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24
00923 A Poisoned Chalice, Two. =========================================================================
“오빠?”
“클랜 로드?”
갑자기 멈춰 서자, 나를 따라오던 클랜원들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등 뒤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지더니, 칼을 뽑는 소리나 주문을 외는 소리 등이 들렸다. 아마 어딘가 괴물이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갑자기 긴장이 치솟은 가운데,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신재룡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리고 검지가 하늘을 향하도록 천천히,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눈에 보이는 건 자욱하게 흐르는 연기와 흐릿한 색으로 칠해진 구름 하늘뿐.
그러나.
“하늘? 아무것도 안 보이는…. 응?”
“어? 방금 뭔가 반짝이지 않았나요? 허공에서요.”
그 외에 존재하는 것도 분명히 있었다.
“무언가가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투명한 장막 같은….”
차소림이 가장 정답에 근접하게 말했다.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어 아스라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좌우로 끝까지 눈을 돌려도,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고 투명한 장막이.
말인즉.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행군을 재개를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동안,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다름 아닌 머셔너리 원정대는 어느 순간 계곡 지역을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잠시 후.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목표 지역에 근접해서 행군을 멈췄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더 이상 진군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원정대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왜냐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허공에서 은은한 빛을 반짝이는 가루들이 점차 선명해지더니, 종래에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더 나아갈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밀고 발로 차봐도 무형의 막은 두꺼운 철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 길었던 소란이 지나간 후, 클랜원들은 하나같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장막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후아아아, 신기해….”
안솔은 숫제 얼굴을 딱 붙여 살살 문질러보는 중이었다.
“이야, 이거 조금만 떼어다가 팬터마임(Pantomime)용으로 사용하면 돈 좀 벌겠는데?”
진수현은 두 손을 댄 채 이런저런 몸짓을 취하더니 혼자서 낄낄거렸다.
“…….”
그리고 나는 넋을 잃은 기분으로 정면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여전히 애애(靄靄)한 안개로 언뜻 보면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긋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깨진 거울 속 광경을 보는 듯, 혹은 물에 비친 세상을 보는 듯.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경계선 너머는 이 세상과 미세하게 엇갈려 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으나, 가까이서 보니 불균형한 분위기가 확 와 닿는다. 과거에 봤던 그대로였다.
펑!
그때, 인근에서 작은 폭발 소리가 느닷없이 터졌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김한별이 찡그린 얼굴로 두어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특급 보석을 사용했는데도 흠집도 안 나…?”
그러더니 손을 툭툭 털며 나를 바라봤다.
“오빠.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부수기는 힘들 것 같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녜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차 함과 동시에 정신이 확 맑아졌다.
그래, 이제 겨우 외곽에 도착했을 뿐.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 차리려는 요량으로 스스로 뺨을 때리고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이어서 차분히 숨을 고르니 김한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멍하니 구경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천천히 발을 들었다.
쿵.
그리고 가볍게 땅을 내리찍자, 전원 깜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행군은 이곳에서 멈추겠습니다.”
진군 종료를 선언하니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가타부타할 건 없어 계속 말을 이었다.
“신재룡.”
“예.”
“이 근방에 요새를 건설하겠습니다.”
“이, 이곳에 말입니까?”
“자재나 건축 재료는 신 코란 연합이 관리하고 있을 겁니다. 최대한 넓게, 못해도 일만 명은 수용할 수 있도록 건설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지시였던 걸까. 신재룡은 갸우뚱하기는 했지만, 군말 않고 몸을 돌렸다.
“고연주.”
“네?”
“궁수와 암살자를 소집하세요. 요새를 건설하는 동안 사방을 철통같이 경계해야 할 겁니다.”
“음…. 그런데 워낙 안개가 짙어서….”
살짝 말을 흐리기는 했으나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연주는 이내 선유운을 데리고 어딘가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근원.”
“…….”
“한 번 더 수고해 줘.”
“액셉트.”
근원은 보랏빛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고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한 만큼 알아서 넓은 장소를 찾는 것 같다.
“정하연.”
“중앙, 후방으로 상황을 전파하면 되나요?”
정하연은 이미 통신 구슬을 꺼내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 더 해야 하는 게 있다.
“예. 그리고 근원이 워프 게이트 활성화하기를 기다렸다가, 이스탄텔 로우, 북부 연합, 해밀 클랜에 통신을 넣으세요.”
“네?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진군을 종료하는 즉시 각 원정대에서 주력이 넘어오기로 했습니다. 이미 얘기가 된 사항이니 간단하게 상황만 전달하시면 될 겁니다.”
“네. 저도 언뜻 들은 것 같은데 깜빡 잊고 있었네요.”
요새 건설, 경계, 워프 게이트 활성화, 그리고 상황 전달까지.
정하연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릴 즈음, 남은 클랜원도 하나둘 정신을 차린 듯했다. 처음 보는 이상 현상에 잠깐 정신이 팔렸지만, 이제부터는 정신을 정말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단 눈앞의 법역을 공략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건, 간간이 출현하는 괴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가장 큰 적이 남아 있다.
현재 악마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안개가 심한 터라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는 며칠 후 이곳에 도착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 반대편에 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 도착하고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단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다.
잠시 후, 뿔뿔이 흩어지는 클랜원과 등 뒤가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끼며 나는 연초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리고 다시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법역.
생각보다 순조롭게 도착하기는 했다.
그러나 발견했다고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진군을 멈췄을 때 중천에 걸려 있던 해는, 시간이 흘러 서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사용자 대다수가 근방을 경계하고 정찰하는 동안, 요새 건설도 조금씩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터를 잡거나 얼기설기 울타리를 친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걱정은 한 시름 덜었다. 왜냐면 한 시간 전을 기점으로 다른 원정대의 주력이 무사히 넘어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사천오백 명이던 인원도 단숨에 일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이 정도 병력이면 설령 적이 공격해온다손 쳐도, 지원군이 넘어오기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네 개의 보급 요새를 짓고, 워프 게이트로 요새 간 통로를 잇는다.’ 는 일 차 목표는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이번 계획의 크나큰 약점으로 꼽혔던 ‘길을 개척하는 도중 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는 위험은 사라졌다.
한편, 소식을 듣고 넘어온 클랜 로드들은 ‘길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라는 이상한 상황을 직접 확인한 후, 전원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현상이니만큼 어리둥절하기도 할 터.
이후 임시로 설치된 막사에 모여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사실상 전부 탁상공론에 불과한 헛된 가설이었다.
“안 될 거라도 있나? 까짓거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는 깨지겠지.”
“공찬호 씨는 그게 문제예요. 왜 항상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머리를 쓰자고요, 머리를.”
선율은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핀잔을 줬으나, 이번만큼은 공찬호 말이 옳다.
법역을 깨트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외부에서 꾸준히 차곡차곡 손상을 입히는 수밖에 없다. 저 벽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해제할 수단이 있었다면, 애초 일 회차 때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기대할만한 거라고는 화정뿐인가?
그때였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가 오고 가던 와중, 문득 한 사내가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라고 외치며 후다닥 들이닥쳤다. 길이 막힌 부분의 둘레를 따라 걸으며 경계선을 긋다가, 이상한 장소를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안 그래도 열띤 토론으로 분위기가 한층 달아오른 상태였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클랜 로드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고, 우르르 몰려나갔다.
한 명만 빼고.
“후유, 이제 좀 얘기할 수 있겠다.”
형은 휑한 막사를 둘러보며 쭉 기지개를 켰다. 워프 게이트를 열자마자 가장 먼저 넘어왔는데,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 눈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형이 말문을 열었다.
“흠…. 걱정이네.”
“응?”
“악마 말이다. 사실 이 근방에서 맞닥뜨릴 줄 알았거든.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
“수현이 네 생각은 어떻지?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려올 것 같아?”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형의 걱정에는 십분 공감한다.
동 대륙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이 개월, 정비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는데 약 한 달, 그리고 이곳까지 도착하는데 이 개월.
총합 오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공평하게 흐르니 어느 쪽이든 무언가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사탄이 신경 쓰였다. 그 당시, 타나토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연기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때는 추격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겼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 연기는 사탄의 형상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실제로 타나토스가 사탄을 부르기도 했고.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사탄은 과연 백오십일 동안 어떤 계획을 세웠을까?
되려 내가 궁금한 기분에 형을 쳐다보자, 형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몰라도 어쩔 수 없나. 일단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취했으니…. 그나저나 기분이 어때?”
“?”
“여기까지 잘 왔잖아. 끝을 앞둔 기분이 어떠냐고.”
“흐흐.”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막연하네. 막막하기도 하고.”
“막연하고 막막해?”
“동 대륙에서 말해주지 않았나? 저 안이 얼마나 거지 같은 곳인지.”
“수현아? 말투.”
“미안. 어쨌든 보면 알 거야. 미리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지도.”
“…그렇게 힘드냐?”
형은 약간 못 믿는 눈치였지만,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힘든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손 쳐도, 법역을 부수는 과정부터는 몹시 지루해진다. HP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언제 깨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법역을 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 정예 사용자 일만 명으로 열여덟 번 공략해서 겨우 약속의 신전 앞까지 공략했다. 이 말로는 감이 오지 않는 건가? 게다가 일 회차 때의 북 대륙 사용자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는데.
“글쎄. 안쪽의 지대와 비교하면 동 대륙 전쟁은 애들 장난인 수준일걸.”
“뭐?”
“아니. 어쩌면 그 전쟁은 천국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허….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급 궁금해지는데. 우리도 한 번 가볼까?”
놀라는 반응이 재밌어서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 형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나도 따라서 일어서기는 했지만 사실 썩 기대는 하지 않는다.
“가는 건 상관없지만, 별것 아닐 텐데. 그냥 넓은 제단이랑 이상한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있는 정도?”
“뭐가 적혀 있는데?”
“몰라.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 또 뭐라더라. 자격이 있으면 길은 자연스레 열린다? 아무튼, 그래. 쓸데없는 기록이야.”
“그래도 한 번 가보자. 과거와 현재가 다른데, 무언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어쩌면 일 회차 때 찾아내지 못한 걸 발견할 수도 있는 거고.”
하. 형의 말대로만 된다면 오죽 좋을까?
기실 법역이나 지대를 빼고 계산하면 약속의 신전은 순수하게 대여섯 시간 거리에 있다. 그러면 늦어도 여섯 시간 후, 나는 홀 플레인 역사상 두 번째로 제로 코드를 쥘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십오 년간의 고생도 끝날 테지.
…뭐, 그럴 일은 전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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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어제 코멘트를 보고 깜짝 놀랐네요.
제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정말이지 작금의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하는 하루였습니다.
후….
제 3차 로리 전쟁.
예. 좋지요.
하지만 제가 설마 정말 독자분들과 전쟁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어이하여 이리도 제 뜻을 몰라주시는지요.
독자님들.
정녕 전쟁을 원하신다면,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우선 대화로 좋게좋게 풀어봐요.
저부터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거두절미하고, 곧 완결이잖아요.
완결 전에 로유미, 로유진미, 웅녀 등등의 망측한 꼬리표는 떼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리고 부탁 드립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yo. _(__)_
저는 독자분들을 믿습니다.
아니, 제 기대에 부응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