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27
00926 A Poisoned Chalice, Two. =========================================================================
웅.
“……?”
뭐지? 어디서 떨리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아니, 마력이 흐를 때 나는 울림이었나?
분명히 고막이 살짝 진동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후좌우를 돌아봐도 별로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는 여전히 짙은 안개가 흐르고 있고, 사용자들도 딱히 유별난 기색 없이 이야기만 나누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허 참….”
그 순간이었다.
갸웃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웅웅!
아까보다 한층 웅혼해진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응? 뭐지?”
“어디서 난 소리야?”
비단 나만 들은 것도 아닌 듯싶다. 방금까지 수군거리던 이들이 하나같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기둥! 이쪽 기둥이 이상해요!”
그때, 누군가가 뾰족하게 소리 지르며 네 개의 기둥 중 하나를 가리켰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좌측 상단에 세워져 있던 기둥이 느닷없이 웅장한 굉음을 울렸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발생한 현상. 그리고 미처 무어라 말하기도 전, 기둥이 시커먼 불빛을 깜빡깜빡 터뜨리기 시작한다.
삽시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더니,
웅, 웅웅!
웅, 웅웅!
무려 두 개의 기둥이 추가로 흔들리며 소음을 힘차게 퍼트린다. 마치 첫 번째 기둥과 공명이라도 하듯, 빛이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면서.
“어? 어어어어, 어어어어!”
그 순간 아까 소리 질렀던 여인이 돌연히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두 눈은 찢어질 듯 커져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곳에는 아까 봤던 낡디낡은 기둥이 아니라, 검정 물감을 끼얹은 듯 온통 시꺼멓게 칠해진 기둥이 서 있었다. 그늘인지 그림자인지 모를 시커먼 기운을 뭉클뭉클 흘리는 채로 말이다.
게다가 우측 상단에 있는 기둥은 윙윙거리며 서슬 퍼런빛을 뿜더니, 이내 살이 에일 정도로 날카로운 기운을 곳곳으로 분사한다. 흡사 잘 벼려낸 한 자루의 칼처럼 몹시 예리하기 짝이 없다.
그뿐일까.
정신없는 와중, 문득 철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인 차가운 내음이 코를 훅 찔렀다.
“이게….”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좌측 하단 모서리에 있던 기둥 또한 어느새 검푸른 색과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찰나의 순간, 무수한 변화가 발생했다. 사용자들이 깜짝 놀라 우르르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나는 심안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침착히 현상을 관찰했다.
상황부터 정리하자.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현재 갑자기 반응한 기둥은 세 개. 즉 총 네 개 중에서 오직 우측 하단에 있는 기둥만이.
웅, 웅웅!
생각하기가 무섭게 네 번째 기둥마저도 변화를 일으켰다.
우우우웅!
처음에는 앞선 세 개의 기둥처럼 깜빡거리며 빛을 비췄다. 그러나 표면으로부터 각중에 눈부시리만치 희멀건 한 빛을 발한다.
각양각색의 변화를 보이는 네 개의 기둥을 나는 멍하니 응시하기만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 회차와 똑같을 줄 알았는데.
그때처럼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사태는 머릿속에 입력돼 있지 않다. 아니, 애초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꽈앙!
최후는 빛의 화려한 폭발. 네 기둥이 꼭대기로부터 형형색색의 광선을 방출한다.
발사된 빛줄기는 처음에는 하늘을 관통할 기세로 수직으로 쭉 상승했다. 그러나 돌연 소라 껍데기의 나선무늬처럼 빙그르르 회전하며 모이더니, 종래에는 엄청난 속도로 한 점으로 뭉쳐 어마어마한 빛을 터뜨렸다.
화아아악!
온 세상이 환하게 밝혀졌다. 마침내 완성된 광경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하는 걸 보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퉁!
그 어떤 예고도 없었고, 아무 전조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는, 하늘로부터 이어지는 검은빛 기둥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의 정수리로 정확하게 꽂혔다.
그 누구도 아닌, 고연주를 향해서.
“아?”
심지어 그림자 여왕조차 인지 못 한 공격이었던 걸까.
“수, 수현!”
뒤늦게 비명이 터졌다.
“고연주!”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아차 한 순간, 고연주는 순식간에 검은빛에 삼켜졌다. 그리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법역 안쪽으로 쑥 빨려 들어가버렸다. 방금 눈앞에서 봤지만, 그러고도 믿지 못할 장면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퉁!
“아악!”
그러한 찰나, 반대편에서 또 한 번 높은 비명이 터졌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막 제단에 한 걸음 걸친 남다은이 시퍼런 빛에 직격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몸을 돌리기도 전 빛에 우수수 휩싸이더니, 조금 전과 같이 법역으로 미끄러지듯이 쭉 빨려 들어간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다. 오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두 명이 사라졌다. 이대로는…!
“영역 선포(Area Declared)!”
영역 선포를 외치자마자 또다시 하늘에서 기둥이 추락했다. 이번에는 검푸른 빛과 검붉은 빛이 뒤섞인 빛깔이었다.
그러나.
우직, 우지지직!
“!”
이어지는 광경은 진정 현실이 아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일 초.
단 일 초도 버티지 못했다. 화정의 힘을 기반으로 한 영역이 종잇장처럼 쫙 찢어발겨 졌다. 그리고 세 번째 광선은 마치 이러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막을 유유히 깨트리면서 가열차게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 아래에는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한소영이 서 있었다.
더는 생각할 틈도 없다.
나는 구슬에 마력을 있는 대로 불어넣으며,
“이스탄텔 로우 로드!”
곧장 이형환위를 발동, 한소영 곁으로 이동해 와락 끌어안았다.
“엄…! 머, 머셔너리 로드?”
“가만히…!”
광선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과 내가 한소영을 부둥켜안은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우우우우웅!
키이이이이잉!
밀고 밀리는 소음이 귀를 괴롭힌다. 흘끗 눈을 뜨자, 눈앞의 시야가 잔잔한 물에 바위를 던진 듯 출렁거리는 파문을 그리는 중이다.
확실히 하늘 요새 급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게헨나의 수호 요새는 광선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면 품에 넣어둔 구슬이 돌연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인즉 구슬이 저 광선의 힘을 버티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까?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게 소비돼 벌써 바닥을 보이는…?
쩌적, 쩌저저적!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붉은 막마저도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설마 방어에 집중한 겁화조차 견디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러는 동안 기둥이 네 번째로 강림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아, 아버지…!”
이어서 흰빛이 번쩍 폭발하며 누군가 나를 아련한 목소리로 부르기까지.
또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미처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계란 껍질처럼 갈라진 틈으로 광선이 줄줄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호막은 거의 깨질락 말락…. 아니.
콰자자작!
깨졌다.
“아, 안 돼…!”
다음 순간, 빛줄기는 해일처럼 밀려와 우리를 왈칵 덮쳤다.
나는 한소영을 힘껏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력도 전부 떨어졌거니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
뜻밖에도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려나.
그저 귀가 먹먹해지면서, 어딘가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만이 전신을 순식간에 잠식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위가 적막해졌다고 느꼈을 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목을 간질였다. 내 호흡은 아닐 테고, 그럼 한소영의 숨소리인가?
차분히 양손을 움직이니 왼손에서는 탄탄한 등의 감촉이, 오른손에서는 찰찰 한 머릿결이 만져졌다. 무엇보다 내 가슴을 압박하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인 가슴이…. 아니, 아니지. 어쨌든 품에서 한소영이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뜨고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냐면.
“고연주?”
“…바득!”
“남다은.”
“…흥.”
“마르야?”
“…흑.”
앞서 사라진 두 여인이 두 방향에서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는 왜 내 눈에 보이고 있으며, 또 어째서 서운하다는 얼굴로 눈물짓고 있는 걸까?
“그래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고연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시가 잔뜩 돋친 말투였다.
“언제까지 껴안고 있을 건데요?”
응?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내 쇄골에 얼굴을 묻고 있는 한소영이 보였다. 흡사 어린 소녀처럼 두 손을 꼭 모은 채 오돌오돌 떨고 있다. 게다가 얼굴빛 또한 빨갛다 못해 잘 익은 홍시를 보는 듯하다.
“아!”
나는 이제 생각난 척하며 서둘러 물러섰다. 사실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만, 워낙 감촉이 좋아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예?”
“또, 또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또, 또 제 몸을 좋아해 주셔서….”
왜인지 평소의 한소영답지 않게 말을 심히 더듬는다. 잠깐,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하이고…. 아주 뜨뜻하네요? 왜요? 잠시 자리라도 비켜줄까요?”
고연주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가슴이 뜨끔했기 때문이다.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다은아. 언니 진짜 서운해.”
“저도요. 정말 너무 섭섭해요.”
“어떻게 사람이 그래? 누구는 껴안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누구는 손만 뻗으면 끝이야?”
“언니. 저는 아예 손도 뻗어주지 않았는걸요. …생각하니까 화나네.”
두 여인이 번갈아 가며 나를 공격한다.
“오빠. 우리 얘기 좀 해.”
남다은은 숫제 풀썩 주저앉아 맞은편 땅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쳤다.
“아버지…. 저는 봐주지도 않으셨으면서….”
거기다 마르는 한술 더 떠,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흡사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하다. 아까 누가 어렴풋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마르였던 모양이다.
“마르까지…. 그래요. 어디 한 번 얘기나 들어보죠.”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왜? 안 앉을 거야? 오빠 진짜 이럴 거야? 나 화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 아주 죽여라. 죽여.
“그만 좀 하세요!”
그때.
“상황이 얼마나 급했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갑작스레 날 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소영이 나와 세 여인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이럴 수가.
“하? 말씀하시는 것 좀 봐. 외부인은 빠져요?”
“외부인이고 아니고가 중요한가요? 무슨 억하심정으로 머셔너리 로드를 이렇게 몰아붙이시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네요.”
“어머. 우리 철혈 여왕이라는 분께서, 듬직한 사내가 안아주니 기분 좀 좋으셨나 봐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적당히 하시라는 말이었는데.”
한소영이, 그 한소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 나를 가려주고 대신 받아쳐 주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감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극한 상황에 몰리다 보면 자연스레 본성이….”
아니. 그렇다고 불 난 집에 기름 끼얹지는 말아주셨으면.
그때였다.
한소영의 뒤에 숨어 상황을 관망하던 찰나, 문득 주변 광경이 눈에 밟혔다. 사방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첫 번째 관문, 그림자 지대.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일 회차 때는 법역을 깨자마자 이 장소가 드러났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그림자가 터져 나와 사방팔방을 휩쓸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조용한 걸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온 거고?
“!”
그 순간, 어디서 웅성웅성하는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먼빛으로 무언가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도 눈에 잡혔다.
잘못 본 게 아니다. 흐릿한 실루엣 같은 형상이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싸며 몰려오고 있었다. 허허벌판이 검게 물들여지며 살금살금 밀려오는 광경은 진정 공포에 가까웠다.
“그마아안!”
나는 힘껏 고함치며 뒤를 돌아봤다. 불행 중 다행일까. 밖에서 봤을 때처럼 빛나는 가루를 떨어트리는 법역이 있었지만,
쾅!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칼로 베어도, 화정의 힘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퇴로는커녕, 전 방향이 모조리 막힌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실루엣은 오십 미터 안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네 여인도 상황을 인지한 듯싶다. 어느새 말다툼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각자 무기를 꺼내거나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며 서로 등을 맞댄다.
“모두 제 곁으로!”
나는 남은 마력을 박박 긁어모아 한 번 더 보호 요새를 발동했다.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애초 이 상황 자체가 계산 밖이었다.
이윽고 정면 방향으로 침범해오던 실루엣이 돌연 소리 없이 솟구쳤다. 그리고 서로 덕지덕지 들러붙어 군집하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손처럼 보이는 하나의 큼직한 형상을 이루어냈다.
저것도 본 기억이 있다. 일 지대에서 가장 악명을 떨쳤던, 아마 그림자 거인의 일부를 형상화한 것이리라.
잠시 후, 그림자는 손을 꽉 말아 쥐며 우리가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도착하는 대로 후려갈기려는지, 손목이 뒤로 살짝 젖혀지기까지 한다. 나는 이를 악물며 충격에 대비했다. 이렇게 된 상황은 차치하고서라도,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단은 버틴다. 버티면서 기회를 본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왔어요!”
이 미터가 넘는 그림자 손이 마침내 지척까지 다가왔다.
“모두 조심…!”
그리고.
똑똑.
“…….”
똑똑~?
“……?”
============================ 작품 후기 ============================
사탄의 안배가 무너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한 건 사탄 쪽이 아니지요. 물론 김수현도 아니고요.
전전 회와 전회의 Reminiscence를 읽으시면, 아마 감을 잡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