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00
00899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남 대륙 진영은 불시에 소환된 오벨로 기사단의 돌진에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한 놈만 상대하면 될 줄 알았을 텐데, 돌연 부하 기사들이 나타나 송곳처럼 찌르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안간힘을 쓰며 대열을 추스르려 했으나, 오벨로 기사단의 힘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똘똘 뭉친 일백 명이 한꺼번에 대검을 앞세워 돌격하니, 남 대륙 사용자들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며 꿰뚫리고 짓밟혔다.
그렇게 후미를 일직선으로 돌파한 오벨로 기사단은, 곧바로 뒤돌아 다시 들이치기 시작했다. 엘도라는 무어라 고함치며 애는 쓰고 있었지만, 진영은 이미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고작 일백 명에 불과한 기사단이 이만 명에 가까운 적진을 종횡무진 휘젓고 있다. 아무리 기습적이었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엄청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형의 말대로 기회였다. 사실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이건 깽판을 넘어서는 수준이 아닌가. 한 눈에 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 타이밍에 같이 몰아친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피해를 줄 수 있을 터.
쿵!
생각을 끝낸 찰나,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갑자기 강하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옆을 돌아보자, 희멀건 한 빛이 근원의 온몸에 물들어 흐르고 있다.
웅웅웅웅!
이어서 들려오는 심상찮은 진동음.
– 접속 중…. 일반 출력 24.75%…. 최대 출력 51.24%…. 액셉트.
근원은 더는 딱딱한 기계음이 아닌, 왕왕 울리는 웅혼한 음성으로 말했다.
– 접속이 완료됐습니다. 현 시간부로, 근원의 이름으로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를 소환합니다.
동시에 빛이 흐르던 몸에서 각양각색의 마법 진이 우수수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하나, 둘, 넷, 여덟, 열여섯, 서른둘…. 수십, 아니 기백을 넘는 진은 서서히 공전을 멈추며 서로 겹치지 않게 가지런히 자리 잡는다.
잠시 후, 허공을 가득 메운 진들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흡사 당장에 마법을 퍼붓겠다는 듯,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이 살 떨리게 느껴진다.
이윽고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던 근원은 문득 나를 돌아봤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무언의 눈초리.
그 눈과 마주한 순간,
“근접 계열들은 모두 성문으로!”
나는 반사적으로 외치며 성벽 아래로 내달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외침을 전달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등 뒤로 우르르 몰려 내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나 말고도 전원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안솔이 만들어준 이 상황이, 지금 이 순간이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어쩌면 끝이 될지도 모르는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최고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성벽으로 내려가고 성문으로 모이는 동안, 돌연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이 발동한 뇌신의 뇌성이 고막을 때리고, 불을 뿜는 열기나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은 어지러운 화살 소리가 중구난방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하나하나 확인할 틈이 없어, 나는 통신 수정을 꺼내 들고 성문으로 달리면서 외쳤다.
“성문이 열리는 순간, 성벽 근처의 사격은 절대로 금지합니다!”
“저희가 전방에서 부딪치는 즉시 최대한 후미에 집중하여 사격하고, 돌파가 끝나고 적진이 붕괴하면 바로 퇴로를 차단해주면 됩니다!”
그렇게 약 오 분 여가 흐르자, 궁수, 마법사, 사제를 제외한 클래스는 어느 정도 성문 앞으로 집결한 듯싶었다.
어지간하면 클랜별로 진형이라도 짜고 싶었지만, 그냥 이대로 섞인 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거니와, 상대가 혼란에 빠졌다면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것도 좋은 계책이다.
무엇보다 북 대륙 사용자들은 오벨로 기사단 같은 전투보다는, 개인 능력에 기대는 난전에 훨씬 익숙한 이들이니까.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섬광과 폭발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성문을 열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서너 명의 사용자가 달려가 성문을 힘껏 끌어당겼다.
서서히, 조금씩 열리는 성문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친다.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
등 뒤에는 나를 가장 먼저 따라온 클랜원들이 긴장한 눈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고연주, 남다은, 안현, 이유정, 차소림, 신재룡….
끼이이익, 쿵!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고 있자, 성문이 완전히 개방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나도 모르게 도로 닫고 말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갑시다.”
이 한 마디와 함께 무검을 뽑고 가장 선두로 훤히 개방된 성문을 통과할 뿐.
와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아스라이 울리는 함성이 들리는 동시, 마침내 성 아래 황야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단지 성벽 위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왔을 뿐인데, 그 시간 동안 바깥 풍경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참사, 아니 천재지변 급 재앙이 휩쓸고 지나갔다고 해야 하나.
당장 눈에 보이는 시체만 해도 수백 구. 시꺼멓게 탔거나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힌 시신이 지천으로 즐비하게 널렸고, 곳곳에서 새는 핏물이 땅으로 흘러 내를 이루고 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탄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찌른다.
“으아, 으아아아!” “북 대륙 놈들이다! 북 대륙 놈들이 나왔다!”
그리고 우리를 보자마자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리는 남 대륙 사용자들.
안 그래도 어지럽던 대열이 더더욱 난장판으로 변한다.
그때, 문득 한 사내가 눈에 밟혔다. 아까 형을 찢어 죽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아, 아키로프인가? 좀 전에 있었던 집중 사격의 영향권에 있었는지 몸을 비틀거리고 있다.
마침 잘됐다.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라면 손수 죽일 가치가 있으니.
“이노오오오오오옴!”
그렇게나 화가 나는지 아키로프는 우리가 오는 방향을 쳐다보며 분노에 찬 노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핏물이 묻은 손으로 칼을 빼더니 정면으로 맞서왔다. 시뻘건 불길이 칼등을 맹렬하게 휘감아 오르고, 칼끝을 겨냥해 신속히 짓쳐 들어온다.
심한 상처를 입었을 터인데, 그 기세만큼은 칭찬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맹화(猛火), 즉 불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이상 아쉽게도 내 상대는 아니었다.
달려가는 와중, 화정의 두 번째 권능인 염안(炎眼)을 사용해 검에 오른 불길을 꺼트리자, 아키로프는 순간 놀란 얼굴로 움찔 걸음을 멈췄다. 실수라면 실수였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 틈을 노려 이형환위로 후방을 점거했고, 훤히 노출된 목덜미로 무검을 쭉 밀어 넣었다.
“커헉!”
칼끝이 목젖을 뚫고 나오는 것과 함께 외마디 탄식이 터졌다. 손을 세게 털며 등을 걷어차니 아키로프는 혀를 길게 빼문 채 나자빠졌다. 그 와중에도 살고 싶었는지 덜덜 떨리는 팔을 내뻗었으나, 나는 손등을 칼로 찍어 내리는 동시에 발로 있는 힘껏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퍽!
머리통을 박살 내자, 그제야 놈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한 번 세차게 몸을 경련하더니 축 힘없이 늘어진다. 일 회차서 명성을 떨쳤던 ‘맹화의 기사’ 아키로프 치고는 너무나 허망하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 회차가 아닌 이 회차였다. 물론 상황 덕을 본 것도 있지만.
그렇게 한 호흡 돌리고 눈을 돌리니, 성난 짐승처럼 덮쳐가는 아군들 사이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적들이 보였다. 아마 믿었던 원탁의 기사가 찍소리도 못하고 죽자 꽤 놀란 듯싶은데.
어쨌든 서둘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무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무릎을 굽혔다.
그 순간이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 S, Sovereign?
갑자기 귓전에 천둥 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코앞에 있던 적들이 붉게 녹슨 대검에 꿰이며 우수수 흩어진다.
구슬픈 울음이 터지며 등장한 그림자는 다름 아닌 오벨로 기사 단장과 휘하 기사들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돌진을 멈추고,
– Sovereign? Sovereign!
격분에 찬 포효를 터뜨린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대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리고 있고, 투구 안에서는 흉흉한 안광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물씬 느껴지는 적의는 흡사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 같은 태도와 진배없다.
심지어 뒤에 있는 기사들까지 모조리 살기를 뿜어대는 터라, 절로 신경이 곤두서고 살이 따끔거린다.
– Cur! Exiguæ dereliquit nos!
어둡고 칙칙한 음성. 그러나 워낙 크게 소리 지르는 터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단지 어딘가 정중하면서도 사무칠 정도의 서글픔이 느껴지기는 했다.
애초 왜 이렇게 나를 적대하는지….
“아.”
그러고 보니, 근원이 절대로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것 같기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었다. 기사 단장은 물론, 기사 전원이 나를 향해 대검을 겨냥하고 있었다.
젠장, 실수다. 그냥 빠르게 나오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근원의 경고를 깜빡 잊고 말았다.
– Sovereignnnnnnnnnnnnnn!
…결국에는 싸워야 하는 건가?
막 발을 내디딘 오벨로 기사 단장을 보며 나는 칼자루를 바스러지듯이 쥐었다. 그때였다.
– Hooh, articulorum colonia! Diu nulli videre!
느닷없이 화정이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화정?’
– 시끄럽고! 빨리 따라 해!
‘어, 어?’
– 따라 하라고! 이 멍청이! 빨리!
“Ho, oh. articulorum, colonia? Diu, nulli, videre?(호오, 기사 단장인가. 오랜만이군.)”
화정의 기세가 몹시 거센 터라, 나도 모르게 떠듬떠듬 따라 하고 말았다.
– 바보! 말투가 그러면 어떡해? 좀 거만하게 말하라고!
‘뭔 말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억울한 기분에 항변하며 시선을 올린 순간, 문득 눈동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곧장 달려올 것 같던 기사단이 움직임을 멈췄다. 적의는 여전하나 나를 가만히 노려보는 상태라고 할까.
– 계속 따라 해. Est inligatas oneribus pignus…. 이건 좀 희미하게.
어떻게 희미하게 말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은 따라 하자.
“Est inligatas oneribus pignus….(아직 맹약에 묶여 있는 건가….)”
– Culpa tua est!(당신 탓이지 않습니까!)
응? 왜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 Cur, quid tu lost in ohbel! Nos ohgiman te!(왜, 어째서 오벨로를 버린 겁니까! 우리는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심지어 먼저 입을 열고 원망처럼 느껴지는 말을 토해낸다.
에라, 모르겠다. 보아하니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은데, 우선 조용히 따라 하는 게 낫겠다.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버린 것만큼은 절대로 아니다. 나도 사정이 있었으니.”
– 사정? 사정이라고요?
“물론 변명은 하지 않겠다. 그대가 검으로 대화하기를 원한다면 기쁘게 받아줄 생각이다.”
– …….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이 상황이 웃기게 느껴졌다. 분명 전장의 한복판일지 언데, 나와 오벨로 기사단이 있는 곳만 유독 조용하다.
그때, 기사 단장이 천천히 대검을 내렸다.
– 여전하시군요….
뭐지. 왜 갑자기 목소리가 아련해지는 거냐.
– 하기야 군주께서는 언제나 그러셨지요. 입이 아닌 몸으로, 말이 아닌 검으로.
“그때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는 건가.”
– 그만큼 존경하고, 또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영웅 중의 영웅이자 감히 닿을 수 없는 지고의 존재. 우리 오벨로 기사단은 항상 당신을 향해 충성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러니 말씀해주십시오. 왜 오벨로 기사단을 버리신 겁니까. 설령 왕국이 멸망했다고 해도, 군주께서 돌아오셨다면 우리는 목숨 바쳐 따랐을 겁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좀 그렇지 않나?”
계속 화정의 말하는 대로 뱉고 있자, 기사 단장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먼빛으로 허준영이 적에게 칼을 꽂으면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 죽겠다.
– 으음. 확실히….
“옛 기분도 낼 겸, 우선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적을 처리하자. 대화는 그 후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부탁한다. 너희의 힘이 필요하다.”
여기서 화정은 아주 살짝 고개 숙이라 했고, 나는 멍한 기분으로 머리를 굽혔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 부, 부탁? 거, 검의 군주 시여! 어, 어째서 저희 같은 것들에게 고개를 숙이시는 겁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살기를 풀풀 날리던 기사 단장이 펄쩍 뛴 것이다. 게다가 굉장히 당황한 듯 투구를 도리도리 흔들기까지. 몹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 거, 검의 군주님이 부탁을…?
– 그것도 우리 단장님한테…?
오오오오오오오오!
이어서 들려오는 기사들이 울리는 탄성의 합창. 사실 거친 소음에 가깝다 보니 저주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문제는 기사 단장의 태도였다.
– 크, 크흠! 뭐…. 군주님의 부탁이라면…. 알겠습니다.
왜인지 투구 표면을 긁적긁적하더니 쑥스럽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대검을 치켜들자, 기사들도 똑같이 대검을 올리며 환호로 호응한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러냐고.
– 응? 아아. 별말은 안 했어. 그냥 이 전장 좀 정리하고, 끝나고 얘기하자고 했지.
‘그런데 반응이 왜 저래?’
– 그거야 당연하지. 아, 너는 검의 군주가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 모르나?
‘?’
– 생각해봐. 항상 선망해 마지않던 대상이 무려 고개까지 숙이면서 부탁하는데, 당연히 으쓱해 하지 않겠어? 물론 너를 증오하지만, 어쨌든 존경하는 마음도 크니까.
‘…….’
============================ 작품 후기 ============================
오벨로 기사 1 : 우와아아! 그 검의 군주님이 우리 단장님에게 부탁하셨어!
오벨로 기사 2 : 고개까지 숙이셨어!
오벨로 기사 3 : 대단해!
오벨로 기사 4 : 정말로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