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1
00910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순간적으로 전신이 기이한 감각에 휩싸이는 걸 느꼈다.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저 배꼽 아랫부분이 찡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시야 구석에 있던 풍경이 환한 빛으로 칠해지고 무기력한 타나토스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타나토스를 죽인다. 또는 죽이지 않는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묘하다.
하나 확실한 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차를 시작하고 단 한 번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던 나인데, 끝을 앞두고 머뭇거리는 중이다.
어째서일까.
타나토스가 아깝다고 여겨서이려나?
그러고 보니 무조건 죽인다고 능사는 아니라고 후회한 적도 있잖아?
아니, 정말 이걸로 끝나는 걸까? 이렇게 쉽게?
어쩌면 이 또한 사탄이 의도한 계획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 번 시작된 의혹은 기하급수로 증폭하고 증폭해 끊임없이 꼬리를 잇는다. 끝없이 몰아치는 의문의 폭풍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한순간 가라앉는다.
“…….”
…그래.
형의 시체를 놔두고 도망쳤던 나다.
타살에 가까웠던 한소영의 자살을 눈앞에서 보고만 있었던 나다.
그러할진대.
이제 와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갈등할까.
시간을 되돌리면서 맹세하지 않았는가.
그 누구도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생각을 끝내고 눈을 떴을 때, 갈등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나는 흔들렸던 신념을 잡을 수 있었다.
타나토스를 죽인다. 죽이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래, 그러면 될 것이다.
“오ㄹ…! 버니…!”
문득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내렸던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마력을 일으켰다.
오늘, 이곳에서 확실히 끝낸다.
화르르르르르르르!
화정도 내 의지를 느꼈는지 생애 처음으로 미증유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투명한 칼날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예열되고, 강도를 이기지 못한 칼이 웅웅 검음을 토한다.
타나토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여전히 무릎 꿇은 채로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얼굴에 한껏 집중하며 무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잘 가라.”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상대를 조준한다.
“자, 잠깐만 기다려!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타나토스는 당황한 기색으로 주저앉은 채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안…! ㄷ요…!”
그때, 또 한 번 들려오는 아스라한 외침.
불현듯 누군가 이곳으로 황급하게 달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혹시 타나토스를 구하러 오는 악마라던가?
아무튼, 이 이상 늦추거나 질질 끌 시간도, 필요도 없을 터.
시이이잉!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는 이미 있는 힘껏 칼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
갑자기 눈앞의 광경이 느릿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영상 속도를 최소 배속으로 감아놓은 듯, 활활 타오르는 무검이 내리그어지는 과정이 완만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왜 이러는지 원인을 알아차리기도 전, 총 세 가지 현상이 차례대로 발생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타나토스의 표정 변화였다. 일 초 전까지만 해도 절망하던 얼굴이 칼날을 앞에 두고 갑작스럽게 변했다. 흡사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입꼬리가 귀까지 찢겨 환희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
이어서 희미하던 몸이 돌연 환한 빛과 검은 연기를 일으키더니, 그 사이로 검붉은 빛이 언뜻 스쳤다.
– 아?
최후는, 화정이 깜짝 놀라 탄식을 터뜨렸다.
– 자, 잠깐…!
황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본능에 따라 힘을 뺐으나 무검은 이미 아래로 내려가 타나토스를 가르기 직전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돌연히 시야가 새하얀 색으로 불쑥 칠해졌고,
썩둑.
연한 살을 베는 느낌이 전해졌다.
“아하하하…! 아, 아?”
그와 동시에 깔깔 웃음을 터뜨리던 타나토스가 느닷없이 끝말을 올렸다.
다음 순간, 눈앞으로 분수처럼 솟구친 무언가가 철썩하고 부딪쳐 얼굴을 뜨끈하게 적신다.
나도 모르게 눈을 훔치자, 손등에는 검은 액체가 아닌, 시뻘건 핏물이 묻은 게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분명히 타나토스를 벤 것 같았는데?
– 좋아! 으아, 정말 잘했어!
그때 화정이 몹시 기뻐하는 음성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응시했다. 흰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타나토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안솔?”
“오라버니.”
안솔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하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왼팔은 어디로 갔는지, 어깨째 뜯겨나간 채 단면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타나토스를 베려는 찰나 안솔이 끼어들어 막았다는 건가?
“너, 너….”
“괘, 괜찮아요. 팔쯤이야 얼마든지 다시 붙일 수 있어요. 그리고 죄송해요.”
“아, 아니….”
“하아, 그러니까….”
무언가 말하려던 안솔은 흠칫 얼굴을 찡그리더니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마력도 있는 대로 퍼붓고 화정도 최대로 끌어올렸으니. 아마 단순히 살이 베이는 게 아닌, 뼈 자체가 찢기고, 부서지고, 불타오르는 고통을 맛봤으리라.
하지만, 왜? 어째서?
상황을 살필수록 혼란만 가중되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주변 전투도 모조리 멈췄다. 동료도 악마도 모두 우리가 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다.
특히 악마는 한 놈도 예외 없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흡사 믿을 수 없다는, 끝났다는 듯한 멍하기 그지없는 얼굴….
– 후우우우…. 맙소사, 저건 진짜 어떻게 된 거지?
화정의 긴 한숨이 흐른다.
타나토스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였다. 아득한 눈하며 약간 벌린 입 등, 정신이라도 나간 것처럼 반응 없는 얼굴이다. 흡사 골인 직전 추월당한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자세히 보니 전체적인 모습이 또 한 번 변해 있었다.
전신이 희미한 것까지는 같았으나, 반투명한 몸속으로 악기를 풀풀 날리는 연기가 뭉게뭉게 모여 있었고, 그 사이로 복잡한 형식이 얽히고설킨 붉디붉은 진 하나가 드문드문 비치고 있었다.
설마 아까 잠시 스쳤던 빛이 저거였나?
– 천신사법(天神四法)의 구역. 해계 금진(解界 禁陣).
화정이 약간 힘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봉인 진?’
– 그래. 아까 타나토스의 몸 안에 걸어둔 봉인이 하나 있다고 했지?
‘저게 그거라고?’
– 왜냐는 말투로 묻지 마. 나도 지금 혼란스러우니까.
톡 쏘듯 말한 화정은 거듭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 돌겠네. 어떻게 저 진을 떠오르게 한 거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큰일 날 뻔했다고?’
– 큰일 정도가 아니라 십 년 감수한 거지. 왜냐면 저 진은 타나토스의 힘을 제한하는 요체, 즉 중심 중에서도 중추거든.
‘뭐?’
– 그래. 그대로 내려쳤다면 당연히 저 진도 타격을 입었을 테고, 그 결과 자연스레….
‘……!’
화정은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말을 흐렸고, 동시에 나도 몸서리쳐질 정도의 소름을 느꼈다.
‘잠깐만. 그럼 내가 저 봉인을 풀 뻔했다는 소리야? 그게 가능해?’
– 아 몰라! 나도 모른다니까? 애초 누가 안에서 도와준다면 모를까, 애초 타나토스는 털끝도 건드릴 수 없는 진이라니까!
‘젠장, 그럼.’
– 맞아. 전부 저 망할 년의 연기였어. 열화 검으로는 부족할 것 같고, 기회는 한 번밖에 없으니 가장 확실한 순간을 노린 거야. 빌어먹을 자식.
그렇게 화정이 계속 험한 말을 쏟아내는 동안,
“하, 하하….”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타나토스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럴 리 없어…. 거의 다 됐는데…. 끝이 보였는데…. 어떻게….”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한동안 말을 더듬거리더니,
“어떻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두 손으로 땅을 쾅 치며 원통함에 찬 비명을 길게 질렀다. 중간에 핏물처럼 보이는 거뭇한 액체를 왈칵 토하기도 했다. 아니, 입뿐만이 아니라 숫제 눈, 코, 귀에서도 검은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나 소리는 멈추지 않고 한참 이어졌다.
잠시 후, 타나토스는 어렴풋해진 형상과 시커먼 액체로 범벅된 기괴한 모습으로 일어났고, 곧 미친년처럼 까르르 웃어 젖혔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저년, 저년 때문에 망했어. 저 개 같은 안젤루스 사제 때문에 망했다고!”
“이제 어떡하지? 사탄! 네 계획이 틀어졌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히 사탄이라는 말이 나왔다.
“어떡할 거냐고! 이 개새끼야!”
그때였다.
앙칼지게 고함친 찰나, 갑자기 가래 끓는 신음 같은 소리가 나며 타나토스 안에 흐르던 기체가 밖으로 쑥 흘러나왔다. 시커먼 연기는 곧 악마처럼 보이는 모양을 이뤘는데, 왜인지 낯설지 않은 형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우우우, 우우우우….
더 살피기도 전 연기는 탄식처럼 느껴지는 어두운 음성을 울리더니, 먹구름과 같이 하늘로 치솟는다. 그리고 어딘가로 날아가는 듯,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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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코멘트가 많네요.
아니요. 사실 가슴 뜨끔한 코멘트가 좀 있었습니다. ㅡㅡ;
소제목을 나중에 달기로 한 건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항상 ‘이번에는 들키면 안 돼!’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에피소드든 꼭 한두 분씩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는 분이 계신 듯싶어요. ^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