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8
00917 A Poisoned Chalice, Two. =========================================================================
시간을 돌려, 동 대륙 전투가 끝나고 사흘 후.
엘도라가 눈을 떴을 때, 가물가물한 시야로 들어온 건 초록색 숲의 풍경이었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하지만, 본능에 따라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일렁거리던 초점이 조금씩 잡힌다.
깨어난 귀는 사위로 수군거리는 소음을 들었고, 동시에 머리가 부서질 듯한 강렬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윽….”
엘도라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메마른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감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찌어찌 뒤척거리는 것 같기는 한데, 자기가 몸을 움직이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에는 눈을 도로 질끈 감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마가 찢어질 것 같던 현기증이 잠잠해지고, 몸의 감각도 조금이나마 돌아왔을 때.
그 시간 동안, 엘도라는 응당 가져야 할 의문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이곳은 어디인지.
동료는 어디 있는지.
전쟁은 어찌 됐는지.
또, 자기는 어떻게 살아났는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엘도라는 살며시 눈을 뜨며 습관처럼 땅을 더듬었다. 그러나 엑스칼리버가 잡히지 않아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온통 숲인데도 주변은 후덥지근했다. 게다가 비린내 섞인 악취가 코를 찌를 정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엘도라는 그제야 여기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둑한 하늘 아래, 곳곳에 흩어져 신음하는 사용자들이 한 명씩 차츰차츰 밟히기 시작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죽은 듯 누워 미동도 않는 사내였다. 특이한 건, 복부가 살덩이째 뭉텅 베어져 있다는 것이다. 치료는 받은 듯 출혈은 멈췄으나, 장기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 옆에는 한 여인이 한 손으로 눈을 감싼 채 소리 없이 오열하는 중이었다. 남은 손으로는 허공을 마냥 휘젓는 게 꼭 맹인을 보는 듯하다.
멍하니 보고 있던 엘도라는 순간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그러나 비로소 직시한 현실은 아직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왜냐면 저 한 곳만이 아니라, 인근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부상당한 사용자는 연신 앓는 침음을 흘리는 중이고, 그나마 몸은 건사한 사용자는 침통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잠시 후, 망연히 눈을 돌리던 엘도라의 두 눈이 갑자기 화들짝 치떠졌다.
요요한 달빛이 드리운 숲의 한쪽에 익숙한 거한이 폐인처럼 주저앉아 있다. 몇 년을 봐왔는데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다. ‘심판의 기사’ 에드워드였다.
한데, 두 팔 중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왼쪽 어깨서부터 깔끔하게 절단돼 있다.
“에드…?”
엘도라는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을 꿈이라고 믿고 싶은 걸까.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또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나,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축 처진 음울한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전쟁의 끝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졌다.
남 대륙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엘도라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절망과 사무칠 정도의 죄책감을 통감했다.
사지가 무참히 찢겨나갔던 나탈리, 갑자기 나타난 기사 무리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장면 등등.
생각하기 싫은 기억들이 뇌리에 아스라이 스쳤다. 울 힘만 있다면 목놓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 깨어났나?”
그때 약간 먼 곳에서 건들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정수리에 뿔이 돋은 건장한 체격의 악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스타로트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 살았어? 이야, 그 양반 진짜 괜히 죽음의 신은 아닌가 봐?”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스타로트가 다가올수록, 엘도라는 돌연히 분노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미는 걸 느꼈다. 껄렁하게 걸어오며 씩 웃는 게 흡사 조롱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기분은 어때…. 컥! 무슨 짓이야?”
느긋하던 음성이 금세 탁해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가만히 있던 엘도라가 득달같이 달려와 멱살을 틀어쥔 것이다.
“감히 벌레 새끼가….”
찰나의 순간, 아스타로트의 눈동자가 진한 불꽃을 튀겼다.
“어째서야!”
그러나 엘도라는 더욱 힘주어 상대를 들어 올렸고,
“어째서냐고!”
한 번 더 빽 소리 지른 순간, 아스타로트의 눈매가 천천히 누그러졌다.
“너희도 병사가 있었잖아! 일만을 넘는 마족 전사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어째서 도와주지 않은 거야!”
엘도라는 숫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허, 참….”
아스타로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흘렸다.
“그놈들은 따로 할 일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우선 정신 좀 차리지 그래?”
“뭐?”
“눈 부라리지 마라. 너희만 당한 게 아니니까. 거의 죽었던 널 데리고 도망치는데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기나 해?”
“거의…? 죽었던…?”
그 순간이었다.
“!”
자기도 모르게 말을 따라 했던 엘도라는 갑자기 깜짝 놀라며 “힉!” 딸꾹질을 했다.
풀썩!
이어서 다리 힘이 풀린 듯이 털썩 엉덩방아를 찧는다.
“어이? 어이! 왜 그래?”
아스타로트의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나 엘도라는 반응은커녕, 두 손을 엇갈려 팔을 꽉 움켜쥐었고, 곧 사시나무 떨 듯 덜덜거리기 시작한다. 혼란해 하던 얼굴빛은 어느 순간 공포에 질린 기색이 역력하다.
왜냐면, 비로소 떠올렸으니까.
자신이 기억하는 전장 최후의 순간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를 시종일관 갖고 놀던 북 대륙의 사내를.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상대였다. 힘도 엇비슷하고, 검술은 밀리지 않으며, 속도는 자신보다 훨씬 빠르다. 특히 한 번 칼을 부딪칠 때마다 엑스칼리버가 위축되는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 소름 끼친다.
그래, 그야말로 완벽하게 꺾였다. 처음에는 나탈리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어 달려들었지만, 이후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때그때 맞춰서 검을 휘둘렀을 뿐, 전투 내내 압도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El Doradooooooooo!’
그뿐일까. 자신이 필생의 힘을 들인 능력을 불타는 검으로 가볍게 깨트리더니, 기어코 장난감 취급까지 당했다.
장비가 하나씩 강제로 벗겨지며 엉엉 울면서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빌던 치욕은 떠올린 순간부터 잊히지 가 않는다.
결국에는 복수도 못 하고 쫓겨 도망치고 말았다. 사용자가 된 이후, 항상 승승장구만 하던 엘도라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굴욕이요, 상처였다.
게다가 앞서 느꼈던 책임과 죄악감까지 더해지니, 삽시간에 미치기 직전까지 내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겉은 강해 보일지 몰라도, 속은 영락없는 소녀였으니.
“힉…! 힉…!”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눈알은 급격히 충혈되고, 딸꾹질도 점차 강도가 심해진다. 눈매는 더 이상 확대할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쩍 벌어진 입은 고인 침을 뚝뚝 떨구는 중이다. 온몸을 웅크린 채 무섭게 떠는 모습은 흡사 병동에 갇힌 정신병자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 홀딱 발가벗겨진 채 희롱당하다가, 끝내 등에 칼이 꽂히고 내부가 쾅 폭발할 때의 끔찍한 느낌까지 기억해낸 순간,
“끄으으으으으으으!”
엘도라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찢어지라 잡아당겼다. 그때였다.
“엘도라?”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와 잔잔한 음성이 겹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폭발 직전까지 갔던 엘도라의 상태가 덜컥 멈추더니, 떨림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멜…. 멜리너스…?”
엘도라가 한껏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흰 수염을 늘어트린 노인이 가까이 다가와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깨어나셨군요. 정말로, 정말로 다행입니다.”
“멜리너스…. 멜리너스…!”
엘도라가 부모 찾는 아이처럼 팔을 뻗자, 멜리너스는 부드러이 달래듯이 그 손을 마주 쥐었다. 이윽고 차가운 뺨에 거무스름한 눈물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한다. 정작 자기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저, 저 때문에….”
“아니요, 아닙니다. 절대로 엘도라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면 우리 모두의 잘못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제가….”
“괜찮습니다. 엘도라?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지요. 자, 이쪽으로….”
멜리너스는 흐느끼는 엘도라를 부축하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조금씩 멀어지는 여인에게서 아스타로트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대 악마가 안타깝다는 감정을 느낄 리는 추호도 없다. 단지 아까 흘렀던 거뭇한 눈물과 시꺼멓게 죽은 눈동자를 보고 흥미로워하고 있을 뿐.
“인간은 볼수록 참 신기하다는 말이야.”
그때 누군가가 맑은 목소리로 싱글거렸다.
아스타로트는 흠칫 옆을 돌아봤다가, 어느새 나와 있는 타나토스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지…. 요. 고작 한 번 졌다고 저렇게까지 망가졌으니까, 요. 한심하죠.”
“어설픈 존대는 집어치우자고. …어쨌든, 맞아. 너희 동맹 상대 잘못 고른 거 아니니? 차라리 걔로 하지 그랬어. 그, 누구라고 했지?”
“김수현. 우리도 할 수만 있다면 그놈과 손을 잡았을걸? 한데 그놈도 좀 웃기는 게, 우리를 처치하고 천사까지 상대하려는 것 같아서. 쯧.”
“킥!”
아스타로트가 바로 말을 놓으며 혀를 차자, 타나토스는 소리 내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킥킥거리더니 힘껏 기지개 켜며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응? 이 아니지.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황인 거 알고는 있니?”
“…….”
“그 대계의 예언…. 아 몰라. 아무튼, 나는 여섯 조각 중 세 조각밖에 못 찾았고. 너희도 여섯 중에 절반이 결딴났고. 악마 군주는 말할 것도 없네. 그리고 남 대륙은~. …보다시피 저렇고.”
“글쎄. 모르겠는데.”
간단하고 담담한 음성에 타나토스가 옆을 흘끗 흘겼다. 아스타로트는 양팔을 늘어트린 채 머리를 푹 숙인 상태였다.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네. 그냥 털어놓지 그래?”
“모른다고 했잖아. 애초 계획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건 루시퍼였으니까. 설마 당할 줄은 몰랐지만, 놈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냥 기다려야지.”
“헤에~. 아! 저번에 들어보니 무슨 길을 뚫으라고 하던데. 혹시 그걸 기다리겠다는 거야?”
“아아…. 그건 그거고, 정작 기다리는 건 따로 있거든. 아마 지금쯤….”
그렇게 말한 아스타로트는 살짝 머리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아니, 곧.”
잠시 말을 끊더니 한쪽 입꼬리가 느긋하게 올라간다.
시이이잉!
불현듯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윽고 ‘분노의 악마’의 동공이 가로로 쭉 찢기며, 시꺼먼 눈동자가 흉포한 빛을 발한다.
그 상태로 아스타로트가 말을 이었다.
“사탄이 강림할 거거든.”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우선 일러스트는 오늘 새벽 중에 완성됐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독자분들께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공간이 공지사항에 올리는 건데,
이상하게 공지사항에 올릴 때마다 일러스트가 깨지거나, 상당히 흐릿해집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여러 번 파일을 바꾸고 크기도 변화해보셨건만, 원본의 선명함이 살아나지가 않네요.
혹시 문제 해결 방법 아시는 분께서는 코멘트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아 이번 일러스트 진짜 예쁘게 나왔는데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