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23
00922 A Poisoned Chalice, Two. =========================================================================
해밀 원정대가 공략한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주변 경치는 완전히 달라졌다. 경계선 전이 흉흉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삼림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행군하는 곳은 맑고 깨끗한 공기가 가득한 계곡이었다.
게다가 심신이 저절로 경건해질 만큼 거룩한 기운마저 흐르는 지역이어서인지, 마르는 행군 내내 밝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오죽하면 그 얌전한 애가 휴식 시간에 다가와 ‘아버지. 저 이 장소가 무척 마음에 드는데 잠깐 뛰어놀면 안 돼요?’ 라고 천연스레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였다.(당연히 허락해주지는 않았다. 이런 대규모 원정에서 개별 행동은 절대로 금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 된다고 하자, 귀를 축 늘어트리며 시무룩하게 돌아서는 마르를 보고 있으니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우리가 이제껏 지나쳐온 지역은 법역 안에 존재하는 지대를 일부나마 표현한 게 아니겠느냐는.
그렇잖은가. 검푸른 강철 빛과 핏빛을 띤 수림과, 세 번째 통과의례인 철혈(鐵血)의 지대. 그리고 신성한 계곡과, 네 번째 통과의례인 성스러운 지대.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가만히 따져보니 정말 하나씩 연결되는 것 같다.
여하튼 아무리 고결하다고 해도 차후 공략해야 할 지대임은 변하지 않으며, 이 지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옛날의 기억을 살려 일 회차 때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계곡을 통과하는 길은 총 두 개가 있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큰길은 이 심협(深峽)의 터줏대감인 괴물의 군락지로 막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이곳을 완전히 공략한 결과, 군락지를 빙 돌아가는 옆길 하나를 뒤늦게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원정에서 그 샛길로 가는 걸 선택했다. 길도 좁고 좀 돌아가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괴물과 마주칠 가능성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약속의 신전을 공략하기까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 하니 그나마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오래전부터 이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는 놈들이니, 아예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많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확실히 잦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괴물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만큼 아마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정찰 겸 다가온 것이리라.
그때마다 나는 선유운을 불러 가까이 오는 괴물을 조용히 저격하라 지시했고, 성공하면 사체를 회수해 소각한 후 신속히 그 자리를 떠났다.
만에 하나 놓치기라도 한다? 그러면 돌아간 놈이 군락지에 있는 무리를 이끌고 나타날 건 명약관화였다. 나중에는 우정민의 조언을 받아, 여러 마리가 출현할 걸 대비해 열 명 남짓한 저격수 그룹까지 운영했다.
기실 원정대 자체가 정예만 모인 집단이고, 거기서 또 가리고 추린 결과 활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궁수들이 모였다. 그래서인지 저격수들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 내 기대에 부응하는 실력을 뽐냈지만, 위험한 순간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딱 한 번 있었다.
약간 험한 지형의 사잇길을 통과할 때였나. 완만한 협곡 위로 스무 마리가 넘는 놈들이 갑자기 우수수 나타났다.
절반은 우리를 보자마자 ‘캭! 캭!’ 거리며 뛰어 내려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남은 절반이 문제였다. 무자비하게 난자당하는 동료를 보고 꽤 놀랐는지 곧바로 줄행랑을 놓은 것이다.
저격수들이 발 빠르게 쫓아가 대부분 처치할 수 있었으나, 워낙 지세가 불리했던 탓에 아깝게 두 놈을 놓치고 말았다. 그중 한 마리는 고연주가 능력을 발휘해 가까스로 잡는 데 성공했지만, 남은 한 마리가 문제였다. 애초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림자 여왕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해결사로 나선 게 바로 ‘천궁(天弓)’ 선유운이었다.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는 먼빛의 괴물을 겨냥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랏빛 장궁을 거뒀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느닷없이 하늘로 화살을 쏴 올렸다.
처음에는 페널티 킥에 실패한 선수가 화가 나서 공을 뻥 차버리는 식의 행동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생각을 수정하기까지는 오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늘로 멀리멀리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화살이 돌연히 구름을 헤치며 등장하더니,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점으로 변한 괴물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마치 독수리가 단숨에 먹잇감을 채는 듯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저격이요, 꼼짝없이 한바탕 싸워야겠구나고 씁쓸해하던 나로서는 십 년 감수한 일이었다.
원정대의 작은 환호 속에서 선유운은 담담한 얼굴로 사체를 회수해오고 불태웠다. 무언가 신기하다는 기분에 어떤 능력이냐고 물어봤지만, 살짝 웃을 뿐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 3의 눈으로 봤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 우리는 행군을 재개했다. 여전히 매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적어도 일 회차 때보다 갑절은 순조로운 진군이었다. ‘괴물 무리와 충돌을 피하고 최대한 빠르게 벗어난다.’ 는 목표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
처음 일 주차를 넘었을 때는 기연미연했으나, 행군 이 주차가 가까워질수록 확신이 생겼다. 근 나흘 동안 괴물은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잦으면 아침저녁으로, 늦어도 하루걸러 꼬박꼬박 나타나던 놈들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풍광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갑자기 확 변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발밑을 맴도는 물안개가 보였고, 밟는 곳마다 물렁물렁하고 축축한 감각이 전해졌다. 시야가 약간 묵직해지기는 했으나 행군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차츰 긴장이 풀리면서 원정대의 분위기도 살짝 느슨해졌다.
“우와~. 근원아 근원아. 이거 뭐야? 조준선 정렬 투(Two)? 이거 궁수 능력 아니었어? 마법사가 어떻게 이걸 쓸 수 있는 건데?”
“…….”
“어라? 이건 응용 마법…. 앗, 왜 숨기는 거야. 나도 좀 보자~. 같이 보자~. 응?”
“…….”
제갈 해솔은 근원이 탐독하는 기록을 몰래 훔쳐보려다가, 근원이 보여주지 않으려 하자 귓가에 숨을 후 불어넣거나 옆구리를 꼭 찌르는 등 이상한 짓거리를 했다. 그러나 허준영이 화난 얼굴로 한 마디 하니 울상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근원은 무심한 눈으로 허준영을 빤히 응시하다가, 쥐고 있던 기록 한 장을 스리슬쩍 내밀었다. 그러나 허준영은 본체만체하더니 예의 못마땅한 눈초리를 사방으로 뿌렸다. 그러자 수군거리거나 킥킥대는 소리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요요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걷기만 했다. 가끔 바람결에 실려오는 아스라한 소리만이 귀를 간질일 뿐이다. 그러나 정체 모를 꿈결 같은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나도 모르게 청력을 돋워 집중한다.
화난 듯 몰아쉬는 숨소리, 짧은 탄식 소리, 보스락보스락 자갈 밟는 소리, 지저귀는 산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훌쩍거리는 소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앞선 소리는 금세 사라졌다가 다시 들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끅끅거리는, 누군가 우는 듯한 소리만은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다. 주위도 아까보다 한층 적막해졌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껴 근처를 둘러봤을 때, 발목 부근에 흐르던 안개가 어느 순간 가슴까지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제야 환몽에 사로잡혔음을 깨달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안개 때문인지 시야가 잔뜩 흐려졌으나 딱히 환상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계곡을 걷고 있었고, 조금 어렴풋해지기는 했지만, 동료들의 기척도 느껴졌다.
「끅…. 끅….」
단지, 눈앞으로 땅에 웅크려 누워 있는 앳된 청년이 불현듯 나타났을 뿐.
「너무해…. 정말 너무하잖아…. 나쁜 년…. 나쁜 년….」
“하.”
순간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쪼그려 누운 채 궁상맞게 눈물을 훔치고 있는 청년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니, 저건 일 회차의 나잖아.
언제였더라…. 아, 기억났다. 광장에서 쭈뼛쭈뼛하다가, 탐험에 끼워준다는 말을 듣고 덥석 참가했을 때였나? 처음에는 잘 대해줘서 으쓱거렸지만, 애초 미끼로 쓰기 위한 포석이었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오니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 소량의 은화만 받고 쫓겨났고.
생각해보니 그때는 참 원망했던 것 같다. 탐험을 이끌었던 리더가 나를 벌레 보듯 쳐다봤던 눈초리는 아직도 잊히지 가 않는다. 그 사제 여인, 지금은 뭐 하고 지내려나.
그때 또 한 명의 내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환몽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등장인물이 좀 많다.
「왜 못 도와주겠다는 건데!」
「형이 방금 말했잖아. 아직도 모르겠어? 벨페고르의 계략이 확실하다니까.」
「아 됐어! 나 혼자라도 갈 거야! 말리지나 마!」
「수현아? 수현아! 제발 형 말 좀….」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빽빽 소리 지르는 나와, 곤란한 얼굴로 나를 붙잡는 형. 그리고 나를 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는 과거의 해밀 클랜원들.
음…. 으음…. 보고 있으려니 몹시 부끄럽다. 이때 참았으면 그 강력했던 해밀 클랜이 풍비박산 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민폐도 저런 민폐가 없었지. 형도 참 보살이야.
그래도 약간 신기하기는 하다. 아니, 그립다고 해야 하나. 혹은 부러운 걸까.
두 환몽에 등장한 나는 하나같이 울고 있었다. 어리석고 멍청한걸 떠나서, 저렇게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참으로 인간다웠다.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였더라. 지금은 울고 싶어도 못 울 것 같은데 말이지. 모든 일이 끝나면 한 번쯤 시원하게 울어볼 수 있으려나.
뭐, 모르겠다.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는 방법, 아니 운다는 행동 자체를 잊어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세 번째 환몽이 나타났다.
「수현아…. 수현아….」
이윽고 흑단 같은 머릿결과 깊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나타난 순간,
“이런 씨발….”
나직이 욕설을 뱉으며 있는 힘껏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마력을 끌어올리고 화정의 힘도 일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저 기억만큼은 절대로 다시 보기 싫었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 잠시 후, 백치처럼 헤 웃는 여인의 형상이 차츰차츰 흐려지기 시작한다. 가슴까지 차오른 안개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이래서야 아직 꿈을 꾸는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어떻게 내 항마력을 뚫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우선 걸음을 멈췄다.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방금 환몽이 괜히 나타났을 리는 없을 터.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일층 시력을 올려 가볍게 주변을 훑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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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많이 달아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_(__)_
의견이 여러 개인 만큼 서로 갈리기도 하고,
그에 따라 많은 고민도 들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니드를 아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독자님들이 만족하실 수 있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7월이네요.
독자분들 모두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으시기를 바라요. 😀
PS. 저는 명백한 사납고 거칠고 흉포한 야생의 수컷 곰입니다. 암컷 곰 아니라니까요. 특히 웅녀라는 별명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네요. …뭐, 제 3차 로리 전쟁을 감수하실 수 있다면, 저도 기쁘게 응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