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0
00909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이상해.’
한소영은 하늘을 빙그르르 선회하는 악마를 주시했다.
김유현이 뽑아낸 전광(電光)을 동반한 뇌전의 다발이 상대를 추격하고 있다. 어떻게든 떨치려는 듯, 한참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아스타로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끈덕지게 쫓아오는 번갯불들을 향해 양손을 교차한다.
쿠르르르!
아스타로트의 앞으로 검붉게 타오르는 둥근 막이 생성된다. 그러나 부딪치기 직전, 쏜살같이 들어가던 번갯불들이 돌연 폭죽 터지듯 원형으로 터졌다. 수십 가닥으로 나뉜 벼락은 사방으로 쏘아졌다가, 막을 지나친 순간 도로 모이며 아스타로트를 전후좌우로 압박해 들어갔다.
결국에는 아스타로트의 비행이 멈췄다. 가히 극에 다다른 제어 능력을 보며 놀라더니 전신으로 기운을 뿜는다. 흑염(黑炎)도 결코 낮은 급의 힘은 아닌 터라 번개 대부분이 불살라지거나 튕겨져나갔다. 그러나 중요한 건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아다니던 아스타로트가 처음으로 멈췄다는 점이다.
“후유. 뭔 인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아스타로트는 순간 기함했다. 어떻게 막았나 싶었건만, 커다란 장대 같은 창 하나가 보랏빛 전류를 폭사하며 짓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으로 분할한 번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위력이었다.
빠지지직, 빠지지직!
아스타로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동시에 저릿한 소음이 주변을 짜르르 휩쓸었다. 시간차 공격을 날렸던 한소영은 곧 아쉬워하는 얼굴로 혀를 찼다. 점차 사그라지는 전류 속으로 약간 그을린 아스타로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복부를 짚고 있는 게 타격이 없지는 않아 보이나, 그리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지도 않다.
잠시 후, 아스타로트는 도로 공중을 선회하기 시작하고, 김유현은 발 빠르게 번개를 소환한다. 차츰차츰 먹구름이 밀려오는 하늘을 보며 한소영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껏 이어진 전투는 썩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딱히 유리하지도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지부진하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어째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거지?’
제삼자가 보고 있었다면 한소영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유현은 뇌신의 번개로 아스타로트를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아까와 같은 기회가 오면 한소영이 롱기누스의 창을 꽂는다. 아스타로트는 간간이 반격만 날릴 뿐, 끊임없이 날아다니며 방어에 전념하는 게 주된 형국이었다.
그러나 한소영은 자기 생각에 확신이 있었다. 왜냐면 ‘초감각’으로 아스타로트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으니까.
꼭 집어서 말하기는 너무 오묘하지만, 하나 확실한 점은 상대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봐준다고 볼 수도 없는 게 아주 가끔 초조해 하는 감정이 전해졌다. 자신과 해밀 로드에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신경을 쏟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아스타로트는 전투 중 몇 번이고 다른 곳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확실해. 무언가 노리고 있는 게 있어.’
한소영이 생각을 끝낸 찰나, 노란빛 번개를 쳐낸 아스타로트가 공교롭게 눈을 흘깃거렸다. 한소영은 본능에 따라 아스타로트가 보는 방향을 잡아낸 후 신속히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먼빛으로 두 형상이 아스라이 시야로 들어온 순간,
꽈아아앙!
느닷없이 엄청난 굉음이 폭발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맑은, 아니 먹구름 낀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전신의 감각이 한층 진해진다. 등에 닿은 땅의 감촉이 오늘따라 유독 부드럽고 폭신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눈을 떴을 때 얼마나 기분이 상쾌할까.
물론 염원은 어디나 염원일 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넘고 버텨서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노곤하다고 포기하면 그만큼 웃긴 일도 없을 터.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지 모르겠다. 단지 내가 쓰러진 횟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열한 번, 아니 방금 가슴을 얻어맞고 넘어진 것까지 합하면 열두 번인가. 살그머니 명치 부근을 쓰다듬자 잔뜩 찌그러진 흉갑이 느껴졌다. 그렇게나 피한다고 피했건만….
이형환위, 치우천왕의 갑옷, 게헨나의 수호 요새, 그리고 위기 때마다 외쳐준 화정의 조언이 없었다면 죽어도 이미 몇 번이고 죽었을 터.
죽겠다. 진짜로. 버티면 된다는 말에 죽을 힘을 다하고는 있는데, 어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 투덜거릴 시간이 있으면 얼른 일어나기나 하지 그래?
‘그래야지.’
화정의 뾰족한 음성에 검을 지지대 삼아 끙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의아하네. 방금은 타나토스로서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왜 공격하지 않은 걸까?
해답은 앞에 있었다.
“하아, 콜록! 하아, 콜록!”
왼손은 입을 막은 채,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다. 타나토스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호흡 곤란으로 괴로워하는 얼굴이 감기로 고생하는 앳된 소녀를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까처럼 이상한 말을 찍찍 뱉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방증이다.
하지만 아직, 아직이다. 조금 더 버텨야 한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상대는 여전히 흉측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타나토스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암담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나는 차분히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타나토스도 검은 액체를 탁 뱉더니 굽혔던 허리를 폈다.
“후!”
그리고 한 번 세차게 숨을 토하더니,
“하!”
짧은 기합과 함께 표범처럼 뛰어들었다. 힘 있게 뻗은 주먹으로부터 시커먼 연기가 줄기줄기 쏟아졌다. 곧바로 이형환위로 이동한 순간, 연기는 빙그르르 돌아 다시 나를 노렸다. 이번에는 서로 촘촘히 엮이며 그물을 형성하더니, 순간적으로 활짝 펼쳐져 내게로 날아온다. 투망에 잡히는 물고기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군.
웅웅웅웅!
내키지는 않았지만, 전후좌우가 모조리 점거당한 터라 수호 요새를 발동하고 말았다. 이번이 네 번째인가.
한순간 절반 이상으로 있던 마력이 뚝 떨어졌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나를 중심으로 조여오던 검은 그물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짝 튕겨 나간 것이다. 나는 검으로 두어 번 쑤신 후 헐거워진 틈으로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러자 등 뒤로 이를 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크으으으!”
전력을 날아올라서 그런지 땅에 있는 타나토스가 순식간에 점으로 변했다. 그러나 저 정도의 상대에게는 거리라는 게 사실상 무의미하다. 발을 한 번 구르는 것만으로도 로켓처럼 솟구쳐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응?”
그때 시야로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타나토스의 활공 속도가 느려졌다. 나와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속력이 기하급수로 떨어지는 중이다. 방금까지 뒤도 안 보고 달려들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었다. 왜인지 몹시 힘겨워하는 타나토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후우우웅!
그러한 찰나 돌연 지상으로부터 두꺼운 물기둥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솟구쳤다. 그리고 나를 쫓아오는 타나토스의 발에 착 감겨 파도처럼 출렁인다.
“아악?”
불시의 기습이어서인지 타나토스의 균형이 크게 흐트러졌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자, 팔 하나를 길게 뻗은 거대한 물의 거인과 은발의 여인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참가한 니뮤에가 물의 정령 왕을 소환했다.
“귀찮게!”
– 김수현!
화정의 음성이 뇌리를 강타했다. 동시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으로 전율이 스쳤다. 추격을 멈춘 타나토스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걷어차자 영롱한 빛을 반사하는 푸른 물방울들이 우수수 흩뿌려진다. 그러나 곧바로 새로운 물기둥이 치솟더니 걷어찬 발목에 칭칭 감긴다.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반사적으로 열화 검을 날려보낸 뒤였다. 혜성처럼 긴 꼬리를 늘어트리는 열화 검들은 타나토스를 향해 전방위로 쏘아졌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타나토스의 낯으로 갈등의 빛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화르르르!
그러나 일 초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열화 검들은 타나토스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깡그리 훑고 지나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기나긴 비명을 지르며 수직으로 추락하는 타나토스. 이어서 땅이 쿵 소리를 내며 약하게 울렸다.
황급히 아래로 내려가니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여인이 보였다. 아니, 덜덜 떨면서 애는 쓰고 있으나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키는 게 고작이었다.
열화 검에 직격당한 타나토스의 형상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아까부터 저러기는 했다만 더욱 심해졌다고 해야 하나.
팔다리는 어렴풋하다 못해 시력을 높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거니와, 이제는 몸조차도 선명하다가 희미해지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 흡사 수명이 다한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그에 따라 자연스레 기운도 약화해 처음 기운을 개방했을 때 보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기실 나는 한 대도 제대로 때리지 못했건만, 스스로 자멸하는 중인 듯하다. 힘이 떨어져 가는 게 실시간으로 보일 지경이었으니.
– 끝났네. 멍청하기는.
자꾸 미끄러지는 타나토스를 보고 있자 화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무슨 뜻이지?’
– 말할 것도 없어. 본래의 힘으로 잠깐 힘은 회복했을지 몰라도, 아직 엄연히 봉인이 존재하는데 자기 멋대로 폭주한 대가야.
‘봉인, 뭐라고?’
– 내가 말하지 않았나? 타나토스의 봉인은 다수의 신이 참여한 만큼 절대로 풀 수 없을 거라고. 역시 예상대로였어. 후후.
화정은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타나토스의 봉인이 풀리지 않았다고? 그럼 지금 눈앞의 여인은 타나토스가 아니라는 뜻인가?
– 타나토스 맞아. 그리고 풀리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걸려 있다고 했잖아.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이 핀잔 조로 말을 잇는다.
– 사실 나도 처음에 꽤 놀라기는 했어.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세상에 나올 줄은 몰랐거든. 말인즉 누군가 외부 봉인을 푸는 데 성공했다는 건데…. 야, 신들이 그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 같아? 그것도 타나토스라는 미친 신을 봉인하면서?
‘그럼 외부 봉인이 아닌, 내부 봉인도 있었다는 건가?’
– 내부 봉인이라기보다는 타나토스에게 직접 봉인을 건 거야. 만에 하나 외부 봉인이 뚫리더라도 마음껏 활개 칠 수 없도록 말이지. 그럼 생각해보자고. 죽음의 신이라는 격을 지닌 타나토스의 힘을 직접 제한하려면, 봉인을 거는 신은 그 이상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동격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지?
‘그렇지.’
– 그래서 누구도 풀지 못할 거라고 한 거야. 너와 게헨나, 즉 나와 겁화를 제외하면 누구도 타나토스의 힘을 제한하는 봉인을 해제할만한 힘이 없거든. 그리고 설령 건드린다손 쳐도, 게헨나라면 모를까. 너와 나라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야 겨우 풀 수 있는 수준일걸?
‘아.’
나는 그제야 일련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타나토스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는지, 그리고 저렇게 소멸 직전까지 몰렸는지도.
– 헤, 폭주가 멈춘 걸 보니 꼴에 살고 싶기는 하나 보네? 김수현. 가서 끝내.
화정의 말투는 이대로 두면 타나토스가 예전 수준으로 회복할 거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간신히 무릎 꿇고 앉은 여인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타나토스는 끓는 신음을 흘리며 가까스로 나를 올려다봤다. 힘에 부쳐 하는 얼굴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흉포한 증오가 역력하게 서려 있다. 어떻게든 나를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라 나는 서둘러 무검을 겨눴다.
“저기….”
그때 약하면서도 애절한 음성이 나를 부른다.
“잠시만….”
타나토스의 낯에서 흉흉한 빛이 걷힌다. 그 대신 따뜻한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기색이 자리 잡는다. 살짝 젖은 눈동자로 무언가 애걸하는 듯한 모습은 죽음의 신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가련하다.
– 볼 것도 없어. 끝내!
“사, 살려줘.”
화정의 강한 음성과 타나토스의 애달픈 목소리가 겹쳤다.
“…살려달라고?”
뜻밖의 말에 반문하자 타나토스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으, 응! 너도 봤잖아? 나 꽤 쓸만하지 않아?”
“뭐?”
“아까 그러지 않았나? 천사는 악마를 처리한 다음이라고. 어때? 나와 손잡을 생각은 없니?”
“무슨.”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코웃음 치차 타나토스가 한층 애타는 태도로 말을 잇는다.
“생각해봐. 화정과 타나토스가 손을 잡는다? 그럼 천사든 악마든 누가 문제가 될까? 응?”
“나보고 너를 믿으라는 건가?”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도 있잖아. 나도 천사한테 원한이 있으니까.”
“그럼 저놈들은?”
“악마? 버리면 돼. 아니, 네가 원하면 내가 죽여줄게. 저런 놈들보다 네가 훨씬 나아. 살려만 준다면 무조건 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말을 듣자 아주 살짝 구미가 당겼다. 솔직히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특히 천사를 상대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함부로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그 웃기지도 않은 계약서로 타나토스를 묶을 생각은 아니겠지? 정신 차려!
그러나 화정의 말이 왕왕 울린 순간 나는 바스러지듯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 기색을 느꼈는지 타나토스는 숫제 그렁그렁한 눈을 하며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제발….”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에는 드디어 소제목을 달 수 있겠네요.
그동안 일부러 소제목을 적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워낙 매의 눈을 가지신 독자분들이 많으시다 보니, 소제목만으로 차후 내용을 예측하는 경우가…. OTL
그래서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소제목을 같이 넣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뭐, 사실 어제 안솔과 마르의 대화로 어느 정도 키워드는 나왔지만….
그래도 아직 모르고 계실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