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02
00901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그 시각.
‘이게…. 정녕….’
엘도라는 꿈을 꾸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어라 목청껏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크게 뜬 눈으로 어지러이 흩어지는 전장을 응시한다.
흑색 기사단이 전장을 종횡무진 휘젓고 있다. 고작 기백에 불과한 인원이지만 가는 곳마다 아군을 무너뜨리고 무참히 짓밟는다. 그리고 성문을 열고 나온 적들은 무너진 틈을 노리고 몰아쳐 와 난전으로 진영을 붕괴시킨다.
아주 간단한 공식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 갑자기 흑색 기사단이 나타났을 때부터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그뿐일까?
성벽에 서 있는 적들은 지속해서 마법과 화살을 쏴 후미를 두들기니 멋대로 후퇴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앞으로, 뒤로 갈 수도 없는 상황. 이대로 가면 곧 전 진영이 와해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멜리너스 님이라도 있었다면….’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혼란스러운 와중 엘도라는 치밀어 오르는 후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무력감. 자신감으로 빛나던 두 눈이 어두워지고, 깨문 입술서 긴 탄식이 새어 나온다. 오죽하면 괜히 앞장서 싸움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오늘 안으로 넘어온다는 멜리너스와 타나토스를 기다릴걸.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맞붙고 밀렸다면 받아들이기라도 하지. 아차 한 순간 전황이 순식간에 기울었는데 약간은 억울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억울해 할 틈도 없었다. 꿈이라면 그냥 질 나쁜 악몽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도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엘도라가 보고 있는 광경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꺄아아악!”
그때 찢어지는 비명이 전장의 사이사이로 흘러 엘도라의 귀에 꽂혔다. 워낙 큰소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목소리라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곧장 올려다본 하늘에는 시커먼 그림자에 머리끄덩이를 잡힌 여인이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사지 또한 어스름한 음영에 휘감긴 채로.
이윽고 허공에 매달린 여인을 확인한 엘도라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나, 나탈리?”
‘수색의 기사’ 나탈리.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자, 활짝 웃는 얼굴이 매력인 엘도라의 소중한 친구.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낯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기세 좋게 응전했지만 아마 그림자 여왕을 감당치 못하고 붙잡혀버린 듯싶다.
잠시 후, 음영에 붙잡혀 실 끊긴 인형처럼 흔들리던 나탈리의 팔다리가, 돌연 대(大)자로 쭉 뻗어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힘주어 잡아당기니 목은 물론, 사지가 부르르 떨리며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곧 벌어질 거열형(車裂刑)을 예상이라도 한 걸까.
“아…! 아…!”
한껏 이지러진 나탈리의 눈동자는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처럼 공포에 질려 떨고 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싫다는 듯 고개를 미친 듯이 가로젓는다.
“아, 안 돼….”
패배는커녕, 동료의 죽음을 생각조차 안 해본 엘도라는 허공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탈리!”
뒤늦게 머릿속 경종이 울리고 온몸이 심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헐레벌떡 나탈리가 떠오른 곳으로 달려보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문득 나탈리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가 싶더니.
뿌지지직, 뿌지지직!
꽈자자작!
쭉 늘어졌던 살이 퍽! 터지며 죄다 뜯겨나갔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절규가 온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한꺼번에 뜯긴 오체(五體), 폭발하듯 퍼져나가는 핏물, 주렁주렁 흘러내리는 시뻘건 장기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허공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머리만이 남아 대롱거렸다. 주변으로 소슬하리만치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특히 남 대륙 사용자들이 받은 충격은 훨씬 컸고, 엘도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몹시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목격한 후 얼굴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망연하다.
왜냐면 믿을 수 없었으니까.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항상 옆에서 웃어줬던, 그랬던 친구가 끔찍하게 죽었다. 그동안 성공과 승리로 점철된 길만을 걸어온 엘도라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 그러니 시야가 하얗게 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탈리…. 나탈리….”
어깨를 가늘게 떨며 한참 동안 같은 말만 되뇌던 엘도라는 느닷없이 번쩍 고개 들었다.
“나탈리이이이이이!”
분노에 찬 고함이 길게 이어져 메아리쳤다. 동시에 부글부글 끓던 마력이 화산 터지듯 폭발적으로 용솟음쳤다. 영향권에 있던 대지가 흔들리다 못해 쩍쩍 갈라지고, 엘도라의 주변으로 주먹만 한 광채 수십 개가 우수수 떠오른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
꽈꽈꽈꽈꽈꽈꽈꽝!
노란 빛무리들이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총알처럼 퍼져나가 눈 부신 빛을 일으키며 폭렬한다. 황금빛으로 가득히 메워진 땅이 크게 들썩거릴 정도였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엘도라가 퍼붓는 마력을 양껏 머금은 엑스칼리버의 칼등이 웅웅 울었다. 그대로 한 번 크게 휘두르자, 강제로 밀려난 공기가 삽시간에 칼바람으로 변해 전방에 있던 적들을 휘감듯이 쓸어버린다. 칼이 폭풍이 지나간 곳에는 잔해조차 휘날려 날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과연 전신(戰神)이라는 칭호가 부족하지 않은 무력.
그러나 아직, 아직도 부족하다.
부지불식간에 수십 명이 유명을 달리했으나 엘도라의 가슴은 더욱 심하게 들끓었다. 나탈리를 저렇게 죽인 놈은 물론, 이 전장에 존재하는 적을 전부 갈아 마시지 않으면 이 타는 듯한 갈증을 식히지 못할 것 같았다.
“다 죽어어어!”
엘도라는 목이 터지라 외치며 일인 돌진을 시작했다.
“포위 진형으로!”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가 황급히 외쳤다. 주변에 있던 북 대륙 사용자들이 둥글게 퍼지며 쇄도해오는 엘도라를 에워싸려 했지만, 이내 깜짝 놀라며 주춤거렸다. 포위망을 봤을 텐데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엘도라의 기세가 굉장히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하아아아!”
엘도라는 피하기는커녕 스스로 포위망 안으로 뛰어들었고, 땅에 착지하는 순간 힘찬 기합을 지르며 한 바퀴 돌았다. 새하얗게 백열한 엑스칼리버가 길쭉하게 늘어나며 빙그르르 선회하자, 검이 돌아가는 곳마다 칼끝에는 어김없이 무언가가 툭툭 걸렸다.
이윽고 회전이 끝났을 때, 무려 십수 명의 사용자가 목과 몸이 분리돼 동시에 선혈을 터뜨렸다.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이들은 너무나 놀라운 신위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엘도라는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무어라 소리 지르기 무섭게 나는 듯 달려가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두어 명의 목까지 무참히 쳐버린 후 쓰러진 시체를 밟고 지나친다.
엘도라의 감정은 오롯이 분노로 점철돼 있었다. 누구든지 상관없다. 그저 달리고 달리고 달리며, 눈에 보이는 대로 죽여버릴 뿐.
그때였다.
풍신처럼 전장을 강타하는 엘도라의 눈앞에 돌연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여들었다. 한 박자 늦게 불어온 바람은 옆구리가 아릿해질 만치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 엘도라는 달리는 기세 그대로 검을 쭉 뻗었다.
다음 순간,
까앙!
“커흑!”
배꼽이 확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과 함께 엘도라의 입에서 헉 소리가 터졌다. 온 힘을 다해 찔렀을 터인데, 되려 아찔한 충격이 전해져 몸을 뒤흔들었다. 곧바로 땅에 칼을 박고 주르륵 밀려나는 몸을 멈춘다.
황급히 균형을 잡은 엘도라는 방금 시야를 어지럽혔던 색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칠흑빛 일색인 갑옷과 사르르 휘날리는 붉은 망토. 그리고 칼의 몸체가 보이지 않는 기묘한 검을 든 사내가 오연히 서 있다.
김수현이었다.
“아야야야….”
같이 충격을 받았는지 왼손을 살짝 흔들고 있지만, 얼굴빛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엘도라는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방금까지 자신의 기운을 받아 미쳐 날뛰던 엑스칼리버가 한순간 기세가 크게 위축됐다. 심지어 칼 전체가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모종의 불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기실 ‘검의 군주’의 능력 중 하나인 백병지왕(百兵之王)의 영향이었으나 엘도라가 알 턱은 없다. 단지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고 서둘러 기운을 돋우기 시작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까의 충격으로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고, 한 줄기 이성이 경각심을 일깨웠으니.
이윽고 새 마력을 받은 엑스칼리버가 다시 백금색 빛으로 물들고 예의 위용을 되찾는다.
김수현은 피식 웃더니 가볍게 손을 떨쳤다. 그러자 세 자루 검이 홀연히 솟구쳐 김수현의 주변을 호위하듯 돌기 시작하고,
“나와라. 절멸자의 검.”
웅웅웅웅!
투명하던 칼의 몸체가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엄청난 마력이 맺혀가기 시작했다. 아직 칼날 자체는 흐릿했지만, 주변 공간이 이지러질 정도로 가공할만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엘도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김수현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물론 김수현도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엘도라를 응시한다.
오딘 클랜 로드이자 전신이라 불리는 여인.
“나탈리….”
‘금빛의 기사’ 엘도라 코르넬리우스.
머셔너리 클랜 로드이자 군신의 진전을 이어받은 사내.
“흠.”
‘검의 군주’ 김수현.
남북 대륙을 대표하는 두 사용자가 마침내 얽히고설킨 전장에서 조우했다.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던 남녀는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이 땅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좁혀 서로 엇갈리는 동시에 검을 휘두른다.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금빛과 붉은빛.
그것은 진정으로 찰나라고 부를만한 순간이었다.
꽈앙!
이윽고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폭음이 터진 순간,
“!”
한 명의 눈매가 화들짝 치떠진 건 왜일까.
일 초 후, 엘도라는 감각으로 느꼈다.
잠시 인지하지 못한 사이 시야가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은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이미 땅을 향해 처박히는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시 업데이트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네요.
6월 8일(월요일) 하루 쉽니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새벽에 아버지가 또 한숨을 쉬셔서…. ㅋㅋㅋㅋ;
냉전은 끝내고 화해는 했는데,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하고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죄송하네요.
그리고 오늘 시간 좀 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셔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다녀와야 이번 주 면죄부(?)가 생길 듯하네요. 🙂
6월 9일(화요일)에 뵙겠습니다. _(__)_
부디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아, 독자님들.
제가 재밌는 개그 하나 알아왔습니다.
혹시 다운로드의 반대말이 뭔지 아세요?
업로드?
아니죠.
바로 다웃은로드입니다.
아니면 다울지않은로드일 수도 있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