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19
00918 A Poisoned Chalice, Two. =========================================================================
붉은 해가 서편으로 저물자, 요정의 숲에도 밤이 찾아왔다.
비죽비죽 우거진 수풀과 땅에 빽빽하게 박힌 무성한 나무. 게다가 늦은 시간, 각처에 낀 밤의 안개는 음침하고 스산하며, 왜인지 앙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언뜻 보면 여느 수림과 다름없는 풍경이지만, 저 숲의 특성을 아는 사용자라면 물씬 느껴지는 을씨년스러움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본디 요정이 생활 터전으로 삼는 숲은 사시사철, 주야장천 아름다운 곳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요정 때문이 아니라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영향으로, 아침에는 따뜻하고, 점심에는 선선하며, 저녁에는 고요하면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출된다는 게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말인즉 현재 요정의 숲이 저렇게 된 건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아니면 위그드라실과 연관된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거나.
한편, 같은 시각.
“흑!”
어두컴컴한 숲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몰래 수음이라도 하는 걸까. 입을 꽉 틀어막았으나, 손가락 틈을 비집고 새는 듯한 신음이 간헐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야릇하게 들린다기보다, 고통에 겨워 앓는다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으으으윽!”
그때 목소리가 갑자기 한층 커졌다. 동시에 신음의 주기도 점차 짧아져 작은 방은 삽시간에 자극적인 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하아…. 하아….”
한 차례 고통이 가셨는지 에르윈은 숨을 약하게 몰아쉬었다. 소복이 쌓인 풀잎에 누운 가녀린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땀에 전 머리카락이 뺨에 찰싹 달라붙은 것이 흡사 산고를 겪는 임산부를 보는 듯하다.
잠시 후, 힘겹게 옮겨진 손 하나가 봉긋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에르윈은 지금 가슴에서 휘몰아치는 미지의 기운에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발현된 현상은 아니다. 요정의 숲에 오기 훨씬 전부터, 정확히는 엘도라와 엑스칼리버의 칼집을 찾으러 갔을 때부터 느꼈던 기운이었다.
단지, 처음에는 가슴이 갑갑하거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니뮤에가 까닭 없이 사라진 이후, 이 기운의 활동이 갑작스럽게 활발해졌다. 에르윈이 오랜 친우를 잃은 절망, 상실감에 몸부림칠 때마다, 그 기운은 마이너스한 감정을 양분 삼아 서서히 몸집을 불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완전히 이빨을 드러낸 것이고.
기실 씨앗의 발아 성공 여부는 주변 환경이 첫 번째 조건이라 볼 수 있다. 비옥한 토지에서는 무리 없이 과실을 맺지만, 척박한 땅에서는 싹을 틔우기도 어렵다.
이렇게 보면 아무리 질 좋은 ‘악마의 씨앗’이라도 에르윈의 심신은 발아하기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러나 토지가 아무리 거칠어도 개간을 거치면 쓸모 있는 땅으로 변하듯, 에르윈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에르윈은 거의 확신에 가깝게 직감하고 있었다. 이 기운이 조금만 더 커지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려 들 거라는 걸.
불현듯 에르윈의 뇌리로 과거 석관의 봉인을 해제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에 휩싸였던 기억이 아스라이 스쳤다.
“후우우우….”
이제는 숨소리조차 떨려 나왔다.
‘안 되겠어…. 이대로는….’
간신히 숨을 추스른 에르윈은 견딜 수 없는 수마가 밀려오는 와중에도 용케 기억을 더듬었다.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가봐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르윈의 고개가 툭 젖혀졌다. 지칠 대로 지쳐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몸의 진동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약하게나마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르르, 스르르르!
에르윈이 잠들자마자, 무언가가 꼭 닫힌 문틈으로 홀연히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일견 기체, 즉 연기처럼 보였다. 검붉은 빛이 언뜻 비치는 연기. 물론 이 연기의 정체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지만, 만약 김수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리고 저 연기를 목격했다면. 아마 안솔에게 가로막힌 직후의 타나토스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잠시 후.
찰나의 순간, 흡사 구렁이 똬리 틀 듯 풀잎 주변을 휘감던 연기가, 돌연 에르윈의 몸으로 쭉 흘러들어 간다. 눈, 코, 입, 귀 등 구멍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도 예외는 없었다. 요정의 육신은 꼭 가뭄이 찌든 땅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한없이 연기를 빨아들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검붉은 연기는 한 톨도 남김없이 흡수돼 사라졌고, 끊임없이 전율하던 몸 또한 돌연히 떨림이 멎더니 안정을 찾는다. 그와 동시에 에르윈이 쓰러져 누운 그 상태로 공중으로 느릿하게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일 미터가 훌쩍 넘게 떠올랐을 즈음. 이번에는 천천히, 몹시 천천한 속도로 앞으로 빙그르르 회전한다.
그렇게 절반쯤 회전해 두 발바닥이 바닥에 살짝 닿은 순간이었다.
어떤 전조도 없었다.
그냥, 감겨 있던 에르윈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화아아악!
동시에 시뻘건 안광을 폭발하듯이 터뜨려 작은 방을 확 밝힌다. 예의 잔잔한 물색 눈동자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섬뜩하고 불길한 빛깔이었다.
“흠. 끝났나.”
이어서 들려온 음성은 짧지만 분명히 에르윈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담담하면서도 메마른 게 어딘가 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설령 수백 년간 가까이 지낸 친우라도, 한 번쯤 돌아보게 할 법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다.
“흐으으으….”
참았던 숨이 기다랗게 토해졌다. 그리고 목을 좌우로 꺾거나 팔을 빙글빙글 돌리는 등, 뜬금없는 행동이 이어진다.
그렇게 한참이나 몸을 푸는 듯한 행동을 하더니, 에르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괜찮군. 포르세우스가 꽤 잘 만들어줬어.”
*
평소와 같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은 아침이었다.
그러나 머셔너리 캐슬은, 아니 성뿐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실로 부산한 분위기였다. 오늘이 바로 중앙 대륙 첫 공략을 시작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첫 타자는 아틀란타 외 도시 중 서쪽을 차지한 구 북부 연합이었다. 공찬호를 위시한 원정대는 자그마치 육천 명에 가까운 인원을 편성했고, 기대와 환호 속에 이른 아침 남 도시 정문을 떠났다.
워프 게이트를 활용하는 만큼 굳이 따라가거나 배웅할 필요는 없으나, 머셔너리 클랜은 대부분이 원정대가 출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왜냐면 머셔너리 클랜원 중 근원이 홀로 북부 연합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두 번이나 고생하는 것이지만,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근원은 언제나처럼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명의 작별 인사를 받은 근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원정대와 떠났고, 구경을 끝낸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이제 겨우 원정 첫날이니 벌써 설레발 칠 구석은 없으나, 북부 연합이 전초 기지를 건설하고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면, 그 시점부터 매 순간순간 대기해야 하기에 미리 준비하는 게 옳다.
비비앙은 습관적으로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로 향하려다가, 워프 게이트 앞에 이르러서야 아차 하고 걸음을 돌렸다. 마지아에 있던 메모리아 스톤을 가장 먼저 가져간 만큼, 중앙 대륙 공략이 끝날 때까지는 갈 수 없을 터.
중간에 중앙 관리 기구 수장이라는 여인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던 광경을 제외하면, 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성의 정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갑작스레 호출석이 반응했다. 김수현의 호출이었다.
서둘러 엉덩이를 깨끗이 씻은 비비앙은 나는 듯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달려가는 기세처럼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는 비비앙. 이내 두 눈이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본 것처럼 황당함으로 물든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칼 가지고 왜 저래?’
방 안에는 김수현이 흰 천으로 곱게 싸인 엑스칼리버를 든 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찌이이익!
이상한 건, 그 천을 옷 찢듯이 단숨에 쫙 찢어발겼다는 것이다. 그냥 얌전히 벗기면 될 걸 말이다.
웅웅!
한데 칼은 더 이상하다. 아무리 자아가 강하다지만, 검신이 노출된 순간 왕왕 울어버리기 시작한다. 호의라고 보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문밖의 비비앙조차 살이 바늘로 콕콕 찔리는 듯했으니.
“흥.”
그뿐만이 아니었다. 싸늘하게 웃은 김수현이 검신을 거침없이 만져나간다. 손끝으로 쓱 훑는 건 양반이요, 심지어 양손으로 꽉꽉 주물럭거리기까지. 여인을 희롱하는 것처럼 참으로 요사스러운 손놀림이다.
이윽고 손을 멈춘 김수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엑스칼리버를 톡 건드렸다.
“후. 이거 정말 웃기는 검이군. 그렇게나 고고한 척하더니, 몇 번 만져줬다고 이렇게 기뻐해? 성(聖)스러운 검이 아니라, 그냥 야한 성(性)검이었잖아? 하하.”
그러자 수치심이라도 느낀 걸까.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엑스칼리버의 힐트(Hilt)가 파르르 떨린다. 김수현은 씩 웃었다.
“아니라고? 글쎄…. 아무리 자아로는 싫다고 해도!”
그리고 자아가 깃든 보석을 기습적으로 핥은 순간,
우, 우우우우우웅!
엑스칼리버는 전례 없는 힘찬 검음을 토해내며 눈 부신 빛을 터뜨렸다. 검신을 폭발적으로 물들이며 올라간 빛의 물결은, 끝내 칼끝으로부터 찍 뿜어졌다.
“네 몸은 정직하군.”
그 말과 동시에 빛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푸들푸들 경련하는 블레이드(Blade)를 따라 점점이 흩어진다.
이윽고 김수현은 엑스칼리버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후, 문으로 눈을 돌렸다.
“끝났다. 들어와도 돼.”
비비앙은 순간적으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균형을 잡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김수현은 손을 탁탁 털더니 책상 안으로 돌아가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 김수현?”
가만히 보고 있던 비비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아…. 능욕, 아니지. 조교라고나 할까.”
“능욕? 조교?”
“그래. 칼을 좀 길들여야 하거든.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
김수현은 담담히 대답했다. 비비앙은 반사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쩝…. 그래. 뭐, 너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런 거 안 해줘?”
“뭐?”
“아니! 왜 불렀어어!”
“……?”
비비앙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질러버렸다. 김수현은 잠깐 갸웃했으나, 곧 서랍을 닫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 구 북부 연합 원정대가 떠난 거, 너도 알고 있지?”
“어, 응. 방금 떠나는 거 보고 돌아오는 길인데?”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이제부터는 좀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 그 전에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서. 거기에 네 힘이 필요하다.”
“응? 우리 차례는 네 번째 아니야? 북부 연합의 서 도시,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동 도시, 해밀 클랜의 북 도시, 그리고 우리 머셔너리 클랜의 남 도시. 시간이라면 꽤 있을 텐데.”
그러나 김수현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번 계획의 요체는 워프 게이트야. 물론 당장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실상 떠난 순간부터 빈틈없이 기다려야지. 뭔 일이 생기는 순간 곧바로 넘어가야 하니까.”
“그런가…. 아무튼, 뭘 도와주면 되는데?”
비비앙이 턱을 주억거리자, 김수현은 손에 쥔 것을 살짝 주머니로 숨겼다.
“제 삼 군단 좀 소환해줘.”
“제 삼 군단?”
반문하기는 했지만, 한 번 소환한 전적이 있는 만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군단과는 다르게 마법 진을 그려야 한다는 게 귀찮을 뿐이지.
잠시 후, 질서의 오르도를 소환한 비비앙은 차분히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조용히 흐느끼는(?) 검음 때문일까.
집중하면 할수록, 아까 엑스칼리버를 농락하던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생각은 곧 김수현의 손바닥에 펑펑 맞아, 빨개진 엉덩이를 부여잡고 우는 자신을 상상하는 망상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선율이라는 여인이 가르쳐준, 아헤가오 더블피스라는….
“어, 어어어어!”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잠깐 진을 잘못 그려서….”
“거참…. 오늘 안에만 하면 되니까, 천천히 해.”
김수현은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비비앙은 고개를 휘휘 흔들다가, 다시 한쪽 구석에 처박힌 엑스칼리버를 흘깃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좋겠다….’
============================ 작품 후기 ============================
저번에 말씀드린대로, 오늘 제가 정오에 약속이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6월 27일(토요일) 하루는 외전이 연재됩니다.
게헨나, 수나, 베히모스 등이 등장할 예정이며, 정상 연재 때보다는 분량이 적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 너른 양해 부탁드리며, 6월 28일(일요일)부터 다시 정상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PS. 새 표지 올렸습니다. 새 일러스트의 주인공은 한소영이었습니다. 참 어여쁘지 않나요? 하하.(표지, 공지사항, 뜰에 업로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