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7
00916 A Poisoned Chalice, Two. =========================================================================
“자, 여기요.”
사용자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뭉텅이로 건네자, 고연주는 냉큼 채가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속박의 볼라 입니다. 저번에 하나 주지 않았던가요?”
“네. 알아요. 그런데 뭐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싼 맛에?”
“싼 맛이라니요. 그거 하나당 들어간 GP만 칠십오만입니다.”
그러자 나른하던 고연주의 두 눈이 단박에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그럼 총 얼마예요? 하나, 둘, 셋…. 열. 칠백오십만 GP?”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지금이야 저와 고연주가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곧 중앙 대륙 공략 발표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러네요. 원정에 나가면 관리가 힘들어지니까, 애초 이것들로 꽁꽁 묶어두시겠다?”
“그렇지요.”
고연주는 이해했다는 듯이 끄덕거리며 싱겁게 미소 지었다. 세 가닥 긴 끈의 끝에 달린 추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두 젖무덤 한가운데 오목하게 패인 선 사이로 쏙 집어넣는다. 저 여인은 심심하면 가슴골을 주머니로 쓰는 듯싶다.
이윽고 고연주는 문을 나가기 직전, 아차 하며 반쯤 몸을 돌렸다.
“아, 수현? 천사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썩 신경 쓰일만한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흐응?”
“바알과 벨제부브를 처리해줘서 고맙다…. 이렇게만 말하더군요.”
고연주는 오묘하게 웃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저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않고 방을 나섰다.
이윽고 조심스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나는 한숨과 함께 책상 한 켠에 놓인 엑스칼리버를 바라봤다.
햇빛을 반사하는 검신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나, 여전하다. 곧 죽어도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살이 따가울 만치 무형의 날을 잔뜩 세우고 있다. 흡사 몸을 웅크려 가시를 빳빳이 세운 고슴도치를 보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사용자 상점에는 자아를 가진 장비의 마음을 돌릴만한 물건은 없었다. 물론 내 성향을 바꿀 수 있는 품목도 찾지 못했다. 딱 하나 가능성을 본 게 있다면 엑스칼리버를 강제로 타락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조차 사정을 들은 세라프가 반대했다. 뭐라더라? 그 정도로 선 성향이 강한 장비는 스스로 타락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던가?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백이면 백 파괴될 거라고.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꾸준하게 선행을 쌓고 성향을 변경하는 게 그나마 가능성 있을 거라고.
하지만 말을 하면서 계속 나를 흘깃거렸던 걸 보면 아마 ‘그냥 포기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제 그만 인정하지 그래? 너도 알잖아. 엘도라보다 내가 더 주인에 적합하다는 걸.”
기껏 말을 걸었으나 엑스칼리버는 아무 반응도 않는다. 아니, 날카로운 기운만 더 심해졌다. 스리슬쩍 손을 뻗으려니 물길을 거스르는 듯한 저항이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한 달 동안 똥통에 처박아 놓을까 고민했지만, 간신히 참고 손끝으로 순백의 몸을 느긋이 쓸었다. 흡사 여인의 허리선을 내리훑듯 부드럽게. 훑을수록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손바닥에 올올이 전해졌으나, 개의치 않고 칼자루를 잡고 올려 엑스칼리버를 가까이했다.
웅웅!
그렇게나 싫은지 칼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가히 논개와 비견될 정도의 절개로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뭐,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끙끙 싸매기보다는 그냥 즐기는 게 낫겠다. 빅토리아의 영광처럼 온순한 칼도 좋지만, 엑스칼리버도 나름 괜찮지 않으려나. 반항을 보는 맛도 있고, 강제로 함락하는 재미도 있고 말이지.
사실 고작 칼 하나한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좀 웃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좋다.
“기대하겠어. 과연 네가 언제까지 버틸지 말이야.”
나는 후후 웃으며 눈앞의 새하얀 나신을 살짝 핥았다.
우웅…. 우우, 우웅….
엑스칼리버는 철천지원수이자 악당한테 당해버린 여주인공이 흐느끼듯 처연한 검음을 흘렸다.
*
예상대로였다. 중앙 관리 기구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결과, 북 대륙의 반응은 뜨거웠다. 안 그래도 약간 찜찜했던 전쟁으로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적절한 시기에 중앙 대륙 공략 계획이 발표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한 것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여느 원정과는 다르게 참가 조건을 대폭 확대한 것도 단단히 한 몫 했다. 아틀란타에서 양껏 꿀을 빨았던 만큼, 장밋빛 꿈에 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러 클랜 로드가 모인 정식 회의도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조롭게, 화기애애하게 풀려나갔다. 애초 이 년 차 이상의 사용자는 무조건 참가하게 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우리도 참가하겠다.’ 나 ‘너희가 양보해라.’ 같은 건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아틀란타를 이끌어가는 클랜은 전부 강철 산맥 공략 경험이 있는 곳이다. 이러쿵저러쿵할 것도 없이 ‘공략 방침은 강철 산맥 때와 똑같이 하겠다.’ 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악마, 서 대륙, 남 대륙을 염두에 둬야 하는 만큼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따져보니 저희가 썩 유리한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로드, 성현민이 이제껏 열심히 필기한 기록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말했다.
“괴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본거지인 북 대륙과 아틀란타는 말할 것도 없고, 공략 루트를 이어주는 보급 요새의 방비도 신경 써야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우리 전력은 자연스레 분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은 마음만 먹으면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성현민의 의견은 구구절절 옳다. 사실 처음 회의가 시작됐을 때 ‘전 인원이 한꺼번에 같이 가자.’ 는 의견도 있기는 했다. 장점은 하나. 돌발 상황 때 즉시 전력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이번 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왜냐면 중앙 대륙을 돌파하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약속의 신전이 있는 지역에 도착하고 나서가 더 문제였기 때문이다.
법역을 깨트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림자 지대, 검의 지대, 철혈의 지대, 신성 지대, 시험의 지대….
일 회차 때도, 최정예 사용자 일만 명이 열여덟 번이나 시도해서야 간신히 약속의 신전 바로 앞까지 공략하지 않았는가. 단순하게 발견하는 것만 해도 반년이 걸린 곳이니.
말인즉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 될 것이 자명하니 이번 원정만큼은 중간 보급이 필수였다. 그래서 강철 산맥 공략 때처럼 요새를 세우자는 말이 나온 거고.
“그래요. 강철 산맥 때와 상황이 다르니 확실히 약점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래서 머셔너리 로드가 그러셨잖아요?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자고.”
선율이 검지로 턱을 톡톡 튕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현민의 의견에 내가 내놓은 보완책은 우리도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세라프에게 이야기 들었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적들이 워프를 활용하고 있다면, 우리도 똑같이 활용해주면 된다.
물론 현재 헬레나가 없기는 하지만, 근원이 있으니까. 확인한 결과 ‘할 수 있습니다.’ 라는 아주 명료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상황은 우리에게 상당히 유리해진다. 기실 누가 먼저 중앙 대륙에 도착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은 이번 전쟁의 여파로 전력상 열세에 놓였으니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북 대륙이 공략을 완료하고, 제로 코드를 획득한 후 돌아갈 때를 노려 기습하지 않을까.(제로 코드는 움켜쥐었다고 끝이 아닌, 소환의 방에서 천사를 통해서만 발동할 수 있다.) 약속의 신전쯤 되는 유적이면 우리 쪽 피해도 만만찮을 테니까.
그러나.
가까운 곳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고, 공략이 끝나자마자 그곳으로 쏙 들어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것 같은데.
“정말 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면 저는 머셔너리 로드 의견에 손을 들고 싶네요. 왜냐면 인원이 많으면 통제하는 것도 짜증 나고, 무엇보다 먹고 자는 것도 일이거든요?”
선율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성현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러나 무어라 채 말하기도 전,
“아, 돌발 상황이요? 뭐가 문제예요? 워프 게이트 설치는 몇 분이면 충분하다고 하셨고, 그럼 적이 나타나는 즉시 통신만 때리면 될 텐데. 말인즉 포탈만 있으면 바로 지원할 수 있잖아요? 경계만 잘하면 된다는 거죠.”
선율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또 맡은 지역 공략만 끝내면 다른 원정대가 공략하는 동안 쉴 수도 있잖아요. 원정 중에 체력 안배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그럼 돌발 상황 때 더 쌩쌩하게 대처할 수도 있겠죠?”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그러네. 한꺼번에 간다? 그럼 모두 지쳐 있을 때 불시에 기습당하는 상황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겠네.”
“지금 마법의 탑 로드는 너무 극단적인 예시만.”
“아무튼, 저는 이 무수한 장점을 포기하기가 싫네요.”
“…뭐, 알겠습니다.”
결국에는 선율의 속사포 공격을 이기지 못한 성현민이 쓰게 웃었다. 사실상 백기 선언이었다. 기실 참석한 클랜 로드 중 과반수가 선율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는 터라, 더 끌어봤자 회의만 지루해질 뿐이었다.
이리하여 성현민이 뜻을 꺾는 순간을 기점으로, 회의는 잠정적으로 끝을 알렸다.
잠시 후, 자리가 파하는 분위기를 느낀 듯 곳곳에서 여러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정리하면 강철 산맥 때 계획을 기본 골자로…. 아, 그러고 보니 메모리아 스톤이 문제네요. 머셔너리 클랜이 가지고 있다는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마 구 북 대륙 소 도시에서 공수할 것 같습니다.”
“참가하지 못하는 사용자들이 반발할 수도 있어요.”
“어쩔 수 없죠.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사실 이건 중앙 관리 기구가 직접 나서주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왼쪽에 앉은 한소영과 형이 서로 쳐다보며 끄덕거리는 가운데,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던 이효을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흠.”
그러나 기침 소리가 워낙 작아서일까. 누구 한 명도 돌아보지 않고….
“흠흠!”
아닌데? 방금은 분명히 들렸는데? 일부러 무시하는 거라고 느꼈다면 내 착각인가?
“후유. 그나저나 준비도 걱정입니다. 접때 보니 요새 건설도 쉬운 일이 아니던데요.”
“자재 확보도 그렇지만, 건축 관련 기술자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지. 강철 산맥 때는 이 문제로 경쟁까지 했고, 암암리에 갈등도 있었잖수.”
“그럼 차라리 이것도 일임하는 게 어떨까요? 중앙 관리 기구가 대표로 자재와 기술자를 확보한 후, 각 원정대에 공평하게 배분하는 겁니다.”
“오? 캬, 그럼 우리는 자금만 보내면…. 아니, 그것참 공평한데. 정말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 합시다!”
이어서 오른쪽에 앉은 서지환과 김덕필이 활짝 웃으며 끄덕거렸다.
…와, 이건 좀 너무 한다. 특히 서지환은 자기가 상인 조합 클랜 로드라고….
아니, 그전에 멍한 얼굴로 엿듣고 있던 이효을의 얼굴빛이 핼쑥해졌다.
“저…. 잠시만요?”
숫제 손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놀라울 만치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번 원정만큼은 불필요한 갈등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저기요?”
“백 번 천 번 옳으신 말씀이요. 시작하기도 전에 삐거덕거리면 될 일도 안 될 테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중앙 관리 기구는 현재 동 대륙 사용자들을 받아들이는 일 때문에….”
이효을은 필사적으로 말을 꺼내고 있었지만, 왜인지 어느 순간 웅성거림이 높아진 탓에 자연스레 묻히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알아서(?) 협의를 끝냈는지 장내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슬쩍 쏠렸다. 신기한 건, 나를 흘깃거리면서도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세에 밀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에…. 뭐…. 혹시 이번 계획에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 분 계십니까?”
아니요!
뭐냐. 왜 갑자기 입을 모으는 거냐.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회의를 끝내…. 도 될까요?”
네!
그렇게 동시에 합창하더니 이내 전원 한 마음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누가 잡을세라,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르르 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기백 명 가까이 차 있던 회의장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텅 비어버렸다.
이효을은 울음을 터뜨렸다.
============================ 작품 후기 ============================
약속의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빠르게 진도를 뽑겠습니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