 정도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붉은 검기는 여인을 폭사시킨 것도 모자라, 그 뒤에 있던 무리까지 무자비하게 덮쳐들었다.
꽈앙, 꽈앙, 꽈앙, 꽈앙!
연거푸 들려오는 어마어마한 굉음. 도미노처럼 차곡차곡 무너지는 사용자들.
지뢰가 연속으로 폭발하면 이렇게 될까? 천지가 진동하며 흔들릴 때마다, 무리 중 서너 명이 여지없이 수직으로 솟구친다. 공중으로 튕긴 신체는 그로테스크하게 폭렬했고,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지면을 뜨끈하게 적셨다.
그렇게 일련의 밀어내기가 끝나자, 붉은 검기가 휩쓸고 지나간 장소에는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형체는 핏물 섞인 떡으로 화했고, 바닥은 깨지다 못해 숫제 뒤집힐 정도였으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아키노를 데려왔던 사내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그러고도 모자라 두 번 세 번 계속 문지른다. 두 번, 단 두 번에 불과했다. 격렬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고, 손짓 한 번, 팔 한 번 움직였을 뿐이다. 한데 아차 한 사이 기백 명에 가까운 적이 땅을 나뒹굴고 있다.
“흠.”
그러나 김수현이 이 정도면 됐다는 듯 턱을 까닥인 후 뒤를 돌아보았다.
“이야~. 이거 벌써 신나게 한바탕 하고 계시구먼?”
그곳에는 김덕필이 워프 게이트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머셔너리 클랜은 오래전에 넘어왔고, 리버스 클랜도 이제 막 넘어오는 걸 마친 참이었다. 김수현에 시선이 쏠린 사이, 거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인원이 넘어왔다.
“히이이익!”
“도, 도망쳐! 괴물이다아아!”
순식간에 인원이 불어나자 광장을 에워쌌던 이들은 하나같이 몸을 돌려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김수현의 인간 같지도 않은 신위에 놀라 도망친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김수현~. 쟤네 다 죽여도 되지?”
비비앙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는 놈들을 보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수현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끄덕였다.
“물론이지.”
“좋아. 그럼….”
비비앙은 싱글벙글 웃으며 질서의 오르도를 높이 들었다.
“오라! 피에르! 제 사 군단을 지배하는 미친 불꽃의 어릿광대여!”
– 후헤헤헤, 후헤헤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놨는지 곧바로 마법 진이 그려지며 어두운 운무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 사이로 서서히 솟아 나오는 사 군단장을 보며, 비비앙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외쳤다.
“피에르! 오랜만에 파티다!”
– 히히?
“마음껏 뛰놀아도 좋으니까! 싹, 모조리, 깡그리 먹어 치워!”
– 흐히, 흐히히히!
그 말 한 번 마음에 든다는 듯 피에르는 소리 높여 웃으며 아앙 입을 벌렸다. 그리고 같이 깔깔 웃고 있는 비비앙의 머리를 덥석 물었다.
“후비베베바비보베!”
비비앙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미친 낙지처럼 발광했다. 간신히 벗어나더니 침에 질척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펄펄 뛴다.
“이 멍청이가! 나 말고 쟤네 먹으라고!”
– 후헤?
피에르가 갸웃하며 눈을 돌리자, 멍하니 서 있던 동 대륙 사용자 무리가 주춤 물러섰다. 비비앙은 기함해 손을 저었다.
“아니! 얘네 말고! 저기 도망가는 애들 있잖아! 이 바보야!”
피에르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킬킬 웃어 젖혔다. 그러다 돌연 뚝 웃음을 멈추더니 무서운 얼굴로 쇄도하기 시작한다. 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는 마수 군단을 보며 비비앙은 조용히 투덜거렸다.
“저 김수현 같은 놈. 알고 있으면서도 저랬을 거야.”
“뭐?”
“아니, 아니야! 여기는 나한테 맡기라고 그랬어!”
“…….”
비비앙은 히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김수현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흔든 후, 배 잡고 폭소하는 김덕필을 향해 말했다.
“여기는 저희가 정리할 테니, 리버스는 어서.”
“큭! 아, 알았어. 일단 성안부터 정리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한 김덕필은 등허리에서 거대한 검을 꺼내 꼬나 쥐었다.
“이놈들아!”
쩌렁쩌렁한 외침.
“가자! 머리 까만 놈만 빼고 모두 죽여라!”
우오오오오오오오!
그에 호응하는 함성이 도시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참 간단한 피아 식별 방법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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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집필을 늦게 시작해서…. 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