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7
00896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아침이 지나고, 해가 중천에 오를 즈음에도 남 대륙은 딱히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거침없이 진군해온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형의 말대로 여기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이른바 미끼 임무를 수행하는 것. 두 번째는 함정을 설치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를 성 밖으로 꾀어내는 것.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느 쪽이든 큰 상관은 없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무조건 승리하는 길이고, 설령 후자라도 질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왜냐고?
간단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봤자 불시에 악마가 등장하는 장면일 텐데, 그건 이미 대비를 해뒀으니까. 그 방법을 사용하면….
글쎄. 그들이 악마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화 시절 최강의 용을 상대로 이겨낸 고대 영웅들인데, 약화한 악마를 상대로 어느 정도 시간은 끌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미미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어느새 두 여인이 다가와 있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제갈 해솔과 동 대륙 사용자로 보이는 여인. 어제 넘어왔을 때 언뜻 본 기억이 있다.
– 저.
음성이 울려 나오는 걸 보니 번역 마법을 사용한 듯싶다. 아, 그래서 제갈 해솔이 같이 온 건가. 수송 셔틀에 이어서 번역 셔틀이라니. 너도 고생이 많구나.
– 아키노라고 합니다. 구원군을 보내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아키노라고 밝힌 여인은 진심이라는 듯 깍듯이 허리 숙였다.
“괜찮습니다. 임무 수행의 일환이니까요. 그나저나 현재 동 대륙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번 일만 끝나면 더 볼 사이도 아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키노는 곧장 허리를 폈다.
– 송구합니다. 침공 소식은 일찍 접했으나.
“송구할 필요도 없고, 구구절절한 사연은 사양하겠습니다.”
–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흠.”
짐짓 세게 말했건만,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당황한 기색은 아니다. 아마 그만큼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일 터.
좋아. 아마 수호자 정도 되는 사용자인 것 같은데, 태도를 보니 한시름 놔도 될 것 같다. 보자마자 징징거렸으면 상당히 짜증 났을 테지만, 적어도 발목은 잡지 않을 것 같거든.
– 우선 지켜낸 도시는 이곳뿐입니다.
“생존자는?”
– 칠팔천 명 정도 됩니다.
“칠팔천 명.”
알기로 동 대륙 인구는 약 이만 명. 그럼 일만 이천 명 정도가 연합군에 넘어갔다는 소리다. 아니, 악마의 양분으로 화했다 봐야 옳으려나.
아무튼, 중요한 건 이 칠팔천 명을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인데.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수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부상자 제외하고.”
– 한 사천 명….
“거기서 거주민을 제외하면요?”
– …삼천 명입니다.
아키노는 뺨을 살짝 붉히며 말을 흐렸다. 뭘 부끄러워하는지 짐작은 가는데, 상관없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을 뿐, 애초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조용히 성안에 있으라 하는 게 낫겠다.
“클랜 로드!”
그때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신재룡이 조깅하듯 성큼성큼 뛰어오고 있다.
이윽고 내 앞으로 도착한 신재룡은 숨을 힘껏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그림자, 후! 그림자 여왕님의 전언입니다. 심문이 끝났습니다.”
“아, 그래요?”
나는 반색하며 몸을 돌렸다. 어젯밤 강철을 부리던 마법사를 잡은 후, 죽이지 않고 포로로 넘겼다. 금방 정보를 캐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제야 성공한 모양이다.
“예. 정신 오염이 성공했고, 정보를 토해냈습니다.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고연주의 고유 능력, 유혹의 눈동자를 상대로 오래 저항했다는 건 정신력이 뛰어난 사용자라는 방증이다. 실력 좋은 사용자는 높은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아는 것도 많지 않겠는가. 과연 어떤 정보를 뱉었으려나?
“뭐라고 합니까?”
“제가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가면서 겸사겸사 듣죠.”
“예. 우선 남 대륙 병력은 약 이만 명 가깝게 된다고 합니다.”
말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했다.
이만 명? 겨우? 그곳 인구는 우리와 비슷하지 않나?
“저도 좀 적다고 생각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신재룡이 빠르게 말을 잇는다.
“반란이 성공하고 악마가 나타나자 오딘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추락했다고…. 아, 오딘은 남 대륙을 선도하는 클랜이라고 하네요. 중앙 관리 기구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요?”
“오딘이 주도한 반란에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나 봅니다. 결국, 오딘은 혼란에 빠진 라그나로크를 놔둔 채 지지하는 세력만 이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오호.”
그 말을 들은 순간 반사적으로 무릎을 탁 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소식이었고, 동시에 형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바로 회의를 소집하려는 찰나, 또 누군가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머, 머셔너리 로드 님!”
처음 보는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와 급격히 숨을 몰아 쉰다. 그리고 놀랄만한 소식을 전했다.
“남 대륙이 진군해오기 시작했다고요?”
“예, 예! 해밀 로드 님이 어서 모셔오라고…!”
사내는 헐떡거리면서도 서둘러 남문을 쳐다봤다.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성벽으로 올라가자, 이미 나를 제외한 상당수의 클랜원, 사용자가 올라와 있었다. 고연주는 성벽에 올라앉아 느긋이 다리 꼬고 있었지만, 선유운처럼 반파된 망루로 올라가 저격을 준비하는 이도 보였다. 그리고 형은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더니 아무 말도 않고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마침 클랜원들도 좌우로 길을 터줘, 나는 바로 전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두두두두두두두두!
어마어마한 진동 소리와 함께 흙 연기가 뽀얗게 일어나는 중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그림자가 황야를 검게 물들이며 돌격해오고 있었다. 흡사 그대로 이 성을 밀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이만 명…. 아니다. 어제 좀 죽였으니 약 일만 팔천 명 가량 되지 않으려나.
우리보다 세 배를 넘은 인원임은 분명하지만, 이상하게 부담은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어젯밤 전투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아니면 워낙 잔뼈가 굵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동, 서, 북쪽은?”
“안 보여. 아마 성벽이 부서진 곳이라 집중적으로 공략할 속셈인 것 같은데.”
형의 답변에 끄덕거린 후,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문득, 한 여인이 눈에 밟힌다. 머리카락서 황금빛을 반사하는 여인은, 누구보다 가장 앞으로 나와 질주해오고 있었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게 있어,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1. 이름(Name) : Eldora Cornelius(6년 차)
2. 클래스(Class) : 금빛의 기사(Secret, The Golden Knight,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라그나로크(Ragnarok)
4. 소속 단체(Clan) : 오딘(Odin)(Clan Rank : AA)
5. 진명 • 국적 : 엘도라도의 주인(Owner Of The El Dorado) • 영국(England)
6. 성별(Sex) : 여성(20)
7. 신장 • 체중 : 164.2cm • 52.2kg
8. 성향 : 질서 • 선(Lawful • Good)
1. 김수현
[근력 99(+2)] [내구 95(+2)] [민첩 101] [체력 101(+2)] [마력 96] [행운 90(+2)]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82 Point
2.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근력 100(+6)] [내구 94(+2)] [민첩 90(+2)] [체력 92] [마력 95(+4)] [행운 100]
(잔여 능력치는 0포인트입니다.)
Total : 571 Point
그렇게 출력된 정보를 확인한 순간,
“응?”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엘도라,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오딘 클랜의 수장인 만큼 확실히 굉장한 사용자 정보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엘도라의 사용자 정보 따위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에 관심이 있었다. 일 회차 기억에 따르면 엘도라는 분명 체력을 올려주는 장비를 갖고 있었다.
사용자의 근력을 무조건 육 포인트 올려주는 엑스칼리버. 그리고 엑스칼리버를 가졌다는 가정하에 사용자의 체력을 무조건 사 포인트 올려주는 엑스칼리버의 칼집.
검의 군주라는 클래스와 검의 주인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이상, 엑스칼리버의 주인으로 인정받는 건 일도 아니다. 말인즉 두 장비만 뺐을 수 있다면, 내 근력과 체력은 각각 자동으로 105포인트를 찍게 되는 것이다. 그럼 그때부터는 남 대륙이고 악마 놈 들이고 일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젠장, 멍청한 년. 여태까지 칼집도 안 찾아놓고 뭘 한 거야?
– 와, 씨! 105? 그 정도면 강신, 아니 강신이 뭐야! 아예 강림, 현신도 가능한 수치잖아!
화정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쉽다는 어투로 중얼거린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남 대륙은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약 오백 미터를 앞두는 지점서 진군을 정지한다. 그러자 하염없이 일던 흙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흩어지고, 햇빛을 반사하는 남 대륙 군대의 위용이 차츰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적잖은 수에도 불구하고 오와 열을 맞춰 정연히 서 있는 것이 나름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주변을 쭉 둘러보고 나서, 나는 도로 시선을 고정했다. 가장 선두로 나온 엘도라 또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선을 맞춘 찰나, 엘도라는 돌연 가볍게 손을 젓더니 혼자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법사 한 명이 뒤따라 나와 신속히 수인을 맺는다.
잠깐, 사방이 적막해진다.
– 아, 아….
그러나 잠시 후, 아직 앳된 소녀가 마이크 테스트하듯, 증폭된 미성이 허공을 고요히 울렸다.
걸음을 멈춘 엘도라는 무심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 그대들에게 고한다.
이어지는 음성은, 몹시 쌀쌀맞다고 느껴질 만큼 차갑고 고저도 없는 목소리였다.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닌, 일방적인 통보라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 물론 그대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때.
– 또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엘도라는.
– 이 시간 이후, 그대들에게 항복 의사는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굉장히 갑작스럽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
병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