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8
00897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비단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듯하다.
성벽에 올라앉은 고연주는 순간 휘청거리더니 거의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돌아본다.
“쟤 뭐라는 거예요?”
“미친년인가?”
누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군.
“허 참! 항복? 허허, 허허허허!”
그 정도로 어이없는지 김덕필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우렁차게 비웃는다. 확실히 들렸는지 오연히 서 있던 엘도라의 눈매가 살며시 가늘어진다.
– 그대는 누구지.
한 번 더 증폭된 음성이 울린다. 목소리는 적의는 물론, 싸늘한 살기마저 품고 있다.
그러나 픽 코웃음 친 김덕필은 성큼성큼 걸어가 한 발을 성벽 사이로 걸쳤다. 그리고 외쳤다.
“네 아비다!”
“푸흐히헤후하하하!”
진수현이 뻥 터진 것을 시작으로 주변으로 삽시간에 웃음이 전염된다. 차소림은 예의 근엄한 얼굴이나 어깨를 가늘게 떠는 것이 무언가 필사적인 느낌이다. 사실 나도 살짝 웃기는 했다.
방금 김덕필의 언행은 나쁘지 않았다. 무릇 전투 직전 가장 중요한 건 사기라고 볼 수 있다. 엘도라도 그걸 알고 있어 저렇게 까부는 것일 터.
– …상종 못 할 자들이군.
일그러진 입술에서 흘러나와서인지 음성이 심히 진동한다.
그래. 화나겠지. 아마 어제의 패전을 기세로 만회하려는 것 같은데 김덕필이 정면에서 받아쳐 버렸다. 패륜성 짙은 모욕을 들어서인지 효과는 예상외로 컸다.
이윽고 차차 웃음이 잦아들 즈음.
– 입 닥치지 못해!
갑자기 거친 욕설이 허공을 왕왕 울렸다.
– 이 찢어 죽일 노란 원숭이 새끼들!
엘도라의 목소리는 아니고, 웬 시커먼 사내놈이 튀어나와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있었다. 한데 하나 특이한 건, 얼굴의 절반을 붕대로 감고 있다는 것. 보아하니 오딘 클랜인 것 같고, 알 듯 말 듯한 안면인데.
맞다. ‘맹화의 기사’ 아키로프였나?
– 그리고 어제 번개 부른 마법사 놈! 네놈은 특히 각오해라! 이 몸이 친히 사지를 잘라줄 테니까!
번개 부른 마법사 놈?
아.
“흠.”
형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차분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 괜히 힘쓰실 필요 없으세요. 아주버님.”
그러한 찰나, 나른하면서 간드러진 음성이 형의 행동을 가로막는다.
“견문발검이라고, 사소한 일에 뇌신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고혹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 사근사근하게 구는 고연주. 형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일리 있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러자 고연주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진해진다. 그녀는 여전히 성벽에 올라앉은 상태로 나를 돌아봤다.
“수현? 쟤네 주둥아리 좀 닥치게 하고 싶은, 아니. 잠깐 몸을 좀 풀고 싶어요.”
형의 앞이라 급히 바꾼 듯싶은데, 아마 전자가 본심일 것이다. 주둥아리 좀 닥치게 하고 싶다는 말인즉, 기세 좀 단단히 꺾어놓고 오겠다는 뜻일 터. 물론 저 요청을 거부할 이유는 하등 없다.
“죽지 않고 돌아올 자신이 있다면요.”
“어머, 버프 걸어주시는 거예요?”
걱정해주는 말이 기쁜지 고연주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
찰나의 순간, 고연주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눈 깜짝할 사이, 성벽에 드리운 그림자로 쭈르륵 녹아내렸다. 이어서 상대 진영으로 무섭게 쇄도하는 은밀한 그림자 하나.
잠시 후.
“끄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바로 눈을 돌리니, 밀집한 병력 사이로 솟구친 핏물이 분수를 이루고 있다. 보이는 거라고는 이제 막 놀라는 주변 사용자와 흐릿하게 스치는 그림자뿐.
“꺄아아악!”
처음 당한 사용자가 쓰러지기도 전, 또 한 번 비명이 터졌다. 무려 이십 미터나 떨어진 거리서 가운을 걸친 여인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두 발목이 완전히 찢겨나간 채로.
“커허어억!”
숨을 들이켜기도 전 세 번째 비명이 폭발했다. 이번에는 흰 로브를 입은 사내가 주저앉았다. 곧바로 네 번째 비명까지 흐르자 비로소 적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엘도라도 상당히 당황한 듯싶었다. 어느새 빛나는 검을 들고 계속 고개만 돌리고 있으니. 결국, 한 여인이 보랏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목에 걸린 뿔피리가 덜렁거리는…. 어, 뿔피리? 뿔피리라면 ‘수색의 기사’ 나탈리일 텐데?
오딘의 무력 부대인 원탁의 기사 중 수위에 드는 사용자인 만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확실히 방심할 사용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크윽!”
“으아아악!”
아무래도 그림자 여왕의 상대로는 한 수 아래인 듯싶다. 일단 방향 잡는 걸 보니 고연주의 움직임을 가까스로 읽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왼쪽으로 가려다가 오른쪽으로 가려다가, 다시 왼쪽으로 몸을 돌리는 웃지 못할 행동을 하고 있다. 그에 반해 고연주는 상대를 놀리듯 벌써 열 번째 비명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고연주의 신위는 진심으로 놀라웠다. 적 대다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익!”
결국에는 참지 못했는지 나탈리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목의 뿔피리를 채듯이 잡고, 숨을 힘껏 들이켜며 물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아마 고연주가 있는 방향으로 모종의 능력을 사용한 것 같다만.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명이 뚝 멎었다. 나탈리는 찡그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돌연 이를 갈며 성을 돌아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 고연주는 이미 돌아와 성벽에 요염이 앉아 있었으니까. 처음 다리 꼰 자세 그대로. 그러니까 헛짓했다는 말이다.
손에 묻은 핏물을 툭툭 털던 고연주는, 나탈리와 눈이 마주치자 한 눈을 찡긋한다. 더 나아가 손바닥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후~ 불어주기까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사용자 열 명이 불귀의 객이 돼버렸다. 그야말로 상대를 완전히 가지고 논 것이다. 이렇게 당하면 나라도 흥분하지 않을까.
“크으으윽!”
역시 그런지 나탈리는 앙칼진 눈으로 고연주를 노려봤다. 주먹 쥔 두 손을 바들바들 떠는 것이 심히 분노한 게 분명하다. 여하튼 기선 제압은 대성공인가.
“좋은….”
좋은 활약이었다고 말하려는 찰나, 문득 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선두에 있는 원탁의 기사 중, 누군가 석궁을 들어 위를 겨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인의 눈동자는,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독하고 예리한 눈빛을 뿜는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인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쐐애애액!
거의 동시에 햇빛을 반사하는 볼트(Bolt) 하나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짓쳐 들었다. 볼트 끝은 정확히 고연주를 노리고 날아왔지만,
“이지스 시스템!”
까앙!
백한결이 생성한 정육각형의 방패가 직전에 가로막았다. 아니, 가로막는 걸 넘어, 여인을 향해 그대로 되돌려 보낸다.
‘신의 방패’의 고유 능력 되비침. 설마 반사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볼트를 발사한 여인의 눈이 한껏 치떠졌다. 그러나 그 여인 앞으로 백발을 휘날리는 사용자가 뛰어들어 흰색 방패를 앞세우며 막아선다.
이윽고 방패 주변으로 불거진 희멀건 한 막이 볼트를 튕겨낸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검붉은 섬광이 세게 강타한다.
파지지지지직!
“아악!”
외마디 고함이 터졌다. 방패는 처음에는 막아내는가 싶었지만, 검붉은 화살은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가 장막을 달걀 껍데기 깨듯 박살 내며 들어갔다.
백발의 여인은 발라당 나동그라지더니 복부에 화살을 맞은 것도 모자라 땅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데굴데굴 구르는 여인을 보다가, 나는 불현듯 저 화살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흘끗 옆을 흘기자, 선유운이 망루에 엎드린 채 입맛을 다시고 있다. 좋아. 이로써 이 승인가.
어느새 성 아래 남 대륙 진영은 한창 어수선해진 상태였다. 공수성 전 기세 싸움에 밀린 영향이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달려왔건만, 연달아 당하기만 하니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딘, 그것도 원탁의 기사가 줄줄이 밀리지 않았는가. 엘도라의 무심하던 눈동자도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한 거한이 성큼 걸어 나왔다. 두 팔에 붙은 울퉁불퉁한 근육은 전사를 연상케 하지만, 흰 로브를 정갈히 차려입은 걸 보니 사제인 듯하다.
“어, 재룡이 아저씨가 왜 저기 있지?”
고개를 쭉 내민 안솔이 천연한 얼굴로 갸웃한다. 진짜 신재룡은 쓰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 우뚝 선 거한은 장대 같은 메이스를 꺼내 하늘 높이 들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심판의 기사’ 에드워드도 기억나는데.
“심판을 받으라!”
그때, 준엄한 고함과 함께 빛이 번쩍였고,
쾅!
와르르!
빛무리가 폭사한 지점의 성벽이 부서져 무너진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백한결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반사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주문을 외는 동시에 발동했으니 막지 못한 것이다.
“심판을 받으라!”
쾅!
또 한 번 빛이 어딘가를 강타하고, 성벽서 끔찍한 절규가 터졌다. 반대로 아래에서는 소란이 가라앉고 서서히 호응이 일기 시작한다. 거한은 흡사 도발하듯 메이스를 좌우로 흔들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그때였다.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누군가 기습적으로 소리 지르는 동시, 맑은 하늘에 흰 번개가 서너 가닥 내리쳤다. 벼락에 직격당한 이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허연 김을 뿜으며 쓰러진다. 멍하니 보고 있는 찰나,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안솔이 눈에 밟혔다.
“후우우우.”
숨을 길게 내쉰 안솔은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도로 들이키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빽 소리 질렀다.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그러자 아까와 비슷한 벼락이 재차 진영을 강타한다.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고 있던 거한은 얼른 메이스를 다잡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고 남 대륙이고 서둘러 방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심판을 받으라!”
쾅!
“천벌을 내리소서!”
번쩍!
“심판을 받으라!”
“천벌을 내리소서!”
“심판을 받으…!”
“천벌을 내리소서!”
“심판을 받…!”
“천벌을 내리소서!”
“시, 심판을…!”
“천벌을 내리소서!”
쾅, 쾅, 쾅, 쾅!
번쩍, 번쩍, 번쩍, 번쩍!
– 우하, 우하하하! 아이고 웃겨 죽겠다!
심판과 천벌. 이 치열한 싸움이 그리도 웃기는지 화정이 정신없이 웃는다.
어쨌든 승리의 여신은 끝내 심판이 아닌 천벌에 미소 지었다. 천벌은 발동하는 족족 상대의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가 피해를 줬지만, 상대의 심판은 네 번에 세 번은 가로막혔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능력은 확실히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결국 발동 주체는 사용자다. 그럼 사용자 정보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는데, 제 3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저 거한의 마력 능력치는 88포인트.
그러나 안솔은 무려 100포인트다. 즉 애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삼 승, 삼 승이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남 대륙 진영은 곳곳이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고, 거한은 주문을 멈추고 질린 낯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안솔은,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짜자자자자자자작!
흡사 아웃사이더에 빙의된 듯, 아, 아니. 이건 좀 심하잖아? 무슨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꽝!
“꺅!”
그때 갑자기 뻥 폭발하는 소음과 함께 안솔이 갑자기 자빠져 굴렀다. 머리카락을 올올이 곤두세운 엘도라가 이를 악문 채 엑스칼리버로 겨냥하고 있었다. 아마 상황을 보다 못해 검기로 직접 안솔을 저격한 것 같다.
“저 싸람이 진짜!”
눈을 돌리자, 바닥에 널브러진 안솔이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다. 무에 그리 분한지 두 눈동자는 불꽃마저 튀기고 있었다.
“아, 안솔 양! 괜찮으십니까?”
“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신재룡이 급히 달려갔으나 안솔은 거칠게 뿌리쳤다.
“일대일 싸움에 끼어들다니! 비겁해요!”
“두고 봐! 후회하게 해줄 테야!”
그렇게 외치며 벌떡 일어서더니, 어깨에 멘 아기 카오스 미믹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다.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이거나 먹으라는 듯, 꺼낸 무언가를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마력을 불어넣어서인지, 그것은 허공에 긴 곡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간다.
불현듯 이유정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움켜쥐더니 뒤늦게 두 손을 뻗었다.
“아, 안 돼! 백만 골드 포인트가…!”
왜인지 아깝다는 투였으나 그것은 이미 진영 한가운데로 툭 떨어진 뒤였다.
흠, 백만 골드 포인트? 뭘 던진 건데?
그러고 보니 괴물 소환 상자처럼 보인 것 같기도….
“…….”
…어?
–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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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