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4
00913 A Poisoned Chalice, Two. =========================================================================
늦은 밤까지 적당히 축제를 즐겼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깜빡 눈을 뜨니 찬 공기가 콧속을 물씬 찔렀다. 아직 아침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새벽 중인 듯싶다. 한 네 시쯤 됐으려나.
흐릿한 눈을 문지르고 한 차례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안솔이 모포와 침낭에 몸을 푹 묻은 채 한창 달게 자고 있었다. 어제 추격을 끝내고 돌아오니 알아서 잘렸던 팔을 붙였던데, 이렇게 혼자서 잘 견뎌내는 걸 보니 기특하게 느껴졌다.
정말 아팠을 텐데. 생각해보니 안솔도 상당히 달라진 것 같다. 처음 통과의례에서 봤을 때는 약간 모자라 보이던 애가, 오 년 가깝게 지나자 한 명의 훌륭한 사용자로 성장했다. 안솔이 곁에 없었다면 어제와 같은 승리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안솔의 덕을 많이 봤다.
“음냐음냐…. 오라버니…. 더 격렬하게…. 저를 엉망진창으로….”
무슨 꿈을 꾸는지 모르겠으나 기분은 좋아 보인다. 잠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히죽 웃는다. 나는 한동안 안솔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동트기 전이어서인지 밖은 어두컴컴하다. 거리에는 축제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술 내음이 살짝 섞인 바람을 맞자 정신이 한층 맑아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문득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어제 축제를 즐겼던 자리에서 어슴푸레한 형상 두어 개가 보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보자, 혼자서 신 나게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비비앙이 보였고, 맞은편에는 근원이 놀란 눈으로 비비앙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으로 베히모스가 발라당 드러누워 있었다.
비비앙의 식탐과 인간 위장의 신비로움에 관한 고찰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베히모스를 응시했다. 방금 몸을 빙그르르 돌아누운 걸 보니 잠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응시하는 동안 베히모스는 실로 변화무쌍한 뒤척거림을 보여줬다. 좌로 뒹굴 우로 뒹굴은 기본이요, 땅에 이마를 쿵쿵 찧다가, 앉은 자세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종래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안광을 촉촉하게(?) 빛낸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문득 낯설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아마 일병 휴가 나왔을 때였나. 복귀 전날에 잠이 안 와서 미칠 것 같았었는데 그때 딱 저랬던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울컥한 감정이 들었다. 이 자식, 정말 돌아가기 싫었던 거구나.
“베히모스.”
조심스레 옆에 앉으니 베히모스가 나를 흘깃거렸다.
– 아, 오셨습니까.
딱딱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마저도 아련하다.
– 마침 잘 오셨습니다. 슬슬 깨우러 갈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돌아가기 싫은 거야?”
– 저라고 돌아가기 싫겠습니까….
“왜 그러냐.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베히모스는 코가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부분을 쓱 훔쳤다. 그리고 힘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 뭐, 상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잘 좀 달래보지 그랬어. 어쨌든 애잖아.”
– 해봤죠, 해봤습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취하고 동원했습니다. 가능한 선에서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고요.
“…….”
– 솔직히 말해드릴까요? 제가 말입니다. 수나 님 좋으시라고 부하들 앞에서 말 흉내까지 냈는데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개 빡돕니다. 한데 뭔 짓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아니, 일단 진정하고. 애가 화났다면 우선 원인부터 찾아야지. 무턱대고 달래면 쓰나.”
이렇게 말은 해도 막연한 건 매 한 가지였다. 수나가 특이한 아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나를 보고 ‘이런 게 내 아버지라니.’ 라는 낯으로 한숨을 쉬었으니, 아마 나라도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 그래서 묻고 싶은데요. 혹시 뭔가 짚이는 거 없으십니까? 가끔 수나 님과 게헨나 님이 싸우시는 걸 보면 부왕님 이야기가 꽤 나오거든요.
내 이야기라. 사실 짚이는 게 아주 없지는 않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게헨나가 나를 몰래 떠났을 때 강한 불만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제 3의 눈으로 과거를 봤을 때 수나는 울고 있었으니까. 나를 찾으려는 듯 양손을 휘저으면서.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자 베히모스는 일리 있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거참, 그냥 좋게좋게 오시면 될 걸 왜 그렇게 헤어지셔서는….
나직이 투덜거리더니 돌연 퀭한 눈구멍을 휙 돌렸다.
– 아, 이걸 말씀 안 드렸네요. 혹시 헬레나, 그리고 마그나카르타를 알고 계십니까?
생각지도 않은 이름이 나온 탓에 약간 놀라고 말았다. 물론 알고는 있다. 신화시대의 대 영웅 헬레나와 최후의 용 마그나카르타. 이 둘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 두 존재는 현재 지옥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뭐?”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게헨나 님이 다시 꺼내셨습니다. 아니, 소생이라는 표현이 옳으려나요?
“꺼냈다고? 소생?”
이해 못 할 말들이 이어졌다. 아니, 애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 당시 둘은 게헨나를 강제로 돌려보내려는 일환으로 스스로 희생하는 길을 선택했다. 말인즉 차원 이동진 발동을 대가로 소멸한 것이다.
– 응? 왜 그러십니까?
내 표정을 읽었는지 베히모스가 말을 잇는다.
“그건 좀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살아났다는 거지? 영혼까지 깡그리 소실됐을 텐데.”
– 모르셨나요. 저희 쪽에서 발동됐던 진은 분명히 정식 차원 이동진이었습니다만, 부왕님 쪽에서 발동됐던 진은 소환하는 대상의 힘을 보충해주는 기능도 섞여 있었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다. 확실히 그랬다. 게헨나가 소환됐을 때도 이천 명에 가까운 동부 사용자가 양분으로 화하지 않았던가.
– 물론 진을 발동하는 데 존재의 힘 대부분을 썼겠지만, 양분화한 부분도 적게나마 있었겠죠. 단 한 톨이라도 게헨나 님에게 흘러들었다면 마수로 살려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 저도 그렇게 마수가 됐는데요.
어느새 근원은 스리슬쩍 옆으로 다가와 열심히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가능하냐는 뜻으로 근원을 돌아봤다.
“Negative.”
뭐냐. 뭐가 보자마자 부정적이라는 거냐.
“모릅니다. 애초 그 정도의 존재는 제가 감히,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습니다.”
근원은 더는 묻지 말라는 투로 단호하게 말했다.
여하튼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었다.
“한데 왜 둘을 소생시킨 거야? 꼭 살릴 이유가 있나?”
– 있습니다. 부왕님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거든요.
“응?”
–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고요. 게헨나 님은 그 둘이 부왕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면 수나 님이 조금이라도 진정해주지 않을까 기대하셨습니다.
…수나의 장난감용도라고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효, 효과는?”
– 모르겠습니다.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쩝.
글쎄. 말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걸 보니 별로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듯싶다.
– 아무튼, 그래서 말입니다. 부왕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수나 님 좀 달래주지 않으시렵니까?
“내가? 어떻게? 나는 지옥으로 가지도 못하는데.”
– 알고 있습니다. 단지 부왕님이 무언가 선물을 주시거나 한다면 제가 전달해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럼 수나 님의 기분도 풀리시지 않을까요?
“선물이라.”
그 말을 듣자마자 예전에 게헨나와 수나에게 주려고 쟁여놓은 장신구가 떠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틀란타에 있는 터라 지금 바로 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기도 뭐하고.
어쨌든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그 까다로운 아가씨의 입맛에 맞추려면 어떤 선물이 좋으려나?
“아, 기록 구슬은 어때?”
– 예?
“내 영상을 기록한 구슬을 수나에게 보내는 거야. 당연히 내 얼굴도 나오고, 목소리도 나오고.”
– 오오, 오오오오!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한동안 기괴한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납작 엎드려 오체투지를 보였다.
– 역시 우리 부왕님!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부왕! 하고 쌀 뻔했다고요! 진정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다른 인간 여인네와 하하 호호 웃으며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고 일러바치지도 않겠습니다!
호오. 설마 했건만,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있었다는 거냐. 아니, 이 고자질쟁이라면 분명히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라고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다.
“좋아.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봐.”
나는 구슬을 가져온다는 구실로 잠자던 곳으로 돌아와, 약간의 시간을 들여 영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베히모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구슬을 건넸다. 물론 입에 침을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그런데 수나에게 꼭 먼저 보이는 게 좋을 거야.”
– 응? 왜요? 제가 보면 안 됩니까? 설마 이상하게 녹음하신 거 아녜요?
“아쉽게도 일회용이거든. 같이 보는 건 상관없지만, 뭐, 보고 싶으면 먼저 보던가?”
– 아, 아닙니다. 그렇군요. 목숨을 걸고 지켜서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싱긋 미소 짓자 베히모스는 바로 깐족거리는 걸 멈췄다. 그래도 이 선물이 효과가 있으리라 확신한 걸까. 느닷없이 전역을 하루 앞둔 말년 병장처럼 태도가 변하더니, 고맙다고, 살려줘서 감사하다고 연신 뇌까리며 소환 진으로 서둘러 모습을 감췄다.
흠. 그나저나 아까 베히모스가 수나보고 뭐라고 했더라? 애새끼 주제라고 했던가?
베히모스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전 인원에게 전장을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만큼, 마냥 퍼져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쉬는 건 하루로 충분했다.
기실 북 대륙 사용자들도 큰 불만은 없었다. 시신을 버리고 소각하는 일이 좀 귀찮을 뿐, 시체의 장비를 벗기는 일은 성과 획득과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원 즐겁게 전장 정리에 참여하는 가운데, 나는 홀로 성벽 주변을 거닐었다. 그리고 전쟁을 하나씩 천천히 곱씹었다.
하나씩 정리해보니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하나씩 속속히 드러났다.
첫 번째. 대 악마 여섯 중 셋은 잡았으나 셋은 도주에 성공했다.
이 말은 타나토스가 아직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타나토스도 똑같이 여섯 조각으로 나뉘었지만, 세 조각이 남아 있으니.
화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조각을 잃은 만큼 예전과 같은 힘은 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험한 존재니 주의하라고.
두 번째. 마족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이게 가장 불안한 부분이었다. 남 대륙을 관장하던 천사 수만이 희생됐으니 마족도 상당수 넘어왔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결과만 보면 악마만 나타났고 마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한꺼번에 전력을 드러내지 않은 걸까? 어떤 의도가 있길래?
세 번째. 없다.
엘도라의 시체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군 중 누가 선점했을 수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왜냐면 엑스칼리버는 물론, 내가 직접 벗겼던 장비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럼 결국 적들이 도주 중에 가져갔을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살아 있는 상태도 아니고, 굳이 가져갈 이유가 없잖은가.
이렇게 세 가지 이유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어느 것 하나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딱 하나 확실한 건, 우리는 전쟁에서 크게 이겼고, 남 대륙과 악마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일단 염두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아틀란타로 돌아갈 때까지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행동하면 될 터. 어쨌든 현재는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돌아가기에 앞서, 나는 클랜 로드들과 의견을 나눠 동 대륙을 북 대륙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만에 하나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적들이 어딘가 숨어 우리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 대륙 대표인 아키노는 처음에는 이주 계획에 난색을 보였으나,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지켜줄 수 없다고 말하니 군말 않고 동의했다.
그리하여 동 대륙의 일을 일단락 지은 후, 우리는 동 대륙 생존자들을 호위하며 성을 떠났다.
올 때는 하루가 멀다고 달렸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동 대륙 외곽 소 도시까지 오 주에 걸려 도착했다면, 북 대륙으로 돌아가는 데는 정확히 오십육 일, 팔 주라는 시간이 걸렸다.
============================ 작품 후기 ============================
김수현이 떠난 후, 성으로 돌아온 오벨로 기사단장 : 큭…. 검의 군주여, 죄송합니다! 적을 놓치고 말…. 응? 어, 어디 가셨지?
*
원래 김수현의 기록 구슬을 받은 수나, 게헨나, 베히모스의 내용도 적고 싶었는데….
너무 졸리네요. ^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